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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밀리 어페어3 - 무라카미 하루키.

Joyfule 2011. 1. 8. 11:48

 패밀리 어페어3 - 무라카미 하루키. 

내가 여동생과 함께 살게 된 건 5년전 봄이었다. 
그 당시 나는 스물 두 살이었고, 여동생은 열여덟 살이었다. 
즉, 내가 대학을 나와 취업을 하고, 
그녀가 고등학교를 마치면 대학에 들어간 해다.
부모님은 나와 함께 산다는 조건하에 
여동생이 도쿄의 대학에 다니는 것을 허락했던 것이다. 
동생은 그래도 괜찮다고 했다. 나도 좋다고 했다.
부모님은 우리를 위해 제법 그럴싸한 방이 두 개 있는 넓은 아파트를 세 내 주었다. 
집세의 절반은 내가 부담하기로 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나와 여동생은 사이가 좋았으며, 
둘이서 산다는 것에 나는 거의 불편을 느끼지 않았었다.
나는 전자 제품 회사의 광고부에 근무하고 있었던 탓으로, 
아침엔 비교적 일찍 출근했으며, 밤에는 늦게 돌아오곤 했다. 
여동생은 아침 일찍 학교에 가고, 대개 저녁에 돌아왔다.
그래서 내가 눈을 떴을 때 동생은 이미 없었고, 
내가 돌아왔을 때엔 동생은 벌써 잠이 들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뿐더러 나는 거의 대부분의 토요일과 일요일에 데이트를 했으므로, 
동생과 제대로 말을 주고받는 건, 일주일에 한 두 번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국 그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우리는 싸울 틈조차 없었으며, 서로의 사생활에 대해 간섭하지도 않았다.
동생에게도 아마 여러 가지 일들이 있겠지 싶었지만, 
나는 거기에 대해서 일절 참견하지 않았다. 
열여덟 살이 넘은 여자아이가 누구하고 자건 말건 그런 건 내가 알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꼭 한 번, 한밤중 1시부터 3시까지 동생의 손을 잡아 준 적이 있다. 
내가 직장에서 돌아와 보니, 부엌 식탁에서 동생이 울고 있었다. 
식탁에서 울고 있다는 건 필시 나더러 뭔가 알아 달라는 뜻이 아닐까 하고 짐작했다. 
왜냐하면 간섭하는 게 싫었다면 자기 방 침대에서 울면 그뿐인 것이다. 
나는 편협하고 고집스런 인간일지 모르지만 그 정도는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옆에 앉아 여동생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여동생 손을 잡아 본 건, 국민학교 때 잠자리 잡으러 갔을 때 말고는 처음이었다. 
여동생의 손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그야 당연한 일이겠지만-훨씬 크고 따뜻했다.
동생은 아무 말도 없이 그렇게 2시간이나 울었다. 
어쩌면 그렇게 많은 눈물이 몸속에 들어 있나 싶어 나는 감탄했다. 
나 같으면 단 2분만 울어도 몸이 바삭바삭 말라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3식 되자 아닌게 아니라 나도 피곤해져서 그럭저럭 끝맺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쯤에서 오빠로서 뭔가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건 질색이지만 하는 수 없지. 그래서 나는 말했다.
"나는 너의 생활에 일절 간섭하고 싶지 않아. 
네 인생이니까 좋을 대로 살면 돼."
여동생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하지만 한마디만 충고하고 싶은데, 
백 속에다 콘돔을 넣고 다니는 일만은 그만 두는 게 좋겠어, 
매춘부로 착각하기 쉬우니까."
그 말을 듣자 동생은 식탁 위의 전하번호부를 집어들어, 나에게로 힘껏 내던졌다.
"왜 남의 백 속을 뒤지는 거야!'하고 동생은 소리쳤다. 
동생은 화를 낼 때면 으레 뭐든지 내던지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동생의 백 속을 뒤진 적은 한 번도 없다는 식의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떻든 간에 그것을 계기로 동생은 울음을 그쳤고, 
나는 내 침대 속으로 쑤시고 들어갈 수가 있었다.
여동생이 대학을 졸업하고 여행사에 근무하게 되고 나서도, 
우리의 그러한 생활 방식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동생의 회사는 9시부터 5시까지 규칙적으로 근무하는 곳이었고, 
내 쪽의 생활은 갈수록 게을러졌다.
점심 전에 출근하여, 데스크에서 신문을 읽고,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 2시경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해서 광고 대행사와 약속을 해놓고, 
술을 마시고 한밤중에 귀가하는 일과가 계속되었다.
여행사에 근무하던 첫해의 여름 휴가 때, 
동생은 여자 친구와 둘이서 아메리카의 서해안에 갔다가-물론 할인요금이었다-
그 여행단에서 만나게 된 한 살 위의 컴퓨터 엔지니어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에 돌아와서도 툭하면 그와 데이트를 했다.
글쎄, 흔히 있는 일이긴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은 딱 질색이었다. 
우선 단체 여행이라는 것이 맘에 안 들었고, 
그런 곳에서 누구를 만나 사귀다니 생각만 해도 역겨워졌다.
그런데 그 컴퓨터 엔지니어와 교제를 시작하고 나서부터 
동생은 이전보다도 훨씬 더 명랑해진 것 같았다. 
집안 일도 차분하게 처리하게 되었고, 옷에도 신경을 쓰게끔 되었다. 
그때까지 동생은 워크셔츠와 색바랜 블루진과 
운동화를 신은 모양새로 어디나 갈 수 있는 여자였다. 
옷차림에 집착하기 시작한 덕분에 신발장은 온통 동생의 구두로 들어찼고, 
집안은 세탁소의 철사 옷걸이 투성이였다.
동생은 열심히 빨래-그때까지는 욕실에 
아마존 개미둑 모양으로 더러워진 것들을 쌓아 놓고 있었다-를 했고, 
열심히 다림질을 했으며, 열심히 요리를 만들었고, 열심히 청소를 하게 되었다.
나도 약간의 체험은 있었지만, 그런 것은 위험한 징후였다. 
여자아이가 그런 징후를 보이기 시작하면 
남자는 줄행랑을 놓든지 아니면 결혼하는 길밖에 없다.
그리고 여동생은 나에게 그 컴퓨터 엔지니어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여동생이 나에게 그 사진을 보여 준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위험한 징후였다.
사진은 두 장인데, 한 장은 샌프란시스코의 낚시 전시회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청다랑어 앞에 여동생과 그 컴퓨터 엔지니어가 나란히 서서 생긋이 웃고 있었다.
"청다랑어가 멋있는데."하고 나는 말했다.
"농담 좀 작작해요, 난 진지하다구요."
"무슨 말을 했으면 좋겠니?"
"아무 말 안해도 좋아요, 그런 사람이에요."
나는 다시 한 번 그 사진을 손에 들고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이 세상에서 첫눈에 역겨워지는 얼굴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런 얼굴이었다. 
한 술 더떠서 그 컴퓨터 엔지니어는 
내가 고교 시절에 가장 싫어하던 클럽 선배와 분위기가 비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