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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 앙드레 지드.34

Joyfule 2010. 3. 23. 09:26
 
좁은 문 - 앙드레 지드.34   

알리싸의 일기
에그비이브에서
그저께 르아브르 출발, 어제 님므에 도착, 
나의 첫 여행! 집안 일에서 벗어나 홀가분한 무위 속에서 오늘 188x년 5월 23일, 
스물 다섯 살이 되는 생일을 맞아 나는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이렇다 할 즐거움은 없이 그저 벗삼아 보려는 생각에서이다. 
왜냐하면 아마도 난생 처음으로 나는 홀로임을 느끼기 때문이다. 
낯선, 거의 타향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리고 아직 아무런 인연도 맺지 못한 고장에서. 
이 고장이 내게 속삭여 주는 것은 노르망디나 
또는 퐁궤즈마르에서 늘 듣던 것에 불과 하지만
--왜냐하면 하느님은 어디서나 다름이 없으시니까--
하지만 이 남부 지방은 내가 아직 들어보지 못한 언어를 쓰고 있다.
5월 24일
줄리에뜨는 내 옆의 소파에서 졸고 있다. 
정원과 통하는 모래 깔린 안마당과 같은 높이로 
이탈리아식으로 지어진 이 집에 매력을 주는 활짝 열린 갤러리 안이다. 
줄리에뜨는 소파에 앉은 채로 여러 가지 색깔의 집오리들이 뛰놀고 
두 마리의 백조가 헤엄치고 있는 연못까지 펼쳐져 있는 잔디밭을 바라보고 있다.
여름에도 마르는 일이 없다는 한 줄기 시냇물이 연못에 물을 채우고 
차츰 야생의 숲으로 변해가는 정원을 가로질러 메마른 벌판과 
포도밭 사이를 굽이치다가 멀리, 아주 멀리 살져 버리고 있다.
...어제, 에뜨와르 떼씨에르는 내가 줄리에뜨와 같이 있는 동안에 
아버지를 정원, 농장, 지하실, 창고, 그리고 포도밭으로 안내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야 일찍부터 처음으로 
공원의 이것저것을 살펴보며 산책할 수가 있었다.
이름 모를 수많은 초목들, 
나는 점심 때 그 이름을 알아보려고 하나하나 잔가지들을 꺾어 모았다. 
보르게에즈나 도리아 빵뺄리 별장에서 
제로옴이 찬미하던 샌느 베에르가 이 속에 끼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우리가 사는 북부 지방의 초목과 같은 종류이긴 하지만 그 모습은 전혀 다르다.
공원이 거의 끝나는 곳에서 이 초목들은 좁고도 신비로운 빈터를 둘러싼 채 
감촉이 보드라운 잔디 위에 늘어져 요정들의 합창을 권유하고 있다. 
퐁궤즈마르에서의 자연에 대한 나의 감정이 그처럼 기독교적이었던 데 반해 
이곳에서는 나도 모르게 신화적인 것으로 변해 가는 것이 놀랍고 두려울 지경이다. 
하지만 점점 나를 압박하던 일종의 그 두려움도 역시 종교적인 것이었다.
여기 있는 것은 성스러운 숲이다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공기는 수정처럼 맑고 이상한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나는 오르페우스와 아르미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갑자기 새의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는 바로 내 곁에서 들려 왔고 또 너무나 감동적이고 맑았기 때문에 
불현듯 자연 전체가 그 노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 
나는 잠시 나무에 기대 서 있다가 아직 아무도 일어나기 전에 다시 돌아왔다.
5월 25일
제로옴에게서는 여전히 편지가 없다. 
르아브르로 편지를 했으면 이리로 다시 발송되었을 텐데...
나의 불안도 단지 이 일기에 고백할 수 있을 따름이다. 
어제는 보오까지 산책을 하고 
사흘 전부터는 기도를 드리고 있지만 이 불안은 가실 길이 없다. 
오늘 다른 것은 쓰지 못하겠다.
에그비이브에 온 이래로 내가 느끼고 있는 
이 이상한 우울은 무슨 까닭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우울을 너무도 가슴 깊이 느끼고 있기 때문에 
벌써 오래 전부터 그곳에 뿌리박고 있었던 것 같고, 
나 자신 자랑스럽게 여겨 왔던 기쁨마저도 
실은 이 우울을 감싸고 있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5월 27일
나 자신을 속일 필요가 어디 있을까? 
내가 줄리에뜨의 행복을 기뻐하는 것은 다분히 이론적인 것이다. 
내가 그처럼 바라던 그 애의 행복, 
내 행복까지도 희생해 주려던 그 행복과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 
나는 거기에 마음 괴로워하고 있다. 
얼마나 복잡한가! 
그래...그 애가 내 희생을 필요로 하지 않고 행복을 찾았다는 것, 
내 희생 없이도 애는 행복해질 수 있었다는 데 대해 
내 마음 속에 되돌아온 무서운 이기주의가 분개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제로옴의 침묵이 얼마나 나를 불안케 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고 
스스로의 희생이 정말 내 가슴 속에서 이루어졌던 것일까? 하고 나는 물어 본다. 
하느님께서 내게 그러한 희생을 요구하시지 않는 데 대해 나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나는 그러한 능력이 없었던 것일까?
5월 28일
이렇게 내 슬픔을 분석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나는 벌써 이 일기장에 집착해 있다. 
이미 내 마음 속에서 제거되었다고 생각했던 간사한 마음이 
여기서 다시 나래를 펴는 것일까? 아니다. 
이 일기는 내 영혼이 그 앞에서 단장을 하는, 
만족을 주는 거울이 되어서는 안된다! 
내가 이 일기를 쓰는 것은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심심풀이로서가 아니다. 
슬픔 때문인 것이다. 
슬픔이란 내가 오랫동안 모르고 지낸 온, 
이제는 증오하며 영혼으로부터 떨쳐 버리고 싶은 죄의 상태이다. 
이 일기는 내 마음 속에 다시 행복이 깃들도록 나를 도와야 한다.
슬픔이란 하나의 착잡이다. 
나는 한 번도 나의 행복을 분석해 보려고 해보지 않았다.
퐁궤즈마르에서도 나는 정말 홀로였다. 
여기서보다도 더 홀로였다. 
그런데 어째서 그것이 느껴지지 않을까? 
제로옴이 이탈리아에서 편지를 하였을 때, 나 없이 모든 것을 바로 본다는 것, 
나 없이 그가 산다는 것을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고, 
마음으로 그를 따랐고, 그의 즐거움이 나의 즐거움이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지금 나는 나도 모르게 부르고 있다. 
내가 보는 모든 새로운 것도 그가 없이는 마음을 괴롭힐 뿐이다.
6월 10일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이 일기는 오랫동안 중단됐다. 
귀여운 리즈의 출생, 줄리에뜨를 간호하면서 지샌 긴 밤들, 
제로옴에게 쓸 수 있을 모든 것을 여기에 적는다는 것은 아무런 흥미도 없다.
나는 허다한 여성들에게 공통적인 
'너무 쓴다'라는 견딜 수 없는 결정을 피하고 싶다. 
이 일기를 자기 완성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삼고 싶다.
그 뒤에는 책을 읽다가 적어 둔 메모라든가 책에서 베낀 구절 등이었다. 
그리고서는 또 다시 퐁궤즈마르에서의 날짜로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