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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렉싱턴의 유령 4

Joyfule 2010. 5. 10. 00:04
 
  [하루키] 렉싱턴의 유령 4 
  
지금까지 몰랐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생각해보면 도무지 이런 얼토당토 않은 시간에 
대체 어디에 사는 누가 파티를 연다는 말인가. 
게다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집 근처에 차를 세우고 웅성웅성 현관을 통해 
집으로 들어왔다면 암만 그래도 그 시점에서 나는 눈을 떴을 것이다. 
개도 짖지 않을리가 없다. 그러니까 즉, 그들은 어디로 들어온 것이 아니다. 
마일스라도 곁에 있었으면 싶었다. 
굵직한 개의 목에 손을 두르고 그 냄새를 맡고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개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현관 홀 의자 위에 마치 무엇에라도 홀린듯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물론 무서웠다. 
그러나 무서움을 넘어선 무언가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아주 깊고 막막한 것이었다. 
몇 번이나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뱉어 폐속의 공기를 조용히 교환하였다. 
조금씩 정상적인 감각이 되돌아왔다. 
의식의 저 깊은 곳에서 카드가 몇 장 살며시 뒤집어지는 듯한. 그런 감각이 있었다. 
나는 일어나 내려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발소리를 죽이고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 그대로 침대에 파고들었다. 
그 뒤에도 음악소리와 말소리는 끈질기게 이어졌다. 
잠이 오지 않아 새벽녘이 가깝도록 그 소리들과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불을 켜둔채 침대의 헤드보드에 기대어 천장을 올려다 보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파티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결국은 잠이 들 고 말았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늘고 차분하게 내리는 비였다. 
오로지 지면을 적실 목적으로 내리는 봄비였다. 
처마 밑에서 파란 언치새가 울었다. 
시계 바늘은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잠옷 차림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현관 홀에서 거실로 통하는 문은 어젯밤 내가 자러 가기전 과 똑같이 열려 있었다. 
거실에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내가 읽던 책은 소파 위에 엎어져 있었다. 
크래커 부스러기도 테이블 위에 그대로 널려 있었다. 
예상했던 일이기는 하지만 파티가 열린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부엌 바닥에서는 마일스가 둥그렇게 몸을 말고 아직 자고 있었다. 
개를 깨워 도그 푸드를 주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개는 귀를 쫑긋거리며 우적우적 신나게 먹이를 먹었다. 
케이시의 집 거실에서 이 불가사의한 한밤중의 파티가 열린 것은 첫날 밤뿐이 었다. 
그 다음날부터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조용하고 은밀한 렉싱턴의 밤이 이렇다할 특징 없이 반복되었을 뿐이다. 
다만 그곳에 있는 동안 나는 어찌된 영문인지 매일 밤 한 밤중에 잠에서 깨어났다. 
시각은 언제나 한 시에서 두 시 사이였다. 
남의 집에서 혼자 자자니 잠자리가 뒤숭숭했는지도 모르 겠다. 
또 어쩌면 내 마음이 저 기묘한 한밤의 파티와 
다시 한번 조우하고 싶어했는지도 모르겠다. 
한밤중에 눈을 뜨면 숨을 죽이고 암흑 속에서 귀기울여 보았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이 정원의 나무들을 소슬거려 놓을 뿐이었다. 
그런 때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부엌에서 물을 마셨다. 
마일스는 항상 똑같은 자리에서 몸을 둥그렇게 말고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 내가 모습을 보이면 반갑다는 듯이 깨어나 
꼬리를 흔들고 머리를 내 다리에 비벼댔다.
나는 개를 데리고 거실로 들어가 불을 켜고 방안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소파와 커피 테이블이 여느 때와 똑같은 위치에서 밤의 어둠에 녹아 있을 뿐이었다. 
뉴 잉글랜드의 해안 풍경을 그린 멋대가리 없는 유화도 변함없이 벽에 걸려 있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10분이나 15분쯤 별로 하는 일도 없이 시간을 죽였다. 
그리고 이 방안에서 무슨 실마리 같은것을 찾을 수 있지는 않을까 하고 
눈을 감고 의식을 집중해 보았다. 그러 나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내 주위에는 교외의 비밀스럽고 깊은 밤이 있을 뿐 이었다. 
화단에 면한 창문을 열자 봄 꽃의 풍요로운 향내가 풍겼다. 
커튼이 밤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깊은 숲에서 부엉이가 울었다. 
나는 일주일 후 케이시가 런던에서 돌아오더라도 그날 밤의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 말 하지 않으리라고 마음을 정했다. 왜인지는 뭐라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케이시에게는 말하지 않는 편이 좋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지내기가 어땠는가, 내가 없는 동안 무슨 특별한 일은 없었나?" 
 케이시는 현관에서 내게 그렇게 물었다. 
 "아니, 특별한 일은 없었네. 아주 조용하고, 일도 잘되었어."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것 정말 다행이로군." 
 케이시는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값비싼 몰트 위스키를 꺼내 선물로 주었다. 
나는 그 길로 악수를 하고 헤어져, 
폭스바겐을 몰고 케임 브리지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반년 가까이 케이시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전화가 몇 번 걸려 와 얘기를 나누기는 하였다. 
제레미의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그 과묵한 피아노 조율사는 
웨스트 버지니아에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때 긴 소설의 막바지를 마무리하고 있을 때라서 
정말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누구를 만난다든가 외출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그동안 하루에 열두 시간씩 책상 앞에서 일을 하였고, 
집 둘레 1킬로미터 범위를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케이시를 만난 것은 찰스강의 보트 하우스 근처에 있는 카페 테 라스였다. 
산책을 하는데 거기서 우연히 그를 만나 함께 커피를 마셨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케이시는 지난번 만났을 때에 비해 깜짝 놀랄 만큼 늙어 있었다. 
몰라볼 정도였다. 열 살이나 나이 먹어 보였다. 
흰머리가 늘어난 머리카락은 귀 위로 길게 자라 있고, 
눈 아래는 거무죽죽한 주머니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손 등의 주름까지 더 자글자글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