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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 삼포가는 길 5.

Joyfule 2010. 12. 31. 14:37

  황석영 - 삼포가는 길 5.  
백화가 한 팔은 보퉁이를 끼고, 
다른 쪽은 허리에 척 얹고 서서 영달이를 내려다보 았다. 
"이거 왜 이래? 나 백화는 이래봬도 인천 노랑집에다, 
대구 자갈마당, 포항 중앙대학, 진해 칠구, 모두 겪은 년이라구. 
조용히 시골 읍에서 수양하던 참인데. 
야아, 내 배 위로 남자들 사단 병력이 지나갔어. 
국으로 가만있다가 조용한 데 가서 한 코 달라면 몰라두 
치사하게 뚱보 돈 먹자구 나한테 공갈 때리면 너 죽구 나 죽는 거야."
영달이는 입을 벌린 채 일어설 줄을 모르고 백화의 일장 연설을 듣고 있었다. 
정씨는 웃음을 참느라고 자꾸만 송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영달이가 멋적게 궁둥이를 털면서 일어났다. 
"우리두 의리가 있는 사람들이다. 
치사하다면, 그런 짓 안해." 
세 사람은 나란히 눈 쌓인 길을 걸었다. 
백화가 말했다. 
"그럼 반말 놓지 말라구요." 
영달이는 입맛을 쩍쩍 다셨고, 정씨가 물었다. 
"어디까지 가오?" 
"집에요." 
"집이 어딘데." 
"저 남쪽이예요." 
"떠난 지 한 삼 년 됐어요." 
영달이가 말했다. 
"얘네들은 긴밤 자다가두 툭하면 내일 당장에라두 집에 갈 것처럼 말해요. "
백화는 아까와 같은 적의는 나타내지 않았다. 
백화는 귀 옆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자꾸 쓰다듬어 올리면서 
피곤한 표정으로 영달이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래요. 밤마다 내일 아침엔 고향으로 출발하리라 작정하죠. 
그런데 마음뿐이지, 몇 년이 흘러요. 
막상 작정하고 나서 집을 향해 가보는 적두 있어요. 
나두 꼭 두 번 고향 근처까지 가 봤던 적이 있어요. 
한 번은 동네 어른을 먼발치서 봤어요, 
나 이름이 백화지만 가명이예요.
본명은.아무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아."
정씨가 말했다. 
"서울 식당 사람들이 월출역으루 지키러 가던데." 
"이런 일이 한두 번인가요 머. 
벌써 그럴 줄 알구 감천 가는 길루 왔지요.
촌놈들이니까 그렇지, 빠른 사람들은 서너 군데 길목을 딱 막아 놓아요. 
나 그 사람들께 손해 끼친 거 하나두 없어요. 
빚이래야 그 치들이 빨아먹은 나머지구요. 
아유, 인젠 술하구 밤이라면 지긋지긋해요. 
밑이 쭉 빠져 버렸어. 어디 가서 여승이나 됐으면. 
냉수에 목욕재계 백 일이면 나두 백화가 아니라구요, 씨팔." 
걸을수록 백화는 말이 많아졌고, 걸음은 자꾸 쳐졌다. 
백화는 여러 도시에서 한창 날리던 시절이 얘기 를 늘어놓았다. 
여자가 결론지은 얘기는 결국 화류계의 사랑이란 
돈 놓고 돈 먹기 외에는 모두 사기라 는 것이었다. 
그 여자는 자기 보퉁이를 꾹꾹 찌르면서 말했다. 
"아저씨네는 뭘 갖구 다녀요? 망치나 톱이겠지 머. 
요 속에는 헌 속치마 몇 벌, 빤스, 화장품, 그런 게 들었지요. 
속치마 꼴을 보면 내 신세하구 똑같아요. 
하두 빨아서 빛이 바래구 재봉실이 나들나들하게 닳아 끊어졌어요." 
백화는 이제 겨우 스물 두 살이었지만 열 여덟에 가출해서, 
쓰리게 당한 일이 많기 때문에 삼십이 훨 씬 넘은 여자처럼 조로해 있었다. 
한 마디로 관록이 붙은 갈보였다. 
백화는 소매가 헤진 헌 코우트에다 무릎이 튀어나온 바지를 입었고, 
물에 불은 오징어처럼 되어 버린 낡은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비탈길을 걸을 때, 영달이와 정씨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양쪽에서 잡아 주어야 했다. 
영달이가 투덜거렸다. 
"고무신이라두 하나 사 신어야겠어. 
댁에 때문에 우리가 형편없이 지체 되잖나." 
"정 그러시면 두 분이서 먼저 가면 될 거 아녜요. 
내가 고무신 살 돈이 어딨어?" 
"우리두 의리가 있다구 그랬잖어. 
산 속에다 여자를 떼놓구 갈 수야 없지. 
그런데. 한 푼두 없단 말야?" 
백화가 깔깔대며 웃었다. 
"여자 밑천이라면 거기만 있으면 됐지, 무슨 돈이 필요해요?" 
"저러니 언제 한 번 온전한 살림 살겠나 말야!" 
"이거 봐요. 댁에 같은 훤칠한 내 신랑감들은 
제 입에 풀칠두 못해서 떠돌아다니는데, 
내가 어떻게 살림을 살겠냐구". 
영달이는 백화의 입담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세 사람은 감천 가는 도중에 있는 마지막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 어귀의 얼어붙은 개천 위로 
물오리들이 종종걸음을 치거나 주위를 선회하고 있었다. 
마을의 골 목길은 조용했고, 
굴뚝에서 매캐한 청솔 연기 냄새가 돌담을 휩싸고 있었는데 
나직한 창호지의 들창 안 에서는 
사람들의 따뜻한 말소리들이 불투명하게 들려 왔다. 
영달이가 정씨에게 제의했다. 
"허기가 져서 떨려요. 
감천엔 어차피 밤에 떨어질 텐데, 여기서 뭣 좀 얻어먹구 갑시다." 
"여긴 바닥이 작아 주막이나 가게두 없는 거 같군." 
"어디 아무 집이나 찾아가서 사정을 해보죠." 
백화도 두 손을 코우트 주머니에 찌르고 간신히 발을 떼면서 말했다. 
"온몸이 얼었어요. 
밥은 고사하고, 뜨뜻한 아랫목에서 발이나 녹이구 갔으면." 
정씨가 두 사람을 재촉했다. 
"얼른 지나가? 여기서 지체하면 하룻밤 자게 될 테니," 
"감천엘 가면 하숙두 있구, 우리를 태울 기차두 있단 말요." 
그들은 이 적막한 산골 마을을 지나갔다. 
눈 덮인 들판 위로 물오리 떼가 내려앉았다가는 날아오르곤 했다. 
길가에 퇴락한 초가 한 간이 보였다. 
지붕의 한 쪽은 허물어져 입을 벌렸고 토담도 반쯤 무너졌다. 
누군가가 살다가 먼 곳으로 떠나간 폐가임이 분명했다. 
영달이가 폐가 안을 기웃해 보며 말했다. 
저기서 신발이라두 말리구 갑시다. 
백화가 먼저 그 집의 눈 쌓인 마당으로 절뚝이며 들어섰다. 
안방과 건넌방의 구들장은 모두 주저앉았으나 
봉당은 매끈하고 딴딴한 흙바닥이 그런 대로 쉬어 가기에 알맞았다. 
정씨도 그들을 따라 처마 밑에 가서 엉거주춤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