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세계문학

[하루키] 렉싱턴의 유령3

Joyfule 2010. 5. 8. 09:44
 
  [하루키] 렉싱턴의 유령3  
  
눈을 떴을 때, 공백 속에 있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한동안 데쳐놓은 채소처럼 무감각했다. 야채 박스 속 깊은 곳에 
오래도록 방치되어 있는 채소처럼. 
그리고 나는 간신히 지금 케이시의 집을 지키고 있는 자신을 자각했다. 
그렇다, 나는 렉싱턴에 있는 것이다. 손을 더듬어 머리맡에 두었던 손목시계를 찾았다. 
버튼을 눌러 파란 글로가 들어오게 하였다. 한 시 15분이었다. 
침대 위에서 살며시 몸을 일으키고 조그만 독서용 램프를 켰다. 
스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떠올리는데 한참이나 시간이 걸렸다. 
나리꽃 모양을 한 뽀얀 우윳빛 유리에 노란 빛이 퍼졌다.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세게 비비고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밝아진 방안을 둘러보았다. 
벽을 점검하고 커튼을 바라 보고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콩이라도 주워모으듯 의식을 하나하나 주워담고 몸을 현실에 적응시켰다. 
그런 후에야 그것을 알았다. 소리다.
해안에 부딪치는 파도소리 같은 자글거림-그 소리가 나를 깊은 잠에서 끌어올린 것이다. 
밑에 누군가가 있다. 살금 살금 문까지 다가가 숨을 죽였다. 
귀 바로 옆에서 자신의 심장이 쿵쿵 거리는 마른 소리가 들렸다. 
나 이외에 이 집안에 분명 누군가가 있다. 그것도 한두 사람이 아니다.
음악소리 같은것도 희미하게 들린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겨드랑이 밑으로 식은 땀이 줄줄 흘렀다. 
내가 자고 있는 동안, 대체 이 집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른 것은, 잘 꾸며진 프래티컬 조크가 아닐까하는 의심 이었다. 
케이시는 런던에 가는 척했지만 실은 이 집 근처에 남아 있다. 
나를 깜짝 놀라게 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한밤의 파티를 준비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케이시는 그런 시시한 장난을 꾸밀 타입이 아니었다. 
그의 유머 감각은 훨씬 섬세하고 차분하다. 
아니면-나는 문에 기댄 채 생각했다-
거기에 있는 사람은 내가 모르는 케이시의 친구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케이시가 여행을 떠났다는 것을 알고는
(그리고 내가 빈 집을 지키고 있다는 것은 모르고) 이때다 하고 
제 멋대로 집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어찌되었건 적어도 도둑은 아니다. 
도둑은 남의 집에 몰래 숨어 들어 이렇게 큰 소리로 음악을 듣지 않는다. 
나는 잠옷을 벗고 바지를 입었다. 스니커를 신고 T셔츠 위에다 스웨터를 껴입었다. 
그러나 만일의 경우라는 것도 있다. 손이 허전했다. 
방안을 돌아보았지만 적당한 것은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야구 방망이도 없었고 부젓가락도 없었다. 
거기에 있는 것은 서랍장 과 침대와 조그만 책꽂이와 액자에 들어있는 풍경화뿐이었다. 
복도로 나오자 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렸다. 
계단 아래서 흥겨운 옛날 음악이 증기처럼 복도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귀에 익은 유명한 곡인데 제목은 생각나지 않았다. 말소리도 들렸다. 
많은 사람들의 소리가 하나로 뒤섞여 있어, 이 야기의 내용까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때로 웃는 소리도 들렸다. 기품있고 가벼운 웃음소리였다. 
아무래도 아래층에서는 파티가 진행중이고 그것도 한참 절정에 있는 듯하였다. 
흥을 돋우듯 샴페인 잔이 포도주 잔과 부딪치는 소리가 짜랑짜랑 영롱하게 울렸다. 
아마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구두창이 바닥을 이동하는 리드미컬한 소리가 찌익찌익 들렸다. 
나는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어두운 복도를 걸어 계단 층계참에 섰다. 
그리고 난간으로 몸을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길쭉한 현관 창문으로 새어드는 빛이 장엄한 분위기의 넓은 현관 홀을 
희뿌옇게 비추고 있었다. 사람의 그림자 는 없다. 
홀에서 거실로 통하는 쌍바라지 문은 반듯하게 닫혀 있었다. 
그 문은 내가 자러 갈때는 분명 열려 있었다. 틀림없다. 
그러니까 내가 2층으로 올라가 잠자리에 든 후에 누군가가 그 문을 닫았다는 얘기다.
대체 어찌된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대로 가만히 2층 방에숨어 있 을 수도있다. 
안에서 문을 잠그고 침대에 파고들어...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계단 위에 서서. 아래층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흥겨운 음악소리와 
웃음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맨처음 느꼈던 충격은 연못에 인 파문이 가라앉듯 점차 진정되었다. 
분위기로 보아 그들이 이상한 종류의 인간은 아닐 것이라고 나는 추측하였다.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계단을 내려가 현관 홀까지 갔다. 
스니커의 고무 바닥이 낡은 나무판을 한 단 한 단 조용히 밟았다. 
홀에 도착하자 그대로 왼쪽으로 돌아 부엌에 들어갔다. 
불을 켜고 서랍을 열어 묵직한 육류용 칼을 손에 잡았다. 
케이시는 요리가 취미라서 독일제 고급 식칼 세트를 갖고 있었다. 손 질도 잘되어 있었다. 
잘 벼려진 스테인리스 칼은 손 안에서 요염하고 리얼하게 빛났다. 
그러나 자신이 그렇게 커다란 칼을 손에 꽉 쥐고 시끌한 파티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하자 어쩐지 우스꽝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수돗물을 한 컵 마시고 칼을 다시 서랍에 집어넣었다. 
 개는 어떻게 된 거지? 
 그때서야 비로소 마일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음을 알았다. 
마일스는 자신의 잠자리에 있지 않았다. 대체 녀석은 어디로 가버린 거지? 
만약 한밤중에 누군가가 집안으로 들어왔다면 적어도 짖든지 어떻게 해야 되는것 아닌가. 
바닥에 쭈그리고 털투성이 모포의 움푹한 자리에 손을 대어 보았지만 
온기는 남아 있지 않았다. 
개는 아무래도 한참 전에 잠자리에서 빠져나와 어디론가 가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부엌에서 나와 현관 홀로 가서는 거기에 놓여 있는 조그만 의자에 앉았다. 
음악소리는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의 말소리도 계속 되고 있었다. 
그것은 파도처럼 높이 올랐다가 가라앉곤 하였다. 대체 몇 명이 나 되는 것일까. 
적어도 열다섯명 정도는 있을 것이다. 어쩌면 스무 명이 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넓은 거실도 상당히 복잡할 것이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볼 것인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어렵고 또 기묘한 선택이었다. 나는 이 집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니 
관리에도 그 나름의 책임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파티에는 초대받지 않았다. 
나는 문 틈으로 새어나오는 말소리의 단편이나마 들으려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헛수고였다. 
말소리는 혼연일체가 되어 단어 하나 구별할 수 없었다. 
언어며 대화라는 것은 알 수 있지만, 
그것은 마치 두껍게 덧칠한 벽처럼 내 앞에 가로놓여 있었다. 
거기에는 내가 파고들어갈 여지 따위는 있을것 같지 않았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쑤셔넣고 동전을 하나 꺼내 이렇다 할 의미도 없이
손 안에서 몇 번 돌려 보았다. 
그 은색 동전은 나에게 솔리드한 현실 감각을 되찾아 주었다. 
무언가가 마치 부드러운 나무 망치처럼 내 머리를 때렸다. 
....그것은 유령이다. 
 거실에 모여 음악을 듣고 담소하고 있는 것은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다. 
 양팔에 싸아하게 소름이 돋았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크게 흔들리는 듯한 감촉이 있었다. 
마치 주변의 위상이 어긋나는 것처럼 기압이 변화하여 귓속에서 
부우우웅하는 이명이 가볍게 울렸다. 
침을 삼키려는데 목이 카랑카랑 말라 제대로 삼켜지지 않았다. 
나는 동전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사방을 돌아보았다. 
심장이 또 경직된 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