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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 앙드레 지드.37

Joyfule 2010. 3. 26. 08:24
 
좁은 문 - 앙드레 지드.37   

8월 20일
아직도 내 마음 속에서 희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나도 느끼고 있다.
내 슬픔으로 미루어 나는 그것을 느끼고 있다. 
주여, 이 기쁨, 지금까지는 오직 그만이 내게 가르쳐 주던 
이 기쁨을 당신만이 제게 주시옵소서.
8월 28일
나는 얼마나 속되고 서글픈 덕에 이르렀나! 
스스로 나 자신에 대해 지나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일까?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하자.
언제나 하느님께, 힘을 주시옵소서 하고 탄원을 하다니, 
얼마나 비겁한 일인가! 이제 내 기도는 온통 하소연 뿐이다.
8월 29일
'들에 핀 백합을 보라...'"[누가 복음]12장 27절"
이 간단한 말씀이 오늘 아침 풀길 없는 슬픔에 나를 잠기게 했다. 
들로 나와 나도 모르게 되풀이 한 이 말이 내 마음과 눈을 눈물로 가득 채웠다. 
나는 농부가 몸을 굽혀 쟁기질을 하고 있는 끝없는 들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들에 핀 백합을...'하지만 주여, 그 백합은 어디에 있사옵니까?
9월 16일 밤 10시
다시 그를 만났다. 나와 같은 지붕 밑에 있는 것이다. 
그의 창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잔디밭을 비추고 있다. 
내가 이 몇 줄을 적고 있는 이 순간에도 그는 잠들지 않고 있다. 
아마도 나를 생각하고 있겠지. 그는 변하지 않았다. 
그도 그렇게 말하고 나도 그렇게 느낀다. 
그의 사랑이 나를 용납하지 않도록 
내가 결심한 그대로의 나를 그에게 보일 수 있을까?
9월 24일
오오! 속마음은 꺼질 듯하면서도 끝내 무관심과 냉담을 가장 했던 잔인한 대화... 
지금까지는 그를 피한다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 나는 하느님께서 내게 이겨낼 힘을 주시리라 생각했고 
싸움을 피하는 것은 비겁한 것이리라고도 생각했다. 
나는 과연 승리를 했던가?
제로옴은 전보다 나를 덜 사랑하게 되었는가? 
아아! 이것은 내가 바라면서도 동시에 두려워하는 것이다. 
지금보다 더 그를 사랑해 본 적은 없다.
그리고 주여,
제게서 그를 구해내시기 위해 저의 희생이 필요 하시다면 뜻대로 하시옵소서! 
'저의 마음과 영혼 안에 들어오셔서 저의 고난을 짊어지시고
 당신의 수난에서 아직 남아 있는 고통을 저의 속에서 계속하여 감당하옵소서.'
우리는 빠스깔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나는 그에게 무엇이라 말할 수 있었던가? 
그 무슨 부끄럽고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했던 가! 
그런 말을 하면서도 괴로웠지만 
오늘밤은 그런 말이 하느님에 대한 모독인 것처럼 뉘우쳐진다. 
묵직한 '빵세'를 다시 뽑아들었다. 저절로 펴진 것이 
로안네즈 양(로안네즈 공작의 누이로 빠스깔의 애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적은 곳이다.
'자진해서 남을 따라갈 때는 속박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항거하기 시작하고 홀로 떨어져 걷기 시작하면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이 너무나 내 가슴을 찔렀기 때문에 더 읽어 나갈 기력이 없어졌다.
그러나 이 책의 다른 곳을 펼치면서 
나는 아직까지 읽어보지 못한 훌륭한 구절을 발견했다. 
그래서 이제 막 베꼈다.
일기의 첫 부분은 여기에서 끝나고 있었다. 
그 다음 부분은 아마 찢어 버린 모양이다. 
왜냐하면 알리싸가 남긴 서류에는 그로부터 3년 뒤 
다시 퐁궤즈마르에서--9월에--즉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나기 조금 전부터, 
이 일기가 다시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일기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되고 있다.
9월 17일
주여, 제가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당신은 잘 아시옵니다.
9월 20일
주여, 그를 제게 주옵소서. 그러면 이 마음을 당신에게 바치오리다.
주여, 한 번만 더 그를 만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이 마음을 당신에게 드리기로 약속하옵니다. 
그러하오니 저의 사랑이 당신에게 청하는 것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의 남은 목숨은 당신에게 바치겠나이다.
주여, 저의 이 천박한 기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저는 제 입술에서 그의 이름을 떼지도 못하겠고 
제 마음의 고통을 잊지도 못하겠나이다.
주여, 당신께 외치옵니다. 
슬픔에 잠겨 있는 저를 버리지 마시옵소서.
9월 21일
'너희가 나의 이름으로 나의 아버지께 구하는 모든 것은'
(요한 복음 14장 13절 참조) 
주여, 당신의 이름으로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러하오나 비록 제가 기도를 드리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당신은 이 마음에서 타오르는 소원을 알아 주실 줄 아옵니다.
9월 27일
오늘 아침부터는 마음이 퍽 안정되어 있다. 
어젯밤은 묵상과 기도로 거의 지새웠다. 
그런데 문득 어린 시절에 성령에 대해서 그려 보던 상상과 비슷한 광채가, 
찬란한 마음의 평안이 나를 둘러싸고 나에게 내려오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이 기쁨이 신경의 흥분이나 아닐까 두려워 얼른 잠자리에 들어갔다. 
이 크나큰 행복감이 사라지기 전에 나는 곧 잠이 들었다. 
오늘 아침에도 이 행복감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제는 그가 올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9월 30일
제로옴! 나의 벗, 
아직 동생이라고 부르지만 동생보다 한없이 더 사랑하는 너... 
그 너도밤나무 숲에서 내가 얼마나 너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는지...
저녁 때마다 해가 질 무렵이면 나는 
채소 밭의 작은 문을 나서서 이미 어둠이 깃든 가로수 길로 내려갔어.
갑자기 너의 대답 소리가 들리고 그리하여 
돌이 많은 언덕 위에서 재빨리 지나치는 너의 모습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또는 벤치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너의 그림자가 
멀리서 보이다 할지라도 내 가슴은 놀라 뛰지 않을 거야. 
오히려 네 모습이 보이지 않는 데 놀랄 거야.
10월 1일
아직도 아무 소식이 없다. 
태양은 비할 데 없이 맑은 하늘에서 졌다. 
나는 기다리고 있다. 
나는 곧 이 벤치에 그와 함께 나란히 앉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벌써 그의 음성이 들린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는 것이 좋다. 
바로 여기에 그는 올 것이다. 
나는 그의 손 안에 내 손을 놓으리라. 
그리고 나의 이마를 그의 어깨 위에 얹으리라. 
나는 그의 곁에서 호흡을 하게 될 것이다.
어제도 다시 읽어 보려고 그가 보낸 편지를 몇 장 가지고 나왔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너무나 그의 생각으로 가득 차서 편지를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그가 좋아하던 그 자색 수정 십자가, 
지나간 어느 여름, 그가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동안
 저녁마다 내가 목에 걸었던 그 십자가도 몸에 지니고 나왔었다. 
아 십자가를 그에게 주고 싶다. 
이미 오래 전부터 나는 이런 생각을 꿈꾸고 있었다. 
그가 결혼을 하면 나는 그의 첫딸인 
작은 알리싸의 대모가 되어 이 보석을 주고... 
왜 나는 이런 말을 하지 못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