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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 앙드레 지드.28

Joyfule 2010. 3. 16. 08:55
 
좁은 문 - 앙드레 지드.28   

"알리싸가 정원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4월 말 퐁궤즈마르에 도착하자 
삼촌은 친아버지처럼 내게 키스를 하며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가 선뜻 뛰어나와 나를 맞아 주지 않아서 처음에는 서운했으나 
곧 그녀가 다시 만나게 된 첫 순간의 너절한 인사치레를 
우리가 생략할 수 있게 해 준 것이 고마왔다.
그녀는 정원 안쪽에 있었다. 
때마침 철을 만나 활짝 핀 라일락, 마가목, 금잔화, 웨즐리아 등의 꽃 덩굴로 
빽빽이 둘러싸인 그 둥그런 갈림길로 나는 천천히 걸어갔다. 
너무 멀리서부터 그녀를 보지 않도록, 
아니  내가 오는 것을 그녀가 보지 못하도록 
나는 정원 한쪽의 나뭇가지 밑으로 공기 서늘한 그늘진 오솔길을 따라갔다.
나는 천천히 걸었다. 
하늘도 나의 기쁨처럼 산뜻하게 빛나고 아련하게 맑았다. 
아마도 그녀는 내가 다른 쪽 길로 오리라 생각하고 기다렸던 모양이다. 
나는 그녀 가까이 등뒤에까지 갔다.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시간마저 나와 함께 멈춘 것 같았다 
이 순간이야말로 행복 그 자체보다 앞서 오고, 
또 행복 그 자체도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녀 앞에서 무릎을 끓고 싶었다. 
나는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러자 그녀도 이 발걸음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별안간 일어서더니 놓고 있던 그 수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잊어버린 채 
내게로 두 팔을 내밀어 내 어깨 위에 두 손을 얹었다. 
얼마동안을 우리는 그렇게 서 있었다. 
그녀는 두 팔을 내민 채 미소를 띠면서 
고개를 갸웃하고 말없이 다정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휜 옷차림이었다. 
나는 지나칠 정도로 경건한 그녀의 얼굴에서 앳된 그 미소를 다시 보았다....
"이것봐, 알리싸."
나는 갑자기 소리쳤다.
"나는 앞으로 열 이틀 동안 방학이야. 
하지만 네가 싫다면 단 하루도 더 머무르지 않을 테야. 
그러니 내일은 퐁궤즈마르를 떠나야 되리라는 걸 표시해 줄 무슨 신호를 결정하기로 해. 
그러면 다음날 아무런 비난이나 불평도 없이 떠날 테야. 알았지?"
미리 준비한 말이 아니어서 한결 수월하게 이야기할 수가 있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저녁 식사하러 내려갈 때 네가 좋아하는 그 자색 수정 십자가를 
내가 달고 있지 않은 저녁, 알겠어?"하고 말했다.
"그것이 나의 마지막 저녁이란 말이지?"
"하지만 눈물도 한숨도 없이 떠나야 해."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나겠어. 
그 마지막 저녁에도 그 전날 저녁과 다름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헤어질 테야. 
아직 알아차리질 못했나 하고 네가 생각할 정도로 말야. 
다음날 네가 찾을 때는 나는 이미 없을 거야."
그녀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입술로 가져오면서 나는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지금부터 그 마지막 밤까지는 어떤 눈치도 보이지 않기로 해."
이제는 이 재회의 엄숙한 분위기로 하여 자칫하면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어색한 느낌을 씻어 버릴 차례였다. 
나는 말을 계속했다.
"정말이지 네 곁에서 지낼 요 며칠이 우리들의 지난날과 꼭 같았으면 좋겠어... 
말하자면 우리도 이 며칠이 예외적인 것이라고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지. 
그리고 처음에는 너무 이야기하려고 애쓰지 않았다면...."
그녀는 웃기 시작했다. 나는 덧붙였다.
"우리가 함께 해볼 만한 일은 없을까?"
전부터 우리는 정원을 가꾸는 데 재미를 붙여 왔다. 
아직 익숙지 못한 정원사가 전에 있던 정원사의 뒤를 이어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아, 
두 달 동안이나 방치해 두었던 정원에는 할 일이 많았고 
장미나무에도 손길이 가지 않아 그 중 싱싱하게 자라나는 것들에는 
시든 가지가 잔뜩 뒤얽혀 있었다. 
새끼친 가지들이 다른 가지를 시들게 했다. 
이 장미나무는 대부분 우리 가 접붙여 놓은 것들이었다. 
우리가 손질한 그 장미들을 우리는 잘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것을 돌보느라고 처음 사흘동안은 힘든 이야기를 하지 않고도 
서로 이야기할 수 있었고 이야기를 주고받지 않을 때에도 
그 침묵이 힘겹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리하여 우리는 차츰 다시 서로 익숙해졌다. 
나는 어떤 설명보다도 이렇게 서로 익숙해져 간다는 데 더욱 기대를 걸었다. 
헤어져 있다는 기억마저 이미 우리 사이에서 사라졌고 내가 그녀에게 느끼던 두려움도, 
또 그녀가 내게서 두려워하던 마음의 긴장도 차츰 흐려져 가고 있었다. 
쓸쓸했던 나의 지난 가을 방문 때보다 한층 앳된 알리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워 보였다.
나는 아직도 그녀와 키스해 본 적이 없었다. 
저녁마다 나는 그녀 웃옷 위에서 조그마한 자색 수정 십자가가 
자그만 금줄에 달려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내 가슴 속에는 또다시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희망이라고? 아니, 그것은 차리리 확신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알리싸도 또한 느끼고 있으리라고 나는 짐작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자신을 거의 의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를 의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차츰 우리의 대화는 대담해져 갔다.
"알리싸."
아름다운 대기가 웃음을 머금고 우리의 가슴이 
꽃봉오리처럼 피어나던 어느 날 아침 나는 말했다.
"이제는 줄리에뜨도 행복하게 되었으니 우리도..."
나는 천천히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갑자기 그녀의 안색이 너무나 창백해져서 나는 말끝을 맺지 못했다.
그녀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을 시작했다.
"네 곁에서 나는 더할 수 없는 행복을 느끼고 있어... 
하지만 내 말을 들어 봐, 우리는 행복하려고 태어난 건 아냐."
"그렇다고 영혼이 행복 외에 무엇을 택한단 말이야?"하고 나는 성급히 소리쳤다. 
그녀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성스러운 것을...."
그 목소리가 너무도 낮았기 때문에 
나는 이 말을 들었다기보다는 그러한 말일 거라고 짐작했다.
내 모든 행복은 날개를 펴고 나를 버린 채 하늘로 날아가고 있었다.
"너 없이 나는 그렇게 될 수가 없어."
나는 그녀의 두 무릎에 이마를 파묻고 어린애처럼 울면서 말을 이었다.
"너 없이는 안 돼, 너 없이는 안 돼!"
그 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흘러갔다. 
그러나 그 저녁, 알리싸는 구 조그마한 자색 수정 십자가를 달지 않고 나타났다. 
이튿날 나는 약속한 대로 충분한 새벽녘에 떠났다.
그 다음 날 나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거기에는 세익스피어의 시 몇 줄이 인용구로 적혀 있었다.
그 곡을 다시 한번, 꺼질 둣 스러지는 곡이더라.
오오, 오랑캐꽃 핀 언덕 위를 스쳐 내 귀엔 들려 왔다--됐어 그만,
이젠 아까처럼 감미롭지 못해
그래! 아침 내내 나도 모르게 너를 찾았어. 
제로옴, 네가 떠났다는 것을 나는 믿을 수가 없었어.
네가 약속을 지켜 준 것이 원망스러웠어. 
나는 이것이 장난이려니 생각했어. 
덩굴마다 네가 나타날까 하고 보러 갔어. 
하지만 너는 정말 떠나 버렸어.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