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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렉싱턴의 유령 2

Joyfule 2010. 5. 7. 09:33
 
  [하루키] 렉싱턴의 유령 2 
  
알고 지낸지 반년 정도 지났을 때의 일이다. 
그로부터 집을 좀 보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런일은 흔치 않은 일인데 일 때문에 일주일 정도 런던에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케이시가 여행을 떠날 때에는 항상 
제레미가 빈 집을 지켰는데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웨스트 버지니아에 살고 있는 제레미의 어머니가 건강이 좋지 않아 
그가 얼마 전부터 그쪽에 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케이시는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안하지만, 자네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군"이라고 케이시는 말했다. 
"마일스(개의 이름이다)한테 하루에 두 번 먹이만 주면 그 외에는 
딱히 특별한 것은 없으니까 크게 힘들지는 않을 걸세. 
레코드도 마음껏 들을 수 있고, 술도 식료품도 충분히 준비해두었으니까, 
자네 편할 대로 그냥 지내주기만 하면 되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나는 그때 사정이 있어서 
일시적이나마 혼자 생활 하고 있었고, 
빌려 살고 있는 케임브리지의 아파트 옆집이 마침 
개축 공사를 시작하여 매일 시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갈아입을 옷과 매킨토시 파워 북과 
책을 몇권 가지고 금요일 오후 케이시의 집으로 갔다. 
케이시는 짐을 다 꾸리고 택시를 부르려는 참이었다. 
나는, 런던을 즐기고 오라고 말했다. 
"아아, 물론"이라고 케이시는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도 내 집과 레코드를 즐겨 주게나. 나쁘지 않은 집이니까." 
케이시가 떠나고 난 후 나는 부엌으로 들어가 커피를 끓여 마셨다. 
그리고 거실 옆 음악실 테이블에 컴퓨터를 설치하고 
케이시의 아버지가 남긴 레코드를 들으면서 한 시간 정도 일을 하였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시험해본 것이다. 
책상은 양쪽에 서랍이 달린 고풍스런 마호가니 제품이었다. 
묵직하고 상당히 오래돼 보였다. 
하기야 그 방에 놓여 있는것 중에서 비교적 
오래되지 않은 것 이라고는 내가 들고 온 매킨토시 정도일 것이다. 
눈에 띄는 사물이 하나같이 기억도 하지 못할 만큼 먼 옛날부터 
지금과 똑같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케이시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 음악실에는
 - 마치 신전이나 성 유물 안치소처럼- 
전혀 손을 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간의 흐름이 정체될 듯한 집인데, 
특히 이 음악실 안에서는 얼마전부터 
시계가 그 움직임을 뚝 멈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손질은 잘 되어 있었다. 
책꽂이에는 먼지 하나 없고 책상은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마일스가 다가와 내 발치에 벌렁 누웠다. 
나는 그의 머리를 몇 번인가 쓰다 듬어 주었다. 
외로움을 몹시 잘 타는 개였다. 오랜 시간 혼자 있지 못한다. 
잘 때 만은 부엌옆에 있는 자기 자리에서 자도록 습관이 들어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누군가의 옆에서 
몸의 어느 한 부분을 상대방에게 슬며시 대고있다. 
거실과 음악실은 문이 없는 높은 문틀로 나뉘어 있다. 
거실에는 벽돌로 쌓은 거대한 벽난로가 있고, 
푹신한 3인용 가죽소파가 놓여있다. 
하나 하나 모양이 다른 암체어가 네 개, 
역시 모양이 다른 커피 테이블이 세 개. 
바 닥에는 품위있게 퇴색한 페르시아 카펫이 깔려 있고 
높은 천장에는 무슨 사연이라도 있을 법한 
고풍스런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다.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빙그르르 사방을 돌아보았다. 
벽난로 위의 탁상 시계가 토닥토닥 손톱으로 창문 이라도 두드리는듯한
소리를 내며 때를 새기고 있었다. 
벽 쪽의 높은 책꽂이에는 미술 서적과 각종 전문 서적이 꽂혀 있었다. 
나머지 세 벽에는 어딘가의 해변을 그린 
크고 작은 유화가 뒤섞여 걸려 있었다. 
그림은 대개 비슷한 인상을 풍겼다. 
그림에는 사람의 모습은 전혀 없고
그저 쓸쓸한 해변 풍경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귀를 갖다대면 서늘한 바람소리와 거 친 파도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았다. 
화려하고 눈에 띄는것은 무엇 하나 없었다. 거기에 놓여 있는 모든 것에서 
그야말로 뉴 잉글랜드풍의 절도 있고 
그러나 지나치게 소탈한 올드 머니의 냄새가 났다. 
음악실의 넓은 벽 한 면이 온통 레코드 선반이었다. 
오래된 LP레코드가 연주가의 이름에 따라 
알파벳 순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케이시도 그 정확한 숫자를 몰랐다. 
그는 6천 장이나 7천 장쯤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선반에 진열되어 있는 것에 버금가는 숫자의 레코드가 
카툰 박스에 담겨 다락방에 방치 되어 있었다. 
"머지않아 이 집도 옛날 레코드 무게 때문에 어셔가처럼 
뿌지직 뿌지직 땅속으로 가라앉을지 모르겠네." 
리 코니츠의 오래된 10인치 판을 턴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 
책상을 향하여 문장을 쓰고 있자니, 
시간은 내 주위를 기분좋고 평화롭게 지나갔다. 
마치 사이즈가 딱 맞는 주형에 자신을 끼워맞춘 듯한 기분이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정성껏 가꾸어진 특별한 친밀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방의 온 구석구석, 벽에 난 조그만 돌기와 커튼 주름에까지 
음악의 울림이 푸근하게 배어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케이시가 준비해둔 몽테플치아노 적포도주의 마개를 열었다. 
그리고 크리스털 포도주 잔에 따라 몇 잔을 마시고 거실 소파에 앉아 
오는 길에 산 신간 소설을 읽었다. 
케이시가 자신있게 권한 만큼이나 맛있는 포도주였다. 
냉장고에서 브리에 치즈를 꺼내 크래커와 함께 4분의 1쯤 먹었다. 
그러는 동안 사방은 잠잠했다. 
예의 토닥토닥하는 시계 소리를 제외하면 
때로 집 앞을 지나가는 차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그래봐야 집 앞 도로는 아무데로도 통하지 않는 '드라이브 웨이'였다. 
오가는 차량은 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차고 한정되어 있다. 
밤이 깊어지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동네에 학생들이 많아 시끌 벅적한 케임브리지의 아파트에 비하면 
어째 바닷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시계가 열한 시를 가리키자 슬슬 잠이 왔다. 
나는 책을 내려놓고 일어나 부엌 싱크대에 잔을 갖다놓고 
마일스에게 잘 자라고 말했다. 
개는 할 수 없다는 듯이 낡은 모포 위에 몸을 웅크리고 
끙끙 신음하더니 눈을 깜박깜박거렸다. 
나는 불을 끄고 2층에 있는 손님용 침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들어가 금방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