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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렉싱턴의 유령 5

Joyfule 2010. 5. 11. 09:42
 
  [하루키] 렉싱턴의 유령 5 
  
외모에 꼼꼼하게 신경을 쓰는 스마트 한 케이시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무슨 병을 앓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케이시가 그 점에 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아, 나도 묻지 않았 다. 
제레미는 이제 렉싱턴으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네, 
라고 케이시는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저으면서 침울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가끔 전화로 웨스트 버지니아에 있는 그와 얘기를 나누는데. 
어머니가 돌아 가신 충격으로 어째 사람이 변해버린 것 같다네. 
옛날의 제리미와는 달라. 거의 별자리 얘기뿐이지. 
오늘은 별자리의 위치가 어떻고, 그래서 오늘은 무엇을 하면 좋고 
무엇을 하면 안 된다느니,그런 얘기들뿐이라네. 
렉싱턴에 있을 때는 별자리 얘기 따위는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안됐군(I'm really sorry)"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나 대체 누구에게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내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난 겨우 열 살이었네"라고 
케이시는 커피 잔을 바 라보며 조용히 말을 꺼냈다. 
"형제가 없어서 아버지와 나 단둘이 남았지. 
어머니는 어느 해 가을 초엽에, 요트 사고로 돌아가셨네. 
우리는 그때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정신적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네. 
그녀는 아직 젊고 건강하셨지. 아버지보다 열 살 이상이나 연하셨으니까. 
그래서 어머니가 언젠가는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아버지나 나나 전혀 하지 못했어.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녀는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어. 
휑하니. 연기나 뭐 그런 것처럼 말일세. 
어머니는 아름답고 총명하신 분이라, 모든 사람들이 좋아했지. 산책을 좋아하시고, 
아주 품위있게 걷는 분이셨다네. 등을 곧바로 펴고, 턱을 조금 앞으로 내민채, 
뒷짐을 지시고, 즐겁게 걸으셨어. 걸으면서는 곧잘 노래도 부르시고. 
나는 어머니와 둘이서 산책하기를 좋아했다네. 
늘 떠오르는 것은, 여름날 아침의 상쾌한 빛을 받으며 
뉴포트 해변길을 걷는 어머니의 모습이라네. 
그녀의 긴 섬머 원피스 자락이 바람에 시원스럽게 팔락이곤 했지. 
자잘한 꽃무늬 면 원피스였네. 그 광경이 마치 사진처럼 내 머리에 각인되어 있다네. 
아버지는 그녀를 사랑하고, 아주 소중하게 여기셨어. 
아마 아들인 나보다 어머니를 훨씬 더 사랑하셨을거네.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지. 
자기 손으로 획득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어. 
그에게 나란 존재는, 결과적으로 얻어진 것이 었어. 
그는 물론 나도 사랑해주셨어. 딱 하나뿐인 아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머니를 사랑하는 만큼은 아니었지. 그렇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네.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한 것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는 않으셨어.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재혼도 하지 않으셨으니까.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다음 3주일 동안, 
아버지는 내내 잠만 자셨어.과장이 아니라네. 
말 그대로 내내 주무셨지.어쩌다 생각났다는듯 침대에서 훌쩍 일어나 
아무말도 없이 물을 마시고, 무슨 징표처럼 음식을 조금 드셨어. 
몽유 병자나 유령처럼 말일세. 덧문까지 완전히 꼭꼭 닫은 캄캄한 방안에서 마치 
주술에 걸린 잠자는 미녀처럼, 끝없이 주무셨다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셨어. 
몸을 뒤척이지도, 표정을 바꾸지도 않으셨어. 
나는 불안해서 아버지 곁으로 살며시 다가가 
몇 번이나 확인했었지.혹 자는게 아니라 죽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일세. 
나는 머리맡에 서서. 빨려 들어갈듯 아버지의 얼굴을 지켜보곤 했다네. 
하지만 돌아가신 것은 아니었어.
그는 땅 속에 묻힌 돌처럼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뿐이었지. 
아마 꿈도 꾸지 않으셨을 거네. 
어둡고 조용한 방안으로 규칙적인 숨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지. 
그렇게 깊고, 그렇게 긴 잠을 나는 그때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네. 
그는 마치 다른 세계로 가버린 사람처럼 보였어. 정말 무섭고 두려웠다네. 
나는 그 넓은 저택 안에서, 그야말로 외톨이였지. 
세 상으로부터 버림 받은 듯한 느낌이었다네. 
15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물론 슬프기는 했지만,
솔직히 말해 나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네. 
돌아가신 아버지 모습이, 깊이 잠들어 있는 아버지 모습하고 똑같아 보였기 때문이지. 
그때의 아버지 모습하고 너무 비슷했어. 그건 데자뷰였다네. 
온몸의 심지가 어긋나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강렬한 데자뷰였지. 
나는 30년이란 세월을 사이에 두고, 과거를 고스란히 더듬고 있었던 걸세. 
다만 이번에는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뿐.나는 아버지를 사랑했다네.
온 세상의 그 누구보다 아버지를 사랑했어. 존경도 했지만, 
그 이상으로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우린 단단히 결속되어 있었어. 
그래서 이상한 얘기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침대에 들어가 끝없는 잠에 빠졌다네.
마치 특별한 혈통의 의식이라도 계승하는 것처럼 말이네. 
아마 한 3주일은 잤을 걸세. 나는 그동안 자고 자고 또 자고. 
시간이 썩어 문드러져 없어질 때까지 잤다네. 한없이 한없이 잘 수 있었어. 
아무리 자도 잠이 모자라는거야. 그때의 나한테는 잠의 세계가 진정한 세계고, 
현실 세계는 허망하고 덧없는 세계에 지나지 않았어. 
그것은 색채를 잃은 천박한 세계였어. 그런 세계에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가 느꼈을 무상함을,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던 셈이지.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겠나? 
요컨대 그런 종류의 일들은, 다른 형태를 취해. 다른 형태를 취하지 않을 수 없지." 
케이시는 거기서 말을 끊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가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모밀 잣 밤나무 열매가 아스팔트 위로 떨어지는 마른 소리가 이따금 탁, 하고 들렸다.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케이시는 얼굴을 들고 여느때의 온화하고 세련된 미소를 입가에 띠고 말했다. 
 "내가 지금 여기서 죽는다 해도, 이 세상 어느 누구 하나, 
  나를 위해 그렇게 깊은 잠을 자주지는 않을 거네." 
가끔 렉싱턴의 유령을 떠올린다. 
케이시의 고풍스런 저택 거실에서, 
한밤중에 시끌시끌한 파티를 열었던 정체 모를 유령들을. 
그리고 덧문까지 꼭꼭 닫은 2층 침실에서 예비적인 사자(死者)처럼 끝없는 
잠에 빠져 있는 케이시의 모습과, 그의 아버지를. 붙임성 좋은 개 마일스와, 
숨이 삼켜질 만큼 완벽한 레코드 컬렉션을. 제레미가 연주하는 슈베르트와, 
현관 앞에 세워져 있는 파란 BMW 왜건을. 하지만 그런 것들 모두가 아주 먼 옛날, 
아주 먼 장소에서 있었던 일 들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바로 얼마 전에 경험한 일인데도.... 
나는 지금까지 아무한테도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상당히 기묘한 이야기인데도, 필경은 그 아득함 때문에,
내게는 조금도 기묘하게 여겨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