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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 (In the Ravlne) 17. - 안톤 체홉 (終)

Joyfule 2010. 5. 5. 08:24

 골짜기 (In the Ravlne) 17. -  안톤 체홉    
 
어찌 된 까닭인지 노인은 여름이고 겨울이고 
변함없이 털가죽 외투를 입고 밖으로 돌아다녔다. 
아주 더운 날이 아니면 집에 가만히 앉아 있는 일이 없었다. 
언제나 털가죽 외투의 깃을 세워서 몸을 꼭 감싸고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거나, 큰 길을 따라서 정거장 쪽으로 걸어가거나, 
혹은 교회의 문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있거나 했다. 
벤치에 가만히 앉아서 몸을 까딱도 하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 이 인사를 해도 답례를 하지 않았다. 
여전히 농부들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혹시 누가 무얼 물으면 정확하고 정중한 말로 짧게 대답했다. 
마을에서는 그가 며느리한테 쫓겨나서 먹을 것도 못 얻어먹고, 
사람들의 시혜를 받아 겨우 연명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재미있어 하는 사람도 있었고, 가엾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바르바라는 점점 살이 올라 안색이 환하게 피어났다. 
여전히 자선을 베푸는 데에 힘쓰고 있었다. 
악시냐도 그것만은 방해하지 않았다. 
잼의 저장이 많아져서 이제는 새 딸기가 날 때까지 
도저히 다 먹어치울 수가 없을 정도였다. 
내버려두면 점점 굳어지므로, 바르바라는 그 잼의 처치에 골머리를 앓았다.
아니심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점점 잊혀져 가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청원서 같은 큰 종이에 
전처럼 달필로 쓴 운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이로써 그의 친구 사모르도프와 함께 
유형을 가 있는 게 분명해졌다. 
그 운문 밑에는 가까스로 읽어볼 수 있는 서투른 글씨로 
단 한 줄 이런 말이 덧붙여져 있었다. '
저는 여기서 계속 병고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저는 고통스러워요. 부탁입니다. 저를 구해주세요.' 
어느 화창하게 갠 가을날 저녁 때, 
그리고리 노인은 교회의 문 옆에 앉아 있었다. 
털가죽 외투의 깃을 세우고 있었으므로 코끝과 모자챙 밖에 보이지 않았다. 
긴 벤치의 다른 한쪽 끝에는 도급 목수인 옐리자로프와 
일흔 살이 다 돼 이가 빠졌는데도 
학교의 수위 노릇을 하고 있는 야코프 노인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목발과 수위 영감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식들이 늙은이를 봉양해야지...  너의 부모를 공경하란 말이 있지 않나." 
야코프는 자못 분개하여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말이야, 그 집 며느리는 말이야, 
시아버지를 집에서 쫓아낸 거야. 그것도 시아버지가 산 집에서 말이야. 
영감은 지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해..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나? 
벌써 사흘이나 아무것도 먹질 못했다더군."
  "사흘씩이나!" 목발이 깜짝 놀라서 말했다.
  "보라구, 저렇게 가만히 앉아서 아무 말도 못해. 
몸이 쇠약할 대로 쇠약해진 거야. 
그 런데 왜 가만히 앉아만 있는지. 고소하면 안될까...
재판소에서까지 설마 그 여자를 두둔 할라구."
  "재판소가 누구를 두둔한다구?" 
목발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뭐라구?"
  "그래도 그 여자에게는 좋은 점도 있다구. 
일 하나는 착실하게 하고 있잖아. 
그 집은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유지가 안 된다구... 
이를테면 나쁜 짓을 하지 않고서는 지탱을 못한단 말이야."
  "시아버지가 산 집에서 시아버지를  쫓아버리다니." 
야코프는 여전히 성이 나서 소리쳤다.
 "자기가 돈을 모아서 산 집이라면 사람을 쫓아내도 어쩔 수 없지만! 쯧쯧, 
생각만 해도 비위가 상하는 년이야! 천벌을 받을 년!"
그리고리 노인은 조용히 귀를 기울이며 꼼짝달싹도 않고 앉아 있었다.
 "자기 집이건 남의 집이건 마찬가지야, 
따스하고 여자들이 바가지만 긁지 않으면 말이야... " 
목발이 말하며 웃었다.
 "이래뵈도 난 젊어서는 우리 나스타샤를 무척 좋아했었지. 
얌전한 여자 였어. 얌전한 건 좋은데, 
나스타샤는 두 마디째에는 벌써 '당신 집을 사세요! 당신 집을 사세요! 
당신 집을 사시라구요!' 했었지. 
임종시에도 '여보 경주용  마차를 한 대 사세요. 
뭐 당신이라고 항상 그렇게 터덜터덜 걸어다녀야만 하나요'  
어쩌고 하면서 지껄여댔지. 
그런데도 내가 그 여자에게 사준 것이라고는 고작 생강떡 정도였으니."
  "그리고 말이야, 그 여자의 남편은 귀머거리에다 더구나 등신이야." 
야코프는 목발이 하는 말은 듣지도 않고 자기 말만 계속했다. 
"쓸개 빠진 얼간이 자식 같으니. 
말하자면 꼭 거위 새끼 같은  놈이야. 그 자식이 아는 게 뭐 있나? 
거위란 놈은 여보게, 몽둥이로 대가리를 쳐도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지 않던가." 
목발은 공장 안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려고 일어났다. 
아코프도 일어났다. 
둘은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나란히 걸어갔다. 
그들이 50보쯤 걸어 나갔을 때 그리고리도 따라 일어나서, 
마치 빤질빤질 미끄러운 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조심스런 걸음걸이로 두 사람의 뒤를 따라 느릿느릿 걸어갔다. 
마을은 이미 저녁 어둠에 싸여 있었다. 
태양은 뱀처럼 꿈틀꿈틀 기어올라간 길의 위쪽만을 비추고 있었다. 
할머니들이 숲에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모두들 여러 가지 버섯이 들어 있는 바구니를 손에 들고 있었다. 
정거장에 나가서 화차에 벽돌을 싣는 일을 하고 있는 
부인네들과 처녀들도 떼를 지어 돌아오고 있었다. 
그녀들의 코와 양쪽 눈밑의 뺨에 붉은 벽돌 가루가 묻혀져 있었다. 
다같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앞장 서서 걸어오고 있는 게 리파였다. 
그녀는 이날  하루도 무사히 마치고 
편히 몸을 쉬게 되는 것이 매우 즐겁다는 듯이, 
가슴을 펴고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가냘픈 소리로 노래하고 있었다. 
행렬 중간쯤에 역시 날품팔이를 하고 있는 그녀의 어머니 플라스코비야가 끼여 있었다. 
그녀는 한 손에 꾸러미를 들고 
언제나 처럼 헐떡헐떡 가쁜 숨을 쉬면서 걷고 있었다. 
  "안녕, 마카뤼치!" 
리파는 목발을 보자마자 인사를 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안녕, 리퓌니카!" 
목발이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아주머니, 처녀들, 이 돈 많은 목수 영감을 사랑해주시라구요! 
하하! 얘들아, 얘들아, 나의 귀여운 아가들아!"
목발과 야코프는 저리 지나갔으나 두 사람의 이야기 소리는 또렷이 들려왔다. 
이윽고 리파의 일행은 그리고리 노인을 만났다. 
그러자 갑자기 모두들 말문을 닫고 잠잠해졌다. 
리파와 플라스코비야만 잠시 줄에서 조금 뒤쳐졌다. 
노인과 스쳐 지나가게 되었을 때 리파가 정중히 인사를 하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어머니도 함께 인사했다. 노인은 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입술이 떨리고 눈에는 눈물이 가득 괴어  있었다. 
리파는 어머니가 들고 있던 꾸러미에서 
피로시키(고기와 야채로 속을 넣은 러시아 식 만두: 역주) 
한 개를 꺼내어 노인에게 주었다. 
노인은 그것을 받아 들고 먹기 시작했다.
해는 아주 넘어가 버려 길 위쪽을 비추고 있던 빛까지도 이미 사라져버렸다. 
주위에는 어둠이 깃들고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리파와 플라스코비야는 발걸음을 옮기면서 오래도록 성호를 그었다. ㅡ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