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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퍼 리 - 앵무새 죽이기 - 21. 유죄, 유죄, 유죄 3

Joyfule 2009. 3. 6. 03:55
     
     하퍼 리 - 앵무새 죽이기 - 21. 유죄, 유죄, 유죄 3   
     법정 안의 오래된 시계가 팽팽히 잡아당겨지더니 
    뼛속까지 뒤흔들어놓을 듯 여덟을 내리쳤다.
    그 시계가 열한 번을 울렸을 때 난 이미 졸음과 싸우다 지쳐 있었다. 
    리버렌드 목사의 편안한 팔과 어깨에 기대어 깜박 잠이 들은 모양이었다.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눈을 뜨려고 애쓰는데, 아래층 사람들의 머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열여섯 명의 대머리와 적갈 색 머리칼의 열네 남자가 보였다. 
    마흔 명의 머리칼은 갈색과 검정색으로 뒤섞여 있었다. 
    언젠가 젬 오빠가 물질탐구를 공부하며 내게 설명했던 것을 떠올려냈다. 
    그것은 경기장에 가득찰 정도의 많은 사람들이 
    나무에 불이 붙기를 기원하면서 정신을 한곳에 모으면 
    그 나무는 저절로 불이 붙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래층의 모든 사람들이 
    톰 로빈슨을 풀어주는 것에 집중하도록 하는 방법을 연구해봤지만 
    그들이 나만큼 졸리다면 별다른 효과는 없으리라 생각되었다.
    딜은 오빠의 어깨 위에 머리를 기댄 채 
    정신없이 자고 있었고 오빠는 조용히 있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그렇지? 
    그럴 거야, 스카웃. 
    오빠가 흔쾌히 답변해주었다.
    으흠, 그럼 한 오 분쯤 걸릴까? 
    오빠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네가 이해 못하는 일들이 있는 거야. 
    나는 너무나 피곤해서 논쟁을 벌일 기운도 없었다. 
    그래도 난 아무쪼록 깨어 있어야만 했다. 
    안 그러면 내게 다가올 감명의 순간을 맞아할 수 없을 테니까. 
    이 기분은 지난겨울에 경험했던 일과 비슷했다. 
    나는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덜덜 떨고 있었던 것이다. 
    법정 안의 공기가 그 이월의 차가운 아침공기와 똑같아질 때까지 
    그 느낌은 점점 강해져갔다. 
    앵무새조차 잠잠했고 머디 아줌마네 집 목수도 망치질을 멈추었다. 
    모든 이웃의 덧문이 래들리 집 문처럼 단단히 잠겨 있었다.
    황폐함과 텅 빈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고 법정 안은 다시 사람들로 가득찼다. 
    푹푹 찌는 이 여름밤이 그 겨울아침과 조금도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긴 장화에 면잠바 차림을 한 헥 테이트 씨가 법정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무슨 얘기인가 건넸다. 
    아버지는 잔잔한 여정을 멈추고 발을 의자막대 위에 올려놓고는 
    손으로 넓적다리 위를 천천히 쓸어내리며 테이트 씨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이렇게 한 마디만 하면 모두 끝날 것이었다.
    그를 데려가십시오, 핀치 변호사님.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법정의 질서를 지켜주십시오. 
    그 권위있는 목소리가 울려퍼짐과 동시에 
    아래층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법정을 떠났던 테이트 씨는 톰 로빈슨을 데리고 돌아와 
    아버지 옆에 그를 세우고 자신도 그 옆에 섰다. 
    테일러 판사도 민첩하게 몸을 일으켜 똑바로 앉은 다음 
    비어 있는 배심원석을 쳐다보았다.
    마치 꿈속 같은 어렴풋함 속에서 무언가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비몽사몽 간에 배심원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물속을 헤엄치듯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 테일러 판사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아득하고 조그맣게 들려왔다. 
    그 순간 나는 오로지 법률가의 아이들만이 지켜볼 수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가 길 한가운데로 걸어가 
    라이플 총을 어깨 위에 올리고 방아쇠를 당겼으나, 
    그 총은 총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당혹감 같은 것이었다.
    그 어느 배심원도 입장할 때나 판결이 선고될 때 톰 로빈슨을 쳐다보지 않았다. 
    다만 배심원장이 테이트 씨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고, 
    그것이 사환을 거쳐 재판장에게 건네졌을 뿐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테일러 판사가 배심원들의 판결문을 읽어내려갔다.
    유죄 ,,, 유죄 ,,, 유죄 ,,, . 
    나는 오빠를 슬쩍 쳐다보았다. 
    발코니 난간을 잡고 있는 오빠의 손이 백지장 같았다. 
    유죄라는 말이 오빠를 찌르는 무서운 흉기라도 되는 듯 
    유죄가 선언될 때마다 어깨가 움찔거렸다.
    테일러 판사가 무엇인가를 말하며 망치를 들었지만 
    그것을 사용할 필요는 없었다. 
    아버지가 가방에 서류를 밀어넣는 모습이 안개 속처럼 뿌옇게 바라다보였다. 
    잠시 후 딸각 닫히는 소리가 났고, 
    아버지는 법정 서기에게로 가서 무엇인가를 말한 뒤 
    다시 길머 씨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톰 로빈슨에게로 가서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무슨 말인가 속삭였다. 
    그리곤 의자에서 옷을 벗겨내 
    한쪽 어깨에 걸치고는 법정을 떠나갔다. 
    평소 이용하던 출구가 아닌 남쪽 출입구를 향해 재빨리 내달렸다. 
    집으로 가는 지름길을 원한 것이 틀림없었다. 
    내 시선이 아버지의 머리를 좇았지만 아버지는 올려다보지도 않았다.
    그때 누군가 나를 흔들었다. 
    나는 통로를 걸어내려가는 아버지의 쓸쓸한 영상으로부터 
    마지못해 눈길을 돌렸다.
    진 루이스 양, 
    나는 뒤돌아보았다. 그들이 서 있었다. 
    내 주위에 있던 사람들과 저쪽벽 발코니의 흑인들이 모두 일어나 있었다. 
    리버렌드 목사의 목소리가 테일러 판사의 목소리만큼이나 아득하게 들려왔다.
    일어나요, 진 루이스. 아버님이 나가고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