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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 일곱 번째 남자 2.

Joyfule 2010. 5. 13. 09:16
 
  하루키 : 일곱 번째 남자 2.  
뉴스에서는 태풍은 S현의 동부에 상륙한 시점부터 급격하게 풍속이 떨어져 
현재는 인간이 뜀박질을 하는 정도의 느릿한 속도로 
북동쪽을 향하여 이동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바람은 쉴새없이 흉포한 소리를 내며 
지표에 있는 모든 것을 땅끝까지 날려보내려 하였습니다. 
그런 바람이 불기 시작한 지 약 한 시간쯤 경과했을 때입니다. 
문득 사방이 잠잠해진 것을 알았습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죠. 
어디선가 새 우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버지는 덧문을 살며시 열고 그 틈으로 바깥 상황을 살폈습니다. 
바람은 잔잔하고 비도 개어 있었습니다. 
두꺼운 회색 구름이 천천히 상공을 흐르고 있었습니다. 
구름이 갈라진 틈으로는 언뜻언뜻 파란 하늘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였습니다. 
정원 나무들은 비에 푹 젖어, 
축 늘어진 가지 끝으로 물방울을 떨어뜨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지금 태풍의 눈 속에 있는 거다."라고 아버지가 가르쳐 주었습니다. 
"잠시 동안, 15분이나 한 20분 정도 휴식 시간처럼 이 고요함이 지속될 거다. 
그 다음에는 다시 아까 같은 바람이 몰아칠거야." 
나는 밖에 나가보아도 되는냐고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멀리만 가지 말고 잠시 걷다 오는 정도면 괜찮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곧바로 돌아와야 한다." 
나는 밖으로 나가 사방을 돌아보았습니다. 
바로 몇 분 전까지 그렇게 모진 바람이 불었다고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하늘에 거대한 태풍의 '눈'이 둥실 떠 있고, 
우리를 싸늘한 눈길로 내려다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물론 그런 눈이 있을리가 없죠. 
우리들은 기압의 중심이 만들어내는 일시적인 고요함 속에 있을 뿐이었습니다. 
어른들이 무슨 피해가 있지는 않나 집 안팎을 둘러보고 있는 동안, 
나는 혼자 바닷가 쪽으로 걸어가 보았습니다. 
꺾이고 잘려 나간 나뭇가지들이 길가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습니다. 
어른도 혼자서는 들어올리지 못할 만큼 
굵직한 소나무 가지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조각조각 부서진 기와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기도 했습니다, 
돌을 맞은 자동차 유리에는 산산이 금이 가 있었습니다. 
개집도 길 위에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마치 거대한 손바닥이 하늘에서 뻗어나와 
지상을 힘껏 쓸어간 듯한 광경이었습니다. 
길을 걷고 있는데 K가 내 모습을 보고는 밖으로 달려 나왔습니다.
어디 가느냐고 K가 물었습니다. 
내가 잠시 바다를 보러 간다고 대답하자, 
K는 아무 대꾸도 없이 내 뒤를 따라왔습니다.
 K의 집에는 하얀 복슬 강아지가 있는데, 
그 강아지도 우리 뒤를 쫄랑쫄랑 따라왔습니다. 
"조금이라도 바람이 불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야 돼." 
내가 그렇게 말하자 K는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집에서 2백 미터 정도 걸으면 바다입니다. 
당시 내 키 정도 되는 방파제가 있었는데, 
그 계단을 올라 우리는 해변으로 갔습니다. 
우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이 해변으로 놀러 왔고, 
그 부근 바다에 관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태풍의 눈 속에서는 모든 것이 평소와 다르게 보였습니다. 
하늘의 색, 바다의 색, 파도 소리, 바다 냄새, 눈앞에 펼쳐져 있는 풍경, 
그런 바다에 관한 모든 것이 달랐던 것입니다. 
우리는 잠시 방파제 위에 앉아 그런 광경을 아무 말없이 바라보았습니다. 
태풍의 한가운데 있다는데도, 파도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잠잠했습니다.
해변가에 철썩이는 파도도 저 멀리로 물러나 있었습니다. 
우리들 눈앞에는 하얀 모래사장만 끝없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썰물 때도 바닷물이 그렇게 빠지지는 않습니다. 
물이 빠져나간 바다는 기구를 죄 들어낸 
커다란 방처럼 유난히 휑하게 느껴졌습니다. 
해변에는 여러 가지 표류물이 밀려 올라와 띠처럼 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나는 방파제에서 내려가 주변의 모습을 살피면서 드러난 개펄 위를 걸어
거기에 널려 있는 것들을 일일이 조사해 보았습니다. 
플라스틱 문구며 샌들이며 가구의 일부인 듯한 나무 조각이며 
옷가지며, 진기한 병이며 외국어가 적혀 있는 나무 상자며, 
그밖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마치 구멍가게의 진열대처럼 무수하게 흩어져 있었습니다. 
태풍으로 인한 높은 파도가 그것들을 저 먼 곳에서 이리로 날라온 것이겠죠. 
나는 무슨 진기한 것이 눈에 뜨이면 그것을 집어들고 꼼꼼하게 쳐다보았습니다. 
K의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와 우리가 손에 들고 있는 것들을 킁킁거리며 
하나하나 냄새를 맡았습니다. 
그렇게 거기에 이었던 시간은 불과 5분 정도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득 얼굴을 들어보니 
파도가 모래사장 바로 코 앞까지 밀려 와 있었습니다. 
파도는 소리도 없이, 아무런 기척도 없이 우리들 발치께까지 다가와 
그 매끄러운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파도가 바로 옆까지 밀려오다니 
나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나는 바닷가에서 자란 인간이라 
어린 나름으로 바다의 무서움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다가 때로는 미처 예측할 수도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흉포함을 지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심조심 주의를 기울이면서
바닷물이 일렁이고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이쯤이면 안전하겠다'싶은 지점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파도는 어느 사인가 내가 서 있는 장소에서 불과 10센티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밀려왔다가는 또 소리도 없이 밀려갔습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파도는 다시는 밀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다가온 파도는 절대로 불온한 종류의 파도가 아니었습니다. 
살며시 모래를 훑고 밀려간 온화한 파도였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숨겨져 있는 무언가 아주 불길한 것이 
마치 파충류의 살갗에 닿은 감촉처럼 
순식간에 내 등줄기를 얼어붙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까닭없는 공포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공포였습니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살아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틀림없었습니다. 
그 파도는 틀림없이 생명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파도는 그 자리에 있는 나의 모습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이제 나를 그 수중에 넣으려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육중한 육식 동물이 나를 날카로운 이빨로 짓찢어먹는 상상을 하면서 
초원 어딘가에서 숨소리마저 죽이고 나를 노리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도망가야 돼, 라고 나는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K에게 그만 가자'고 말했습니다. 
그는 나와 1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나에게 등을 보인 자세로 
몸을 구부리고 무언가를 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꽤 크게 소리를 질렀는데 K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듯하였습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발견한 것에 정신이 팔려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K에게는 그런 구석이 있었으니까요. 
금방 무언가에 열중하고 그러면 
주변에 있는 것들을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맙니다. 
혹은 내목소리가 내가 생각한 만큼 크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의 내 목소리가 자신의 목소리 같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렸더랬습니다. 
그때 나는 웅웅거리는 신음 소리를 들었습니다. 
지면을 뒤흔드는 소름 끼치는 소리였습니다. 
아니 그 소리 전에 다른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떤 구멍에서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져 나오듯 
쿨럭쿨럭 하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그 쿨럭쿨럭 하는 소리가 한 차례 계속되다가 
이번에는 우우우웅 하는 굉음 같은 불길한 소리가 들렸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