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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퍼 리 - 앵무새 죽이기 - 4. 부래들리와 떡갈나무 4.

Joyfule 2008. 12. 6. 04:56
      하퍼 리 - 앵무새 죽이기 -  4. 부래들리와 떡갈나무 4.  
    오빠는 배역을 정해주었다. 
    내가 맡은 래들리 부인 역은 현관에 나와 빗자루질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딜은 래들리 씨로, 오빠가 말을 시키면 
    마른기침을 하며 보도 위를 왔다갔다 하는 것이었다. 
    오빠는 자연히 부 래들리 역할을 맡았다. 
    그는 계단 아래로 기듯이 가며 가끔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소리를 길게 뽑으며 울부짖기도 했다.
    여름이 깊어가면서 우리의 놀이도 깊어갔다. 
    우리는 그 연극을 갈고 닦아 완성시켰다. 
    이 괴상한 연극을 꾸며내기까지 같은 말을 계속 되풀이하여 
    대화나 줄거리에 살을 붙여나가는 방식이었다.
    딜은 악인역할의 천재였다. 
    그는 어떤 역할이라도 잘 소화해냈다. 
    키 큰 사람 역할에선 실제로 키가 커 보이는 듯 연기했다. 
    그는 아무리 고약한 역이라도 열심히 했고. 
    그의 연기가 최고조로 달할 땐 진짜 괴기스러웠다. 
    나는 대본에 맞춰 마지못해 따라갔다. 
    그건 결코 타잔만큼도 재미있지 않았다. 
    오빠의 말대로 부는 이미 죽었고 낮에도 
    칼퍼니아 아줌마와 오빠가 함께 있고 밤에는 아버지가 집에 있기 때문에 
    부는 어떤 짓도 하지 못할 거라는 장담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잡을 수 없는 불안 속에서 연극을 하며 그해 여름을 보냈다.
    오빠는 타고난 재간꾼이었다. 
    그것은 이웃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나 뜬소문들을 짜맞춘, 짧지만 슬픈 드라마였다. 
    부 래들리 부인은 한때는 아름다웠으나 
    래들리 씨와 결혼하면서 재산을 전부 날려버렸다. 
    그 이빨과 머리칼까지 다 빠지고 집게 손가락마저도 잘라지고 말았다. 
    이 대목은 딜의 아이디어로, 
    부가 먹을 고양이나 다람쥐 등이 없을 때 물어뜯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거실에 앉아 부가 모든 가구를 조금씩 쏠아대는 동안 종일토록 우는 것이었다.
    우리 셋은 말썽을 피웠던 그 불량소년들의 역할도 해냈다. 
    나는 유언검인 재판관을 맡았고,
     딜은 오빠를 끌어내어 계단 아래 꿇어앉혀 놓고 긴 빗자루대로 찔렀다. 
    오빠는 필요에 따라 보안관, 유별난 마을사람, 
    그리고 래들리에 대해 누구보다 많은 이야기를 했던 
    스테파니 크러포드 아줌마 역을 번갈아가면서 했다.
    래들리 역할 중 중요한 대목에 이르자 오빠는 집으로 들어가 
    칼퍼니아 아줌마 몰래 재봉틀 서랍에서 가위를 꺼내왔다. 
    그리곤 그네에 앉아 신문을 오리고 있다가 딜이 지나가자 넓적다리를 찔렀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보면 진짜 찌르는 것 같았다. 
    언제나처럼 나단 래들리 씨가 우리 앞을 지날 때는 
    그가 우리를 수상히 여기지는 않을까 조바심하며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이런 우리의 놀이는 이웃사람들이 지나가면 중단되었다. 
    길 건너 머디 아줌마는 하던 일을 멈추고 꽃밭에서 우리를 바라다보았다.
    어느 날 우리가 (어느 가족의 이야기) 2막 25장을 연기하느라 
    부산을 떨고 있을 때 아버지가 길가에 서서 
    잡지를 말아 무릎을 치며 우리를 바라보고 계셨다. 
    우리는 그것도 모른 채 열심이었고 태양은 정오를 알려주듯 따갑게 내리쬐고 있었다.
    너희들 지금 무슨 놀이를 하고 있지?
    아무 것도 아니에요.
    오빠가 우물거렸다. 
    나는 오빠의 태도로 보아 이 놀이가 비밀이라는 것을 알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 가위는 어떻게 된 거냐? 
    신문은 왜 저렇게 오려놓고, 응? 오늘 신문이면 혼 좀 나야겠는데.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뭐가 아무 것도 아니냐?
    그냥 저 아무 것도 ,,, .
    그 가위 이리 다오. 가위를 갖고 놀 일은 없을 테니까. 
    너희들 혹시 래들리 집과 관련된 놀이를 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에요. 아빠.
    오빠가 얼굴을 붉혔다.
    그렇겠지.
    아버지는 짧게 말하곤 안으로 들어가셨다.
    형 ,,, .
    쉿, 아직 거실에 계셔. 거기선 말소리가 들려.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안전한 장소인 마당으로 나와서야
     딜은 연극놀이를 계속할 수 있을지에 대해 물었다.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아빤 하지 말라는 말씀은 안 하셨으니까.
    오빠, 아빠가 알고 계신 것 같아.
    아니야, 아빤 그렇다면 그렇다고 말씀하셔.
    그래도 나는 안심이 안 되었지만 
    오빠는 그것이 여자아이가 되어가는 증상이며 
    계집애들은 되지도 않는 공상을 해서 사람들을 귀찮게 한다며 말을 막았다. 
    그리곤 그런 식으로 행동한다면 놀이에 끼워주지 않겠다고 덧붙이는 것이었다.
    좋아, 그럼 다른 데 가서 함께 놀아줄 아이를 찾아봐.
    아버지의 갑작스런 출현은 오히려 내가 그 연극을 그만두려는 두 번째 이유였다. 
    진짜 이유는 내가 래들리 집 마당으로 굴러들어갔을 때 들려온 소리 때문이었다. 
    그 소린 내가 울렁거리는 속을 가라앉힌 후 오빠의 아우성과 함께 들려왔다. 
    멀리서 들려와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보도 쪽에서 난 소리 같지는 않았고, 
    누군가 집 안에서 웃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