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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 앙드레 지드.36

Joyfule 2010. 3. 25. 10:02
 
좁은 문 - 앙드레 지드.36   

오늘 아침 라 브리에르(17세기의 작가. '성격론'의 저자)가 쓴 책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때로는 금지되어 있기는 하지만 
너무도 소중한 쾌락과 정다운 유혹이 있어 
그것이 허용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자연스러울 때가 있다. 
이처럼 큰 매력은 덕행으로써 그것은 단념해 버릴 수 있다는 
그 매력으로써가 아니면 도저히 물리칠 수가 없는 것이다.'
어째서 나는 이 구절에서 변명을 찾아냈던가! 
사랑의 매력보다 더욱 세차고 
더욱 감미로운 매력이 나를 은근히 이끌고 있기 때문일까? 
오오! 사랑의 힘으로 우리들 두 사람의 영혼을 
동시에 사랑을 넘어선 저 건너까지 이끌어갈 수만 있다면!
아아! 이제는 너무나 잘 깨닫고 있다. 
하느님과 그의 사이에는 단지 나라는 장애물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그가 말하는 것처럼, 
처음에는 나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그의 마음이 하느님께로 향했다 하더라도 
이제는 그 사랑이 그를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로 하여 지체하고 나를 사랑하는 데만 치우친다.
나는 그가 덕을 향해 앞으로 나가는 것을 가로막는 우상이 되었다. 
우리 둘 중에 한 사람만이라도 거기에 도달해야 한다. 
주여, 비열한 저의 마음은 도저히 이 사랑을 극복할 수 없게 되었으니, 
주여, 제발 그가 저를 사랑하지 않도록 만들 힘을 제게 주시옵소서. 
그러하오면 저의 공덕보다 무한히 훌륭한 그의 공덕을 당신에게 바칠 것이오니... 
그리고 오늘 그를 읽어 제 영혼은 흐느끼고 있으나 
그것은 장차 당신의 품에 다시 그를 찾으려 함이 아니오니까?...
말씀해 주소서, 오, 하느님! 어느 영혼이 그의 영혼보다 더 타당하겠습니까? 
그는 저를 사랑한다는 것보다는 좀 더 훌륭한 것을 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옵니까? 
그러니 그로 인해 걸음을 멈추게 된다면 저는 그만큼 더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옵니까? 
영웅적일 수 있는 모든 것이 행복 속에서는 얼마나 위축되고 있습니까!..
일요일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히브리 서 11장 40절 참조)
5월 3일 월요일
행복이 바로 곁에 있어 손짓을 해준다면... 
손을 내밀기만 하면 잡을 수 있을 텐데... 
오늘 아침 그와 이야기하면서 나는 희생을 이겨냈다.
월요일 저녁
그가 내일 떠난다....
그리운 제로옴 나는 언제나 끝없이 애정으로써 너를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내 입으로 그런 말은 결코 못하게 될 거야. 
내가 내 눈과 입술과 영혼에 가하는 속박이 너무도 견디기 힘들어서 
너와 헤어진다는 것은 내게는 오히려 해방이기도 하고 쓰디쓴 만족이기도 하다.
나는 이성적인 행동을 하려고 노력하지만 막상 행동을 하게 되면 
나를 움직이게 하던 이성은 나를 저버리거니 혹은 그것이 어리숙해 보인다. 
그리고 나는 이미 그것을 믿지 않게 되는 것이다.
나로 하여금 그를 피하게 하는 이유? 이미 나는 그런 걸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이유도 모르는 채 서글프게도 그를 피하고 있는 것이다.
주여! 제로옴과 제가 손을 맞잡고 서로 의지하면서
당신에게로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평생을 통해 마치 두 사람의 순례자처럼 때때로 둘 중 한 사람이,
"피곤하면 내게 기대."하고 말하면 다른 한 사람이, 
"네가 곁에 있는 것을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해."라고 대답하면서 
당신을 향해 나아가도록 해주시옵소서.
아닙니다, 주여! 당신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둘이서 나란히 걸어가기에는 너무도 좁은 길입니다.
7월 4일 
6주일 이상이나 일기를 펼치지 않았다. 
지난달의 일기 몇 장을 다시 읽어 보면서 나는 애써 좋은 문장을 쓰려고 노력했던
 어리석고도 그릇된 나의 속마음을 글 속에서 대뜸 알아보았다. 
순전히 그의 탓이다.
그가 없이 살아 나갈 수 있기 위한 도움이나 될까 하고 
쓰기 시작한 일기 속에서도 마치 계속해서 그에게 편지라도 쓰는 것 같다.
문장이 잘 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모두 찢어 버렸다.
 "이러한 나의 마음의 나는 잘 알고 있다." 
그에 관한 부분은 전부 찢어 버렸어야 했을 것이다.
한 장도 남김 없이 모두 뜯어냈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자 벌써 나는 이 몇 장을 찢어 버렸다는데 어느 정도의 긍지를 느꼈다. 
내 마음이 이토록 병들지 않았다면 웃어넘겼을 긍지이다.
정말로 뜻있는 일을 한 것 같고 
그 버린 몇 장 속에 무슨 중요한 것이나 들어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7월 6일
나는 책장으로부터 그의 책들을 추방해 버려야만 했다.
책에서 책으로 나는 그를 피하지만 어디에서나 그를 만났다. 
나 혼자 펴보는 책장 속에서도 그 구절을 읽어 주던 
그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 온다. 
그가 흥미를 느끼는 것이 아니면 나도 별로 흥미가 없었다. 
나는 사고방식마저 그의 것을 취했기 때문에 
우리 둘의 생각이 같은 것이라고 느끼면서 기뻐할 수 있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그의 생각과 나의 생각을 구별 할 수가 없다. 
때로는 그의 문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악문을 쓰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에게 대항한다는 것은 역시 그에게 전념하는 것이다. 
얼마 동안은 성경만을 읽고(아마 '예수를 본받아'도 함께) 이 일기장에는 
읽은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 하나씩을 매일 적을 작정이다.
이 뒤에는 일종의 '나날의 양식'이 적혀 있고 
여기에 7월 1일부터 시작되는 하루하루의 날짜마다 
발췌구가 하나씩 덧붙여 있었다. 
여기에도 주석이 붙은 부분만을 옮겨 쓴다.
7월 20일
'네가 있는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
(누가 복음 18장 22절 참조). 
나는 제로옴만을 생각하고 있는 나의 마음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동시에 제로옴에게도 
그렇게 하기를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닐까? 
주여, 제게 그러한 용기를 주시옵소서.
7월 24일
나는 '마음의 위안'을 읽기를 중단했다.
그 옛 글은 퍽 재미가 있었지만 마음을 산만케 하는 무엇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맛본 거의 이교도적인 즐거움은 
내가 구하려던 교훈과는 전혀 방향이 다른 것이다.
'예수를 본받아'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것 역시 아무래도 이해가 안되는 라틴어 원본으로는 읽지 않기로 했다. 
내가 택한 번역본에 서명이 없는 것이 마음에 든다. 
신교파의 번역임에 틀림없는데 표제에는 
'모든 기독교 단체에 적합함'이라고 적혀 있다.
'오오! 그대가 덕을 향해 나갈 때 어떤 평안을 얻을 것이며 
어떤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주게 될 것인지 안다면 
그대는 더욱 정성들여 거기에 매진할 것이다.'
8월 10일
주여, 제가 당신을 향하여 어린 신앙심의 충동과 
천사들의 초인간적인 목소리로 외칠 때 이 모든 것은 
제로옴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서 오는 것임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나 당신과 저 사이에 그의 모습을 두심은 어찌된 연유이옵니까?
8월 14일
이 일을 완수하는 데는 앞으로 두 달...
오오, 주여! 저를 도와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