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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 일곱 번째 남자 1.

Joyfule 2010. 5. 12. 12:08
 
  하루키 : 일곱 번째 남자 1.  
"그 파도가 나를 집어삼키려 한것은 내가 열 살이던 해의 9월, 
어느 오후의 일이었습니다." 
일곱번째 남자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는 그날 얘기하기로 되어 있는 마지막 인물이었다. 
시계 바늘은 벌써 밤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방안에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앉아 있는 사람들은, 
창 밖 깊은 어둠 속에서 서쪽으로 부는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바람은 정원수들의 잎을 살랑살랑 흔들고 유리창을 달그락달그락 흔들고, 
그리고 조그만 호루라기를 불듯 뾰족한 소리를 내며 어디론가 불어갔다.
"그것은 특수한 종류의, 예전에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거대한 파도였습니다." 
남자는 말을 이었다. 
"그 파도는, 간발의 차로 나를 집어삼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대신 내게서 가장 중요한 것을 삼키고서 다른 세계로 가버렸습니다. 
내가 그것을 다시 발견하고 회복하기까지는, 긴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되돌이킬 수 없는 길고도 귀중한 세월입니다." 
일곱번째 남자는 50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야윈 남자였다. 
키가 크고 턱수염을 길렀고, 오른쪽 눈 옆에 마치 
날카로운 나이프로 찔린 듯 조그만, 그러나 깊은 흉터가 있었다. 
머리칼은 짧고, 드문드문 흰머리가 섞여 있었다. 
남자의 얼굴에는,사람들이 무슨 말을 꺼내기가 
좀처럼 어려울 때 흔히 짓는 표정이 어려 있었지만, 
그것은 마치 오랜 옛날부터 거기에 있었다는 듯 얼굴에 잘 녹아 있었다. 
그는 회색 트위드 상의 아래로 소박한 파란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남자는 가끔 셔츠 깃에 손을 대었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몰랐다.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리고서 일곱번째 남자는 소리 낮춰 컹컹 헛기침을 하였다. 
그리고 잠시 침묵 속에 자신의 말을 묻었다.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이야기가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내 경우, 그것은 파도였습니다. 
물론 여러분의 경우에 그것이 무엇일지 나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나의 경우 그것은 우연찮게도 파도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런 전조도 없이, 내 앞에 어느 날 갑자기 
산더미 같은 파도로 그 치명적인 모습을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나는 S현의 바닷가 마을에서 자랐습니다.
조그만 마을이라, 이 자리에서 그 이름을 밝힌다 해도 
여러분은 들어본 기억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그 마을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계셨습니다. 
덕분에 나는 별 부족함이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죠. 
내게는 철이 들 무렵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한 명 있었습니다. 
이름은 K라고 하지요.
그는 바로 우리 집 근처에 살고 있었고,나보다 한 학년 아래였습니다. 
우리는 학교에도 늘 같이 다니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항상 함께 놀았습니다. 
거의 형제나 다름없는 사이였지요. 
사귄 지도 오랜데, 그 동안 싸움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나에게는 친형이 한 명 있지만 나이가 여섯 살이나 차이 나서 
좀처럼 마음을 털어놓을 수도 없었습니다. 
아니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인간적으로 성격이 잘 맞지 않았던 것이죠. 
그래서 나는 친형보다 그 친구 쪽에
 따뜻한 형제의 정 같은 것을 품고 있었습니다. 
K는 몸도 가냘프고 피부도 하얗고 마치 여자처럼 예쁘장한 생김의 아이였습니다. 
그런 데다 언어 장애가 있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혹 지능 장애아로 보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몸도 약해서 학교에서 돌아와 놀 때에는 
내가 항상 보호자처럼 그를 보살폈습니다. 
나는 비교적 몸집도 크고 운동도 잘했고, 
그래서 다들 나에게는 꼼짝 못했으니까요. 
내가 그런 식으로 K와 함께 있기를 좋아한 것은 무엇보다 
그이 자상하고 고운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절대로 지능에 결함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언어 장애 때문에 학교 성적도 별로 좋지 못했고, 
수업을 따라가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림에만은 탁월한 솜씨를 발휘하여 연필과 물감만 쥐어주면 
선생님도 혀를 내두를 만큼 멋지고 생명력 넘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미술 대회에서도 몇 번이나 입상을 하였고 표창을 받은 일도 있습니다.
만약 그대로 성장했다면 훌륭한 화가로서 이름을 날리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가 즐겨 그린 그림은 풍경화였습니다. 
그는 가까운 해변에 가서는 진종일 지치지도 않고 바다 풍경을 그렸습니다. 
나는 곧잘 옆에 앉아 붓을 놀리는 그의 날렵하고 정확한 손길을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새하얀 공백 위에 저렇게 생생한 모양과 색채를 
순식간에 탄생시킬 수 있는지 나는 감탄스럽고 놀라웠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순수한 재능이었다고 여겨집니다. 
어느 해 9월의 일입니다만, 
내가 살고 있는 지방에 엄청난 태풍이 몰아닥쳤습니다. 
라디오의 일기 예보에서는,
그 태풍이 10년 만에 오는 최대의 태풍이라고 보도하였습니다. 
학교는 일찌감치 휴교하여 문을 닫았고, 
온 동네의 가게들도 굳게 셔터를 내리고 태풍에 대비하였습니다. 
아버지와 형은 망치와 못 상자를 들고 아침부터 온 집의 덧문에 못질을 하셨고, 
어머니는 부엌에서 분주하게 비상식이 될 주먹밥을 만드셨습니다. 
병과 물통에 물을 담고, 만에 하나 피난해야 할 경우를 위하여 
우리들은 각자 소중한 물건을 챙겨 배낭을 꾸렸습니다. 
어른들에게는 해마다 닥쳐오는 태풍이 그저 위험하고 성가신 존재일 뿐이지만, 
구체적인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같은 아이들에게 그것은 
가슴 설레는 행사 같은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한낮이 지나자 하늘의 색이 갑자기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색에는 뭐라 말할 수 없이 비현실적인 색상도 섞여 있었습니다. 
바람이 신음 소리를 지르고, 마치 모래를 갖다 뿌리는 것처럼 
타닥타닥 마른 소리를 내며 비가 세차게 집을 때리기 시작할 때까지, 
나는 툇마루에 앉아 그런 하늘의 모양을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덧문을 닫아 캄캄해진 집 안에서 우리 가족은 한방에 모여 
라디오 뉴스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강우량은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강풍으로 인한 피해가 막심하였습니다. 
많은 집의 지붕이 날아갔고, 배는 몇 척이나 전복되었다고 합니다. 
바람에 날리는 무거운 것에 맞아 죽거나 중상을 입은 사람도 몇 명 있었습니다. 
절대로 집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이라고 아나운서는 몇 번이나 경고했습니다. 
강풍 때문에 집이 가끔,
 마치 커다란 손이 붙잡고 뒤흔드는 것처럼 삐걱삐걱 소리를 냈습니다. 
무거운 것이 덧문에 부딪치면 쾅 하고 큰소리가 들리기도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다른 집 기와가 날아온 모양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은 어머니께서 준비하신 주먹밥과 계란말이를 점심으로 먹고, 
라디오 뉴스에 귀를 기울이고, 
태풍이 어딘가로 빠져나가기를 참을성있게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태풍은 좀처럼 물러가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