━━ 감성을 위한 ━━/세계문학

좁은 문 - 앙드레 지드.24

Joyfule 2010. 3. 11. 11:17
 
좁은 문 - 앙드레 지드.24   

일종의 도전적인 기본에서, 우리의 기다림을 짐짓 연장하면서, 
또한 불완전한 재회에 대한 두려움도 있고 해서 설날까지 
며칠간의 휴가를 내어 빠리의 
미스 아슈뷔르똥 곁에서 보내기로 우리는 합의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러한 편지들을 전부 옮겨 쓰고 있는 건 아니다.
2월 중순쯤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그저께 뤼 드 빠리를 걷다가 M 서점 진열대에서 전에 네가 알려 주긴 했지만 
그 사실에 대해서는 믿을 수가 없었던 그 아벨의 책이 
공공연히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 퍽 놀랐어. 침을 수가 없었어. 
그래 서점으로 들어갔어. 
그렇지만 그제목이 너무나도 야릇해서 점원에게 감히 말할 수가 없어 주저했지. 
아무 다른 책이나 사들고 서점을 나와 버릴까 하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다행히도 카운터 옆에 '미태' 한 더미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어 
한 권을 뽑아 쥐고는 입도 열지 않고 백 수우를 던졌어.
아벨이 그 책을 내게 보내 주지 않은 데 대해 감사해. 
책장 넘기기가 면구스러웠어. 그 책 자체 때문이 아니라
--결국 그 책에서 나는 야비성보다도 우둔성을 더 많이 발견했어--
아벨이, 너의 친구 아벨 보띠에가 이 책을 썼다는 사실이 면구스러웠어. 
'르 땅' 지의 평론가가 말한 그 
'위대한 소질'을 찾아보느라 한 장 한 장 넘겨 보았으나 헛수고였어. 
아벨의 이름이 곧잘 화제에 오르는 이곳 작은 르아브르에서는 
이 책에 대한 평판이 퍽 좋다는 것을 알았어. 
고칠 길 없는 이 경박을 정묘니 우아니 하고 부르는 것을 듣고 있어. 
물론 나는 조심을 하고 있지. 이 독후감도 단지 네게만 이야기하는 거야. 
처음에는 무척 슬퍼하던 보띠에 목사님도
이제는 그  책 속에 무슨 자랑거리라도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어. 
그 주위 사람들도 누구나 목사님께 그것을 믿게 하려고 애쓰고 있어. 
어제만 해도 쁠랑띠에 고모댁에서... 고모님이 갑자기,
"아드님이 그렇게 성공을 하셨으니 기쁘시겠습니다, 목사님."
하니까 목사님은 좀 당황해서 이렇게 대답하셨어.
"뭘요, 아직 그렇게까지는 생각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자
"하지만 꼭 그렇게 생각되실 걸요. 그렇게 생각되실 거예요."
하고 고모님이 말씀하시자, 물론 거기에 악의는 없었지만 
그 어조가 워낙 고무적이어서, 모두 웃기 시작했고 목사님도 웃으셨어.
볼바아르의 어느 극장에서 상연하려고 그가 준비하고 있다는 말도 들리는데 
벌써부터 신문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듯한
 '신아벨라아르'가 상연되면 무슨 꼴이 될까! 불쌍한 아벨! 
이제 바로 그가 원하고 또 만족할 성공일까!
어제 '마음의 위안'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어.
'참되고 영원한 영광을 진실로 바라는 자는 일시적인 영광에 
마음 속에서 경멸하지 않는 자는 스스로 성스러운 영광을 바라지 않는 자이니라'. 
그걸 읽고 나자 나는 이렇게 생각했어.
 "감사합니다, 하느님. 어떠한 지상의 영광과도 비길 수 없는 
이 성스러운 영광을 위해 제로옴을 선택해 주셔서".
몇 주, 몇 달이 단조로운 근무 속에서 흘러갔다. 
그러나 늘 추억이나 희망에만 마음을 썼기 때문에 세월이 느리다는 것, 
시간이 길다는 것을 별로 느끼지 못했었다.
삼촌과 알리싸는 6월에 해산할 줄리에뜨를 보러 님므로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좀 좋지 않은 소식이 와서 그들은 출발을 서두르게 됐다.
르아브르로 보낸 네 마지막 편지는 우리가 막 그곳을 떠난 뒤에 도착했어.
 8일이나 지나서야 이곳에서 받았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한 주일 내내 나는 뭔가 허전하고 무섭고 불안하고 위축된 속에서 지냈어. 
오오! 제로옴, 네가 있어야 난 참 된 나 자신일 수 있고 또 그 이상일 수 있어. 
줄리에뜨는 다시 건강해졌어. 오늘일까 내일일까 하고 해산을 기다리는 중이야. 
별 걱정은 없어. 오늘 아침 내가 네게 편지 쓴다는 걸 그 애도 알고 있어. 
우리가 애그비이브에 도착한 다음날,
"제로옴은 어떻게 됐어, 여전히 편지해?"하고 
그 애가 묻길래 속일 수 없고 해서 말을 해줬더니,
"이번에 편지할 땐 이렇게 말해 줘...."하고 
잠시 망설이다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면서,
"이젠 다 나았다고 말야."하고 말했어.
언제나 쾌활한 그 애의 편지를 받으면서 
나는 혹시 그 애가 짐짓 행복을 가장하고 있지나 않을까, 
또 자기 자신도 그러한 기분에 잠겨든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했었어. 
그런데 오늘에 와서 그 애가 행복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 애가 꿈꾸던 것, 
그 애의 행복을 좌우한다고 생각하던 것과는 너무나 달라졌어.
아! 사람들이 행복이라 부르는 것은 어쩌면 이다지도 영혼과 밀접한 것일까! 
행복을 외적으로 형성하는 듯한 요소는 어쩌면 그다지도 부질없는 것일까? 
벌판을 혼자 거닐면서 생각한 숱한 일들을 네게 알리고 싶지는 않아. 
단지 내가 그곳을 거닐며 놀란 것은 
이제는 나 자신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야. 
줄리에뜨가 행복한 것으로 만족해야 할 텐데... 
어째서 내 마음은 억제할 수 없는 알지 못할 우울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내가 느끼는, 적어도 내가 두 눈으로 바라보는 이 고장의 아름다운 풍경도 
그저 내게 알 수 없는 슬픔을 더해 줄 따름이야.
네가 이탈리아에서 내게 편지해 주던 무렵에는 
너를 통해 나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었어. 
그런데 이제 와서는 너와 함께 보지 않는 온갖 것은 
모두 내게 네게서 훔치고 있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결국 퐁궤즈마르나 르아브르에 있을 때는 
울적한 나날에 대비하느라고, 견디어 내는 힘을 나는 기르고 있었어. 
그런데 이곳에 와서는 그것이 아무 소용도 없어졌어. 
그리고 그것이 아무 쓸모가 없게 됐다고 느끼니 계속 불안한 상태야.
이 고장 사람들이나 이 고장 즐거움에도 기분이 상해. 
내가 없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지도 몰라. 
아무래도 전의 내 기쁨 속에는 어떤 오만심이 깃들어 있었던가 봐. 
왜냐하면 이 낯선 지방의 즐거운 분위기 속에 싸여서 
내가 느끼는 것은 일종의 굴욕감이니 말야.
이곳에 온 후에는 거의 기도도 드리지 못했어. 
이제 하느님께 선 옛날 그 자리엔 계시지 않으시리라는 어린애 같은 느낌이 들어. 
잘 있어. 총총히 펜을 놓아야 되겠어. 
이런 모독적인 말, 나의 나약한 마음, 슬픔이 부끄럽고,또 그것을 고백한다는 것이 
그리고 만일 우편 배달부가 오늘 저녁에 가져가지 않는다면 
찢어 버릴 것 같은 이런 이야기를 써 보낸다는 것이 모두 부끄럽기만 해.
그 뒤에 온 편지는 그녀가 대모가 될 조카딸의 출생, 
줄리에뜨와 삼촌의 기쁨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뿐, 
자신의 기쁨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러자 퐁궤즈마르에서 부친 편지들이 오기 시작했다. 
줄리에뜨도 7월에 그곳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