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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퍼 리 - 앵무새 죽이기 - 14. 우리는 모두 필요한 사람들이야 1

Joyfule 2009. 1. 24. 01:11
     
     하퍼 리 - 앵무새 죽이기 -  14.  우리는 모두 필요한 사람들이야 1  
    우리는 고모로부터 더이상 핀치 집안에 대해 듣지 않게 되었지만 
    마을사람들로부터는 계속 듣게 되었다. 
    니켈로 무장한 어느 토요일 젬 오빠는 내가 따라가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요즘 오빠는 사람들 앞에서의 내 존재에 대해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나타내고는 했다. 
    우리가 한증막 같은 보도 위를 허우적대며 
    사람들 속을 지나칠 때면 대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했다.
    저기 그집 아이들이 가네. 
    핀치네 아이들이잖아요. 
    고개를 돌려보면 거기엔 그저 메이코 약국에서 
    관장약을 들어보고 있는 농부들이나, 
    후버 말 대여소의 마차 위에 앉아 있는 
    밀짚모자를 쓴 땅딸막한 시골 여자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풀려나자마자 이 지방의 어려운 일을 도맡고 있는 사람을 강간한 거야. 
    우리 곁을 지나쳐가던 말라빠진 신사가 잘 알 수 없는 말을 해댔고 
    그것은 아버지에게 하려던 질문을 떠올리게 했다.
    아빠, 강간이 뭐예요? 
    창가에 앉아 있던 아버지는 신문을 내려놓고 나를 바라보았다. 
    오빠와 나는 철이 들면서부터 저녁 식사 후 삼십 분 정도는 
    아버지 혼자만의 시간을 갖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고는 설명해주었다. 
    강간이란 여자의 동의 없이 힘으로 성교를 하는 것이라고.
    그런데 왜 칼퍼니아 아줌마는 대답을 안 해주었을까요? 
    아버지는 서글픈 표정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
    무슨 얘기지? 
    저 그날 교회에서 돌아올 때 강간이 뭐냐고 물었더니 
    아빠께 여쭤보라고만 했거든요. 
    그리곤 잊어버렸다가 지금 생각나서 여쭤보는 거예요. 
    아버지의 신문은 이미 무릎 위로 내려져 있었다.
    천천히 다시 얘기해보렴. 
    나는 칼퍼니아 아줌마와 함께 예배보았던 그 교회에서의 일들을 자세히 말했다.
    아버지는 흥미를 느끼는 듯 했고,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수를 놓고 있던 알렉산드라 고모 역시 
    자수를 내려놓고 물었다.
    그렇다면 그날 너희들은 칼퍼니아 아줌마의 교회에서 돌아오는 중이었단 말이니? 
    네, 아줌마가 우릴 데려가주었어요. 
    오빠가 대답했다. 
    그때 난 또다른 것이 생각나 덧붙여 말했다.
    아빠, 칼 아줌마 집에 놀러가기로 했어요. 
    다음 일요일에 갈래요. 그래도 돼죠? 
    아줌마가 아빠가 데려다주시면 언제든지 좋다고 했어요. 
    안 돼. 
    알렉산드라 고모가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홱 돌아보았다. 
    아버지가 고모를 쳐다보는 것도 거의 동시였다. 
    하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고모께 말한 게 아니에요! 
    이 말이 이미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집의 최고 어른인 아버지는 
    순간적으로 일어섰다 앉더니 다시 일어서서 충고했다.
    네 고모께 잘못했다고 말씀드려라. 
    전 고모께 말씀드린 게 아닌데 ,,, 아빠께 여쭌 건데 ,,, . 
    머리를 저으며 바라보는 아버지 특유의 멋진 눈빛은 
    나를 벽에 고정시켰고, 꼼짝 못하게 했다. 
    목소리의 억양은 자못 상기되어 엄중하게 들렸다.
    먼저 고모께 사과부터 드려라. 
    잘못했습니다, 고모. 
    나는 웅얼거렸다.
    자, 이제 정확히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넌 칼퍼니아 아줌마의 말을 들어야 한다. 
    내 말을 들어야 하구. 
    그리고 이 집에 너희 고모가 계시는 한 고모의 말도 들어야 한다. 
    알겠니? 
    잠시 생각해본 뒤에야 그 말뜻을 알아들은 나는 품위를 잃은 자존심을 안고 
    목욕탕으로 가서 상황을 정리해보며 숨어 있으려고 마음먹었지만 
    계속되는 거실에서의 격렬한 논쟁으로 조바심치느라 복도에서 서성댔을 뿐이었다.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오빠가 축구잡지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마치 생생한 테니스 시합 중계라도 보는 듯 책에 머리를 쳐박고 있었다.
     ,,, 오빠는 그녀에 대해 조처를 취해야만 해요. 
    너무 오랫동안 방관하고 계신 거예요, 너무 오랫동안요. 
    그곳에 보낸다고 해서 뭐가 어떻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녀는 여기서와 똑같이 돌봐줄 거야. 
    두 사람이 말하는 그녀란 누구인가.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핑크빛 벽지의 빳빳한 벽이 징벌방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내 인생에서 두 번째로 도망가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그것도 지금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