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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헷세의 - 내 작은 삶의 이야기 後

Joyfule 2009. 11. 18. 10:45
      헤르만 헷세의 -  내 작은 삶의 이야기 2.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독일 국민 전체 모두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새로운 자각과 책임 의식을 통하여 내가 겪은 것과 마 찬가지로 
    어떻게 해서 사악한 전쟁과 시류(時流)에 휘말려 죄를 짓게 되었던가, 
    그리고 어떻게 그 죄를 속죄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을 제기하게 되었다. 
    이제 나는 인간이란 자신의 고 뇌와 죄과를 인정하고 끝까지 괴로와하면서 
    그 죄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나의 작품과 생활에 새로운 변화가 일기 시작하면서 
    상당수의 친구들이 고개를 저으며 멀어져 갔다.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나를 외 면하기도 했다. 
    그것은 매우 심각한 생활상의 변모를 요구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내가 하루하루의 삶에 작별을 고하고, 자신이 이러한 일에 견디어 나갈 수 있을까 하고 
    매일같이 놀라와 하면서도 살아가고 있는 고통과 환멸과 상실만을 가져다 주는 것 같은 
    이 비정상직인 생활 속에서도 또한 그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있었던 시절 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꼭 상기하고 싶은 것은 전쟁 중에도 나는 
    좋은 별, 즉 수호천사(守護天使) 같은 것이 나를 지켜주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고뇌 속에서 피로와하고 있을 때 
    자신의 운명을 항상 불행한 것으로 여기고 자학자조(自虐自助)하고 있을 때 
    나의 고 뇌와 그 고 뇌의 상태가 외계에 대한 
    수호역으로서 방패로서 나에게 도움이 되 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진정을 통해 정치니, 첩보니, 애수니, 홍정 이니 하는 
    그 무렵의 사회악의 한가운데서 나는 내 삶을 버티며 살 았던 것이다. 
    스위스의 수도인 베른, 그곳은 독일과 중립국과 적국과의 외교 중심지였으며, 
    하루밤 사이에 각국의 외교관이라든가, 정치상의 밀 사라든가, 
    스파이와 저널리스트 사람과, 모리배와 밀수군들로 이미 포화상태가 되어버린 도시였다. 
    그와 같은 도시에서 나는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늘 나는 감시당하고, 탐색당하고 때로는 적 국인들로부터, 중립국 사람들로부터 아니면, 
    자국인들로부터 의심을 받고 있었건만, 당사자인 나는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훨씬 뒤에서야 비로소 소문을 통해 알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렇다 할 만한 일없이 지나간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전쟁의 종말과 내 심경의 마무리와 시련의 고통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였다. 
    그 고통은 전쟁이나 세계의 운명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외국에 있던 우리들에게는 몇 년 전부터 예견되고 있었던 
    독일의 패망이라는 것도 그 당시에는 이미 놀라운 일이 못되었다. 
    나는 내 자신과 운명에 침잠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운명 전체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는 느낌을 자주 감지하기도 했다. 
    나는 이 세상의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살의(殺意)와 
    모든 경솔과 조잡한 침략욕과 비겁함을 나 자신 속에서 재발견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경멸심을 모두 상실했다. 
    그리하여 혼돈의 저쪽에서 다시금 자연과 순수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이 
    가끔 불타오르고 꺼지고 했지만, 또 다른 혼돈을 응시 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눈을 뜬 사람, 진실로 자각한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은 통과하는 
    이 좁은 길을 필연코 가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친한 친구들로부터 배반을 당하게 될 때면 
    비애를 느끼기도 했지만, 결코 불쾌해 하지는 않았다. 
    그러한 일은 오히려 나 자신의 길을 더욱 굳건히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겠끔 만들었다. 
    그들 측, 나의 오랜 벗들은 전에는 많은 것을 함께 공감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인간적인 사건들로부터 초월하는 문제들에 집착하고 있는 나의 자세나 
    나의 내면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것도 당연하게 여겼다.
    그 무렵의 나는 취미생활 같은 것에는 완전히 초월해 있었다. 
    또한 나의 말을 이해해 줄 만한 사람도 내 주위엔 없었던 것이다. 
    내가 구가(謳歌)하는 글이 아름다움과 조화를 잃고 있다고 우려하는 친구들의 맡은 지당했다. 
    그러나 그러한 비평이나 우려는 나로 하여금 실소케할 뿐이었다. 
    짧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또는 붕괴되는 벽 사이에 끼어 
    목숨만을 유지하려고 발버둥치는 삶을 살고 있는 인간에게 있어서 
    아름다움이나 조화 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마도 내 일생의 신조에 상반되게 시인이 아니었더라면 
    나의 생(生)의 끝은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미적(美的)인 행위는 모두 하나의 미망(述妄)에 불과 했던 것일까? 
    그런데 왜 그럴까 하는 의문조차도 나에게는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나 자신을 투시하는 지옥의 순례 같은 괴로운 도정(遍程)에서 
    눈을 돌린 것의 대부분은 하찮고 무가치한 것들이었다. 
    아마도 그러한 무분별은 내 자신의 천직이나 천분에 대한 오판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허영과 순진한 기쁨에 들뜬 나머지 
    일찍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간주했던 것도 이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의 사명, 사명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구원에의 길을 
    이미 오래 전부터 서정시(抒情詩)라든가 
    철학이라든가 하는 전문가의 이야기의 영역에서 찾지 않고 
    오로지 진정으로 살아 있는 힘차며 조그마한 것을 내 마음속에서 살리는 것에서, 
    마음속에 살아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사물에 대하여
     철저하고 성실하게 대하는 것에서 찾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이며 신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전쟁이 끝난 1919년 봄, 
    나는 스위스의 한적한 시골로 들어가 은둔자가 되었다. 
    그 곳에서도 나는 평생토록 가업(家業)이기도 한 
    인도와 중국의 지혜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나의 새로운 체험이 때로는 동방의 비유에 가득찬 말로써 표현되었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나를 '불교도'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나는 불교 신앙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나에 대한 그러한 별명 속에는 어떤 진실, 한 알의 진리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나는 나중에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 인간이 개인적으로 종교를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마음 속으로부터의 동경때문에 틀림없이 너무나 오래 되고 가득찬 
    즉, 공자(孔子)의 말씀을 쫓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우연히도 신앙 깊은 신교도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기질적으로도 신교도적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런데 존재보다도 생성(生成)을 보다 많이 긍정하도록 촉구한 점에서 본다면 
    불타(佛蛇: 석가모니)도 프로테스탄트적이 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시인으로서의 내 존재와 나의 문학 작품의 가치에 대한 신념은 
    이렇게 변화를 겪으면서 내면 세계에서 그 뿌리가 뽑히고 말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기쁨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인간이란 결국 기쁨을 찾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나 역시 그 어떠한 고통을 당하는 경우에도 그것을 요구하고 절실하게 원했던 것이다. 
    정의라든가, 이성이라든가, 생활과 세계에 있어서의 의미를 단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이렇듯 이 세상은 그러한 추상적인 것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깨닫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갑자기 나는 새로운 기쁨을 발견했다. 
    어느덧 나는 마흔 살이 되어 있었는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스스로 화가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화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림을 그린다는 작업은 기막히게 아름다운 일이었다. 
    그것은 사람을 즐겁게 하고 참을성 있게 만들었다. 
    그림을 그리고 나면 글을 쓴 뒤처럼 손가락이 시꺼멓게 되지 않고 은통 붉어지는 것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또다시 나를 비난한 것은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에게 현실 감각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짓는 시나, 내가 그리는 그림은 현실과 부합되지 않는다. 
    창작을 할 때 나는 흔히 교양 있는 독자가 정당한 저서에 대해서 
    요구하는 바를 망각해 버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실이란 별로 개의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현존하는 것들이 나에게는 까마득히 멀리 보이기 때문에 나는 대개의 경우 
    남들처럼 미래까지도 과거와 연관지어 이렇다 할 구별없이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나는 적지 않는 시간을 미래 속에서도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전기(傳記)도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어갈 삶을 통하여 끝없이 상정되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