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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 앙드레 지드.29

Joyfule 2010. 3. 17. 08:35
 
좁은 문 - 앙드레 지드.29   

그러고 나서는 온종일 네게 알려 주고 싶은 몇 가지 생각에 사로잡히고 
그리고 또 만일 그 생각들을 네게 알려주지 않는다면, 
네게 해주어야 할 일을 소홀히 했다는 느낌과, 
마땅히 네게 꾸중을 들을 만한 것이라고 장차 생각하게 되리라는 
이상하고도 또렷한 두려움에 사로잡혔어.
네가 퐁궤즈마르에 체류한 처음 몇 시간 에 곁에서 느낀 
내 온몸과 마음의 그 야릇한 충족감에 놀랐고 그것이 곧 불안해졌어.
'이 이상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을 정도의 충족감!'이라고 너는 내게 말했어. 
그런데 내가 불안해 하는 것은 바로 그거야.
내 의도를 잘못 이해할까 두려워. 제로옴, 
가장 강렬한 내 심정의 표현을 하나의 까다로운 이론의 전개
(오오! 얼마나 어설픈 이론일까)로 생각지나 않을 까 두려워.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행복이 아닐 거야.'라고 내게 한 말이 생각나? 
그때 나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어. 
하지만 아니야. 제로옴, 그것은 우리를 충족시켜 주지 않아. 
지난 가을 우리는 이러한 충족감 뒤에 어떤 슬픔이 깃들어 있는 가를 깨닫지 못했던가?
오오! 하느님, 
그러한 충족감이 진실된 것이 아니도록 해 주시옵소서! 
우리는 하나의 다른 행복을 위해서 태어났어.
전에 우리가 주고받은 편지가 가을의 재회를 슬프게 했듯이 
이제 네가 여기 있었다는 추억이 오늘 내가 쓰는 이 편지의 기쁨을 앗아가 버렸어. 
언제나 네 곁에서 지낼 때면 느꼈던 그 황홀감이 이제는 어디로 갔나? 
편지를 주고받고 서로 만나고 했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이 가질 수 있는 그 순수한 기쁨을 우리는 남김없이 고갈시켜 버렸어. 
그래서 나는 이제 나도 모르게 '십이야'에 나오는 오시노처럼 부르짖고 있어. 
'됐어 그만, 이젠 아까처럼 감미롭지 못해.'
잘 있어, 제로옴. 
'이로부터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시작되노라'. 
아아!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고 있는지를 너도 알까?
--영원한 너의 알리싸
덕이라 하는 함정 앞에서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온갖 영웅적인 기본이 나를 현혹하면서 나를 자꾸 이끌어가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러한 기분을 사랑과 분리해서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리싸의 편지는 나를 가장 무모한 열정으로도 도취 시켰다. 
내가 좀 더 덕을 쌓으려고 한 것도 단지 알리싸만을 위해서였다. 
어쩐 길도 위로 올라가는 길이라면 
그것은 나를 알리싸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 줄 것 같았다.
아아! 대지가 제 아무리 갑작스럽게 좁나진다 하더라도 
단지 우리 둘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라면 오히려 넓다고 생각될 것이었다. 
아아! 나는 아직도 그녀의 미묘한 가장을 간파하지 못했으며 
또 이변에도 이제 겨우 올라간 상상봉에서 그녀가 나를 두고 
다시 도망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긴 답장을 썼다. 
나는 그 중에서도 어느 정도 상황을 짐작케 할 수 있는 
단지 한 구절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나의 사랑은 내가 지니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 돼. 
내 모든 덕행이 거기에 딸려 있고, 
사랑이야말로 나를 나 이상의 위치로 끌어올려 주는 것같이 생각 돼. 
또 만일 사랑이 없다면 난 대부분 평범한 인간들이 차지하는
보통의 높이로 다시 떨어져내릴 수밖에 없을 것 같애. 
너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에 
가장 험준한 길도 내겐 언제나 좋은 길이라 생각돼.
이 편지에 나는 또 무슨 말을 덧붙였는지 그녀는 다음과 같은 회답을 보냈다.
하지만 제로옴, 
성스럽게 된다는 것은 하나의 선택이 아니라 의무야
(편지에는 이 의무란 단어 밑에 줄이 셋이나 그어져 있었다). 
만일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와 다름이 없는 사람이마면 
너도 역시 이것을 피하지는 못할 거야.
그것 뿐이었다. 
우리의 편지 왕래는 이것으로 끝났고 아무리 교묘한 충고나 굳건한 의지도 
어찌할 도리가 없으리라 하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기보다도 오히려 예감했다.
하지만 나는 또다시 애정에 넘치는 긴 편지를 썼다. 
세 번째 편지를 부친 뒤에 나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제로옴
내가 네게 편지를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생각지는 말아. 
다만 마음이 내키지 않을 뿐이야. 
네 편지는 여전히 나를 즐겁게 해주고 있지만 
이렇게까지 네가 나를 생각하도록 만든 데 대해서 나는 점점 더 나 자신을 꾸짖고 있어.
이젠 여름도 멀지 않았어. 당분간은 편지를 쓰지 않기로 하고,
 9월 하순의 두 주일을 퐁궤즈마르에 와서 함께 보내 줄, 수 없겠어? 
승낙한다면 답장은 필요 없어, 그것을 승낙의 표시로 알 테니까? 
회답이 없기를 바래.
나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 
이 침묵이야말로 그녀가 나에게 부과한 마지막 시련이었음에 틀림없다. 
몇 달 동안의 공부와 몇 주일의 여행을 마치고 
퐁궤즈마르에 왔을 때 나의 마음은 지극히 안정되어 있었다.
이 짧은 이야기로써 처음에는 나 자신도 이해 못했던 일을 
어떻게 독자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 후 나를 여지없이 절망 속으로 밀어넣은 
그 슬픈 사건 이 외에 무엇을 내가 여기에 적을 수 있을 것인가? 
지금에 와서는 그 가장 부자연스러워 보이던 가면 밑에서 
아직도 사랑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한 것을 통탄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그 가면밖에 보이지를 않아 옛날의 모습을 찾아볼 길이 없을 만큼 
그녀가 변한 것을 보고 비난하지는 않았어, 
알리싸. 
단지 지난 그녀가 변한 것을 보고 비난하지는 않았어 알리싸, 
단지 지난날의 너의 모습을 찾을 길이 없어 절망에 울었을 따름이야. 
너의 애정이 지니고 있었던 침묵의 술책이나 잔인한 기교 등에 의하여 
네가 품었던 사랑의 힘을 잴 수 있게 된 지금에 와서 
나는 너로부터 잔인하게 설움을 받으면서도 
그로 인해 더욱 너를 사랑해야 할 것인가? 
경멸? 냉정? 아니, 이겨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마주 서 싸울 아무런 대상도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가끔 주저했고 내 불행도 
내가 꾸며낸 것이 아닐까 의심해 보기도 했다. 
그처럼 내 불행의 원인은 미묘했고 그토록 알리싸는 모르는 척 했던 것이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한탄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 어느 때보다도 그녀는 애교 있게 나를 대해 주었다. 
그녀가 그토록 친절하고 상냥해 보이기도 처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거의 속아넘어갔다. 
전과 달리 납작하게 졸라맨 머리 매무새로 인해 표정까지 달라질 정도로 
그녀의 얼굴이 딱딱해 보였다는 것이 무슨 상관이었으랴!
거친 촉감을 주는 검은 색의 어울리지 않는 웃옷으로 말미암아 
그 아름다운 몸의 곡선이 손상되었기로 그것이 무슨 상관이었으랴. 
그것 스스로 혹은 내가 부탁한다면 그녀는 고치리라고 나는 어리석게도 생각했다. 
나는 그녀의 친절하고 상냥한 마음씨가 슬펐다. 
그러한 일은 우리 사이에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나는 
거기에서 충동보다는 오히려 결심을, 또 말하기는 거북하지만 
사람보다는 오히려 예의를 발견하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저녁 때 응접실에 들어서면서 나는 피아노가 없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내가 실망한 소리로 묻자,
"수선하러 보냈어."하고 아주 태연한 목소리로 알리싸가 대답했다.
"글쎄 몇 번이나 내가 말하지 않았니?"
삼촌은 거의 엄하다고 할 만한 꾸지람조로 말했다.
"기왕 고치러 보냈더라면 좋지 않았겠니. 
네가 서둘렀기 때문에 커다란 즐거움을 하나 잃었어...."
"하지만 아버지."
알리싸는 붉어진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요새는 빈소리만 나서 제로옴 역시 아무 곡도 치지 못했을 거예요."
"네가 치는 것을 들었을 땐 그렇게 고장난 것 같지는 않았는데."
하고 삼촌이 말했다.
그녀는 얼마 동안 그늘진 쪽으로 몸을 굽힌 채 
안락의자의 덮개 치수를 재는 데 몰두하는 듯 말이 없다가 이윽고 방에서 나가더니 
한참만에야 삼촌이 저녁마다 드는 탕약을 쟁반에 받쳐들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