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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밀리 어페어5 - 무라카미 하루키.

Joyfule 2011. 1. 11. 11:26

 패밀리 어페어5 - 무라카미 하루키. 

"오늘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하고 
그는 나에게 인사 치레를 했다.
"뭐 별로, 당연한 일이니까"하고 나는 점잖게 말했다. 
나에게는 더 이상 농담을 할 만한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동생을 통해 형님 이야기는 늘 들었습니다."하고 그가 말했다.
'형님?'
나는 커피 스푼의 손잡이로 귓볼을 긁고 나서 그것을 도로 접시에 놓았다. 
여동생은 또 나의 발끝을 걷어찼지만, 
컴퓨터 엔지니어 쪽은 그 동작의 의미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마 '이진법'의 농담이란 것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나 보다. 
"아주 사이가 좋아 보여서 저는 정말 부럽습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기쁜 일이 있으면 서로 발 걷어차기를 한다네."하고 나는 말했다.
컴퓨터 엔지니어는 도대체 무슨 말인가 생각하는 어정쩡한 얼굴을 했다.
"농담을 한 거예요. 그러길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하고 여동생이 정나미 떨어졌다는 듯이 말했다.
"농담일세. 가사를 분담하고 있지. 
동생은 빨래를 하고 나는 농담을 하고"하며 나도 말했다.
컴퓨터 엔지니어-와타나베 노보루가 정확한 이름이다-는 
그 말을 듣고 다소 안심했다는 듯이 웃었다.
"명랑해서 좋지 않습니까. 
저도 그런 가정을 갖고 싶군요. 밝은 것이 첫째입니다."
"보라구, 밝은 것이 첫째잖아. 네 신경질은 너무 지나쳐."
하고 나는 여동생에게 말했다.
"재미난 농담이라구요."하고 여동생이 말했다.
"되도록이면 가을에는 결혼하고 싶습니다."하고 와타나베 노보루가 말했다.
"결혼식이야 역시 가을이 좋겠지. 그러면 다람쥐도 곰도 부를 수 있을테고."
컴퓨터 엔지니어는 웃었고 여동생은 웃지 않았다. 
동생은 정말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볼일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파트에 돌아온 후 나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대충의 상황을 설명했다.
"별로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요."하고 나는 귀를 긁적거리면서 말했다.
"별로 나쁘지 않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제대로 됐다는 말이죠, 적어도 저보다는 나아 보였어요."
"네가 뭐 어디가 어때서?"
"좋아라, 고마워요."하고 나는 천장을 보면서 말했다.
"그래, 대학은 어느 대학?"
"대학?"
"어느 대학을 나왔대, 그 사람?"
"그런 거야 본인한테 물어 보시죠."하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한심한 기분으로 혼자서 마셨다.
스파게티 건으로 해서 여동생과 말다툼을 한 그 다음날,
 나는 오전 8시 반에 잠에서 깼다. 
전날이나 다름없이 구름 한 점 없는 좋은 날씨였다. 
꼭 어제 같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밤 동안 일시 중단하고 있던 인생이 다시 계속 이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땀으로 축축해진 파자마와 속옷을 세탁물 바구니 속에 던져 넣고, 
샤워를 하고 수염을 깎았다. 
그리고 수염을 깎으면서, 결정적인 순간에서 
재미 보기에 실패하고 만 어제 저녁 여자아이에 대해 생각했다.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은 불가항력이었고,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다. 기회는 또 얼마든지 있다. 아마 다음 일요일에는 잘 되겠지.
나는 주방에서 토스트 두 개를 굽고 커피를 끓였다. 
그리고 나서 FM방송을 들으려 했지만, 오디오가 고장이란 생각이 떠올라 단념하고, 
신문의 독서란을 읽으면서 빵을 먹었다.
독서란에는 흥미를 끌 만한 종류의 책은 한 권도 소개되어 있지 않았다. 
거기 있는 것은 늙은 유태인의 공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성생활에 대한 소설이라든가, 
분열증 치료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라든가, 
아시오 총독 사건의 전모라든가 그런 것들뿐이었다.
그 따위 책을 읽을 거라면 차라리 
여자 소프트볼 부의 주장과 자는 편이 훨씬 즐거울 것이다. 
신문사는 분명 우리의 비위를 거슬리게 하려고 이런 책을 선정했나 보다.
바삭바삭하게 구운 빵을 한 개 먹고, 신문을 식탁 위에다 도로 놓으려는데 
잼 병 밑에 메모 용지가 끼워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여동생이 평소나 다름없는 작은 글씨로 
이번 일요일 저녁 식사에 와타나베 노보루를 초청했으니, 
나도 꼭 집에 있다가 식사를 함께 하자고 적어 놓은 것이었다.
나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셔츠 위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털고, 
그릇을 싱크대의 설거지통에 처넣고 나서, 
여동생이 근무하고 있는 여행사에다 전화를 걸었다. 
여동생이 나와 '지금 바빠서 틈이 없으니, 10분 후에 내가 다시 걸게요.'라고 했다.
전화는 20분 후에 걸려 왔다. 
그 20분 동안 나는 43회나 팔굽혀펴기를 하고, 
손발을 합쳐서 20개의 손톱과 발톱을 깎고, 
셔츠와 넥타이, 웃옷, 그리고 바지를 골라 놓았다. 
그리고 이를 닦고, 빗질을 하고, 하품을 두 번했다.
"메모 읽어 봤어요?"하고 여동생이 물었다.
"읽었어. 그런데 안 됐지만 이번 일요일에는 선약이 있어서 안되겠어. 
좀더 빨리 알았다면 비워놓을 수도 있었는데, 정말 유감천만이다."
"뻔뻔스런 소리 좀 작작하라구요. 
어차피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여자아이하고, 
어디론가 가서 무슨 짓을 하려는 그런 약속일 테지 뭐. 
그거 토요일로 돌리면 안돼요?"하고 여동생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토요일에는 하루 종일 스튜디오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구.
 전기 담요 CF를 만들어야 하거든. 요즘 좀 바빠서."
"그럼 그 데이트 취소해요."
"반환 요금을 빼앗기는 걸. 지금 비교적 미묘한 단계야."
"내 일은 미묘하지 않아요?"
"그런 건 아니지만 말이야."하고 
나는 의자에 걸어 놓은 셔츠에 넥타이를 맞추면서 말했다.
"서로의 생활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게 규칙 아니었어? 
너는 네 약혼자하고 밥을 먹고... 나는 내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고. 그럼 됐잖아."
"된 게 아니라니까요. 오빠는 줄곧 그를 안 만났잖아요? 
여태까지 한 번밖에 만나지 않았어요. 그것도 4개월 전의 일이에요.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몇 번이나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도, 오빠는 줄창 도망만 다녔잖아요. 
굉장한 실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빠 여동생의 약혼자라구요. 
한 번쯤 함께 식사 좀 하는 것이 뭐가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