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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 삼포가는 길 4.

Joyfule 2010. 12. 30. 05:55

  황석영 - 삼포가는 길 4.  
"부탁 하나 합시다. 
가다가 스물 두엇쯤 되고 머리는 긴데다 
외눈 쌍까풀인 계집년을 만나면 캐어 봐서 좀 잡아오슈, 
내 현금으루 딱, 만 원 내리다." 
정씨가 빙그레 웃었다. 
영달이가 자신 있다는 듯이 기세 좋게 대답했다. 
"그럭허슈, 대신에 데려오면 꼭 만 원 내야 합니다." 
"암 내다뿐이요. 
예서 하룻밤 푹 묵었다 가시구려. "
"좋았어". 
그들은 일어났다. 
문을 열고 나오는 그들의 뒷덜미에다 대고 여자가 소리쳤다. 
"머리가 길구 외눈 쌍꺼풀이예요. 
잊지 마슈." 
해가 낮은 구름 속에 들어가 있어서 주위는 
누런 색안경을 통해서 내다본 것처럼 뿌옇게 보였다. 
바람 이 읍내의 신작로 한복판에서 회오리 기둥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들은 고개를 처박고 신작로를 따라 서 올라갔다. 
영달이가 담배 한 갑을 샀다. 
들판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날카롭게 들려 왔다. 
그들이 마을 외곽의 작은 다리를 건널 적에 
성긴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더니 허공에 차츰 흰색이 빡빡 해졌다. 
한 스무 채 남짓한 작은 마을을 지날 때쯤 해서는
큰 눈송이를 이룬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 려왔다. 
눈이 찰지어서 걷기에는 그리 불편하지 않았고 눈보라도 포근한 듯이 느껴졌다. 
그들의 모자나 머리카락과 눈썹에 내려앉은 눈 때문에 
두 사람은 갑자기 노인으로 변해 버렸다. 
도중에 그들은 옛 원 님의 송덕비를 세운 비각 앞에서 잠깐 쉬어 가기로 했다. 
그 앞에서 신작로가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던 것이다. 
함석판에 뼁끼로 쓴 이정표가 있긴 했으나, 
녹이 슬고 벗겨져 잘 알아볼 수도 없었다. 
그들은 비각 처마 밑에 웅크리고 앉아서 담배를 피웠다. 
정씨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탄했다. 
"야 그놈의 눈송이 탐스럽기도 하다. 풍년 들겠어." 
"눈 오는 모양을 보니, 근심 걱정이 싹 없어지는데." 
"첨엔 기분두 괜찮았지만, 
이렇게 오다가는 길 가기가 그리 쉽지 않겠는걸." 
"까짓 가는 데까지 가구 내일 또 갑시다." 
"저기 누가 오는군. "
흰 두루마기를 입고 중절모를 깊숙이 내려쓴 노인이 조심스럽게 걸어오고 있었다. 
노인의 모자챙과 접 힌 부분 위에 눈이 빙수처럼 쌓여 있었다. 
정씨가 일어나 꾸벅하면서 "영감님 길 좀 묻겠읍니다요." 
"물으슈." 
"월출 가는 길이 아랩니까, 저 윗길입니까?" 
"윗길이긴 하지만. 
재가 있어 놔서 아무래두 수월친 않을 거야, 아마 교통도 두절된 모양인데." 
"아랫길은요?" 
"거긴 월출 쪽은 아니지만 고을 셋을 지나면 감천이라구 나오지." 
영달이가 물었다. 
"감천에 철도가 닿습니까? "
"닿다마다." 
"그럼 감찬으루 가야겠구만." 
정씨가 인사를 하자 노인은 눈이 가득 쌓인 모자를 위로 들어 보였다. 
노인은 윗길 쪽으로 가다가 마을을 향해 꺾어졌다. 
영달이는 비각 처마 끝에 회색으로 퇴색한 채 매어져 있는 새끼줄을 끊어냈다. 
그 가 반으로 끊은 새끼줄을 정씨에게도 권했다. 
"감발 치구 갑시다." 
"견뎌 날까." 
새끼줄로 감발을 친 두 사람은 걸음에 한결 자신이 갔다. 
그들은 아랫길로 접어들었다. 
길은 차츰 좁아 졌으나, 소 달구지 한 대쯤 지날 만한 길은 그런 대로 계속되었다. 
길 옆은 개천과 자갈밭이었꼬 눈이 한 꺼풀 덮여 있었다. 
뒤를 돌아보면, 길 위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줄기차게 따라왔다. 
마을 하나를 지났다. 
그들은 눈 위로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 아이들과 개들 사이로 지나갔다. 
마을의 가 게 유리창마다 성에가 두껍게 덮여 있었고 
창 너머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두 번째 마을을 지 날 때엔 눈발이 차츰 걷혀 갔다. 
그들은 구멍가게에서 소주 한 병을 깠다. 
속이 화끈거렸다. 
털썩, 눈 떨어지는 소리만이 가끔씩 들리는 송림 사이를 지나는데, 
뒤에 처져서 걷던 영달이가 주첨 서 면서 말했다. 
"저것 좀 보슈." 
"뭘 말요?" 
"저쪽 소나무 아래." 
쭈그려 앉은 여자의 등이 보였다. 
붉은 코우트 자락을 위로 쳐들고 쭈그린 꼴이 
아마도 소변이 급해서 외진 곳을 찾은 모양이다. 
여자가 허연 궁둥이를 쳐둘고 속곳을 올리다가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오머머! "
여자가 재빨리 코우트 자락을 내리고 보퉁이를 집어 들면서 투덜거렸다. 
"개새끼들 뭘 보구 지랄야." 
영달이가 낄낄 웃었고, 정씨가 낮게 소곤거렸다. 
"외눈 쌍꺼풀인데 그래.어쩐지 예감이 이상하더라니." 
여자는 어딘가 불안했는지 그들에게로 다가오기를 꺼려하며 주춤주춤했다. 
영달이가 말했다. 
"잘 만났는데 백화 아가씨, 참샘에서 뺑소니치는 길이구만." 
"무슨 상관야, 내 발루 내가 가는데." 
"주인 아줌마가 댁을 만나면 잡아다 달라던데." 
여자가 태연하게 그들에게로 걸어 나왔다. 
"잡아가 보시지." 
백화의 얼굴은 화장을 하지 않았는데도 먼길을 걷느라고 발갛게 달아 있었다. 
정씨가 말했다. 
"그런 게 아니라. 행선지가 어디요? 이 친구 말은 농담이구." 
여자는 소변 보다가 남자들 눈에 띄인 일보다는 
영달이의 거친 말솜씨에 몹시 토라져 있었다. 
백화가 걸음을 빨리하며 내쏘았다. 
"제따위들이 뭐라구 잡아가구 말구야. 뜨내기 주제에." 
"그래 우리두 너 같은 뜨내기 신세다. 
찬샘에 잡아다 주고 여비라두 뜯어 써야겠어." 
영달이가 여자의 뒤를 바싹 쫓아가며 농담이 아님을 재차 강조했다. 
여자가 휙 돌아서더니, 믿을 수 없 을 만큼 
재빠르게 영달이의 앞가슴을 밀어냈다. 
영달이는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눈 위에 궁둥방아를 찧고 나가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