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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 삼포가는 길 2.

Joyfule 2010. 12. 28. 12:41

  황석영 - 삼포가는 길 2.  
그가 둑 위로 올라서더니 배낭을 다른 편 어깨 위로 바꾸어 매고는 
다시 하반신부터 차례로 개털 모자 끝까지 둑 너머로 사라졌다. 
영달이는 어 디로 향하겠다는 별 뾰죽한 생각도 나지 않았고, 
동행도 없이 길을 갈 일이 아득했다. 
가다가 도중에 헤 어지게 되더라도 우선은 말동무라도 있었으면 싶었다. 
그는 멍청히 섰다가 잰걸음으로 사내의 뒤를 따 랐다. 
영달이는 둑 위로 뛰어올라 갔다. 
사내의 걸음이 무척 빨라서 벌써 차도로 나가는 샛길에 접어들 어 있었다. 
차도 양쪽에 대빗자루를 거꾸로 박아 놓은 듯한 
앙상한 포플라들이 줄을 지어 섰는 게 보였 다. 
그는 둑 아래로 달려 내려가며 사내를 불렀다. 
여보쇼, 노형! 그가 멈춰 서더니 뒤를 돌아보고 나서 다시 천천히 걸어갔다. 
영달이는 달려가서 그 뒤편에 따라붙어 헐떡이면서 같이 갑시다, 
나두 월출리까진 같은 방향인데. 했는데도 그는 대답이 없었다. 
영달이는 그의 뒤통수에다 대고 말했다. 
"젠장, 이런 겨울은 처음이오. 
작년 이맘 때는 좋았지요. 
월 삼천 원짜리 방에서 작부랑 살림을 했으니까. 
엄동설한에 정말 갈데 없이 빳빳하게 됐는데요. 
우린 습관이 되어 놔서. "
사내가 말했다. 
"삼포가 여기서 몇 린 줄 아쇼? 좌우간 바닷가까지만도 몇 백리 길이요. 
거기서 또 배를 타야 해요." 
"몇 년 만입니까? "
"십 년이 넘었지. 가 봤자.아는 이두 없을 거요." 
"그럼 뭣하러 가쇼? "
"그냥.나이 드니까, 가보구 싶어서." 
그들은 차도로 들어섰다. 
자갈과 진흙으로 다져진 길이 그런 대로 걷기에 편했다. 
영달이는 시린 손을 잠바 호주머니에 처박고 연방 꼼지락거렸다. 
"어이 육실허게는 춥네. 
바람만 안 불면 좀 낫겠는데." 
사내는 별로 추위를 타지 않았는데,
털모자와 야전 잠바로 단단히 무장한 탓도 있겠지만 원체가 혈색이 건강해 보였다. 
사내가 처음으로 다정하게 영달이에게 물었다. 
"어떻게 아침은 자셨소?" 
"웬걸요." 
영달이가 열적게 웃었다. 
"새벽에 몸만 간신히 빠져나온 셈인데. 
나두 못 먹었소. 
찬샘까진 가야 밥술이라두 먹게 될 거요. 
진작에 떴을 걸.이젠 겨울에 움직일 생각이 안 납디다. 
인사 늦었네요. 
나 노영달이라구 합니다." 
"나는 정가요." 
"우리두 기술이 좀 있어 놔서 일자리만 잡으면 별 걱정 없지요." 
영달이가 정씨에게 빌붙지 않을 뜻을 비췄다. 
"알고 있소, 착암기 잡지 않았소? 
우리넨, 목공에 용접에 구두까지 수선할 줄 압니다." 
"야 되게 많네.정말 든든하시겠구만." 
"십 년이 넘었다니까." 
"그래도 어디서 그런 걸 배웁니까? "
"다 좋은 데서 가르치고 내보내는 집이 있지." 
"나두 그런데나 들어갔으면 좋겠네." 
정씨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이라두 쉽지. 하지만 집이 워낙에 커서 말요. 
큰집." 
하다 말고 영달이는 정씨의 얼굴을 쳐다봤다. 
정씨는 고개를 밑으로 숙인 채 묵묵히 걷고 있었다. 
언덕 을 넘어섰다. 
길이 내리막이 되면서 강변을 따라서 먼 산을 돌아 나간 모양이 아득하게 보였다. 
인가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 황량한 들판이었다. 
마른 갈대밭이 헝클어진 채 휘청대고 있었고 
강 건너 곳곳에 모래 바람이 일어나는 게 보였다. 
정씨가 말했다. 
"저 산을 넘어야 찬샘골인데.강을 질러가는 게 빠르겠군." 
"단단히 얼었을까." 
강물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얼음이 녹았다가 다시 얼곤 해서 우툴두툴한 표면이 그리 미끄럽지는 않았다. 
바람이 불어, 깨어진 살얼음 조각들을 날려 그들의 얼굴을 따갑게 때렸다. 
"차라리, 저쪽 다릿목에서 버스나 기다릴 걸 잘못했나 봐요." 
숨을 헉헉 들이키던 영달이가 투덜대자 정씨가 말했다. 
"자주 끊겨서 언제 올지도 모르오. 
그보다두 현금을 아껴야지.굶어두 돈 있으면 든든하니까." 
"하긴 그래요." 
"월출 가면 남행 열차를 탈 수는 있소." 
"거기서 기차 탈려오?" 
"뭐.돼가는대루." 
"그런데 삼포는 어느 쪽입니까? "
정씨가 막연하게 남쪽 방향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남쪽 끝이오." 
"사람이 많이 사나요, 삼포라는 데는? "
"한 열 집 살까? 정말 아름다운 섬이오.
비옥한 땅은 남아 돌아가구, 고기두 얼마든지 잡을 수 있구 말 이지."
영달이가 얼음 위로 미끄럼을 지치면서 말했다. 
"야아 그럼, 거기 가서 아주 말뚝을 박구 살아 버렸으면 좋겠네." 
"조오치, 하지만 댁은 안될 걸." 
"어째서요." 
"타관 사람이니까." 
그들은 얼어붙은 강을 건넜다. 
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눈이 올 거 같군. 
길 가기 힘들어지겠소." 
정씨가 회색으로 흐려 가는 하늘을 걱정스럽게 올려다보았다. 
산등성이로 올라서자 아래쪽에 작은 마을의 집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는 게 한 눈에 들어왔다. 
가물거리는 지붕 위로 간신히 알아볼 만큼 
가느 다란 연기가 엷게 퍼져 흐르고 있었다. 
교회의 종탑도 보였고 학교 운동장도 보였다. 
기다란 철책과 철 조망이 연이어져 마을 뒤의 온 들판을 둘러싸고 있는 것도 보였다. 
군대의 주둔지인 듯했는데, 
마을은 마치 그 철책의 끝에 간신히 매어 달려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