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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7장 에바 부인 7.

Joyfule 2008. 11. 5. 01:23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7장 에바 부인 7.  
    ”그 꿈이 당신의 운명인 한에서는 
    당신은 그것에 대해 언제나 충실해야겠지요.” 
    그녀는 엄숙한 어조로 내 말을 보충해주었다. 
    비애가, 그리고 이 행복한 순간 속에 
    그대로 죽고 싶은 열렬한 소원이 나를 사로잡았다. 
    눈물이---
    얼마나 오랜 동안 나는 울지 않았던가! ---
    억누를 길 없이 흘러나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나는 성급히 얼굴을 그녀에게서 돌려 창가로 걸어가서는 
    눈물에 흐려져 보이지 않는 눈으로 화분의 꽃 너머 먼 곳을 바라보았다. 
    등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가장자리까지 가득 채워진 포도주잔처럼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싱클레어, 당신은 아직 어린애군요! 
    물론 당신의 운명은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당산이 충실한 대로 있다면 당신이 바라듯이 
    언젠가는 완전히 당신의 것이 되는 거예요.” 
    나는 간신히 자신을 억제한 뒤 다시 그녀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녀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겐 두서너 사람의 친구가 있어요.” 
    그녀는 미소를 띠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두서넛밖에 안 되는 극소수지만 지극히 가까운 사람들이랍니다. 
    그들은 나를 에바 부인이라고 부르지요. 
    당신도 원한다면 나를 그렇게 불러주세요.” 
    그녀는 나를 문가로 데리고 가서 문을 열고 정원을 가리켜 보였다.
     “바깥으로 나가 보면 막스가 있을 거예요.” 
    높다란 나무 아래에서 나는 충격을 받고 멍하니 서 있었다. 
    이제까지보다 한층 더 내가 눈을 뜨고 있는 것인지 
    또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빗방울이 나뭇가지에서 방울져 떨어져내렸다. 
    나는 천천히 강기슭을 따라 멀리까지 뻗어 있는 정원으로 걸어갔다. 
    마침내 데미안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웃옷을 벗은 채 정원의 정자 안에 매달아놓은 
    모래 주머니 앞에서 권투 연습을 하고 있었다. 
    깜짝 놀라 나는 발을 멈추었다. 
    데미안은 아주 멋있어 보였다. 
    널따란 가슴, 야무지고 남성적인 머리, 
    긴장된 근육으로 치켜든 두 팔은 강하고 단단해 보였고 
    근육의 움직임이 파문이 이는 샘물처럼
     허리와 어깨와 팔의 관절을 휘감고 있었다. 
    ”데미안!” 나는 그를 불렀다.
     “거기에서 뭘 하고 있나?” 
    그는 유쾌하게 웃었다. 
    ”연습을 하고 있다네. 
    난 그 조그만 일본인하고 씨름을 하기로 했거든. 
    그 사람은 고양이처럼 날쌔고 빈틈이 없단 말이야. 
    그러나 나를 그렇게 맘대로 다루지는 못할 거야. 
    그에게 빚진 아주 사소한 굴욕적인 일이 있었다네.” 
    그는 속옷과 웃옷을 걸쳤다. 
    ”벌써 우리 어머니를 만나뵈었나?” 
    ”그래 데미안, 자네 어머니는 정말 근사한 분이시더군! 
    에바 부인! 
    그 이름은 정말 완전히 그 분에게 어울리는 이름이야. 
    모든 존재의 어머니 같단 말이야.”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벌써 그 이름을 안단 말인가? 
    이봐, 그렇다면 자넨 자랑할 만하네. 
    어머니가 처음 만나서 이름을 가르쳐준 것은 자네가 처음이야.” 
    이날부터 나는 그 집에 아들이나 형제처럼 드나들었고 
    어떤 때는 사랑하는 사람처럼 방문하기도 했다. 
    현관을 들어서며 내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을 때면, 
    아니 멀리서 정원의 키큰 나무들이 나타나기만 해도 
    나는 흡족하고 행복한 마음이 되었다. 
    바깥에는 ‘현실’이 있었는데 현실 속에는 
    거리와 집, 사람과 시설, 도서관과 강의실 들이 있었다---
    그런데 여기 집안에는 사랑과 영혼이 있었고 
    전설과 꿈이 살아 숨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결코 세상과 단절되어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생각과 대화에서는 이 세상의 한복판에 살고 있었다. 
    우리는 단지 다른 영역에 속해 있었던 것이었고 
    다수의 사람들과 어떤 경계선으로 분리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보는 방식의 차이에 따라 분리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우리의 사명은 이 세계에 한 개의 섬을 보여주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