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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사랑 - 막스뮐러 14

Joyfule 2010. 8. 25. 11:13
 

   
독일인의 사랑 -  막스뮐러 14  
일곱째 회상  
친구와 손을 잡고 티롤 지방의 산과 계곡을 산책한다면, 
우리는 거기서 생의 활력소를 듬뿍 마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똑같은 길이라 해도 외로이 상념에 젖어 
혼자 헤맨다는 것은 무슨 부질없는 시간 낭비인가!
저 푸른 산과 어두운 계곡, 
푸른 계곡과 세찬 폭포가 내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내게는 그것들을 완상할 여유가 없다.   
오히려 그것들이 나를 보며 외로운 내 모습을 의아스럽게 여기는 것만 같다.   
온 세상에 내 곁에 있기를 원하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게 가슴을 조여 온다.
이러한 생각과 더불어 나는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났고,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노래처럼 그 생각들은 온종일 나를 쫓아다녔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여관에 들어서 지친 몸을 털썩 주저앉히면, 
방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모아지며 
외로운 방랑자의 행색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럼 나는 혼자가 되고 싶어 다시 아무도 없는 어둠속으로 나갔다가
밤이 이슥해서야 살그머니 돌아와 
몰래 내 방으로 기어올라가 후덥지근한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는 슈베르트의 가곡 <네가 없는 곳에 행복이 있네>를 
마음속으로 줄곧 되뇌다가 어느 새 잠이 들곤 했다.
어디를 가도 부딪치는 것은 
찬란한 자연을 즐기며 환호하고 웃어 대는 무리들이었다.   
이런 무리들에 부딪치는 것이 아무래도 참을 수가 없어,
마침내 나는 낮에 잠을 자고, 밝은 달밤을 타서 이리저리 헤매는 쪽을 택했다.   
그럴 때면 최소한 나의 괴로운 상념을 몰아내고 
생각을 다른 데로 돌리게 하는 한 가지 느낌이 찾아왔으니, 그것은 공포감이었다.
누구든 한 번 길도 모르는 산 속을 밤새도곡 혼자 헤매어 보라.   
그럼 우리의 눈은 비상하게 민감해지고,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먼 곳의 형체까지 우리의 시야에 들어온다.   
우리의 귀는 벙적으로 긴장하여
어디서 들려 오는지도 모를 잡다한 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발은 바위새에 불거져 나온 나무 뿌리에 채이거나 
폭포의 비말로 적셔진 미끄러운 길에 곤두박질치게 된다 - 
그리고 가슴에 남아 있는 것은 위안받을 길 없는 황량함뿐, 
우리를 따스히 해 줄 기억도, 매달릴 희망도 없다.   
한 번 그런 등산을 시도해 보라.   
그러면 당신은 차가운 밤의 전율을 안팎으로 느낄 것이다.
인간의 마음에 생겨나는 최초의 공포는 신에게서 버림받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생활은 그 공포를 몰아낸다.   
바로 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들이 
외로움에 빠진 우리를 위로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위로와 사랑마저 떠나가면, 
우리는 실로 신과 인간 모두에게서 버림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절감하게 된다.
그때에는 자연조차 우리를 위로하지 않는다.   
자연은 그 말없는 시선으로 우리를 공포로 몰아넣는 것이다.   
그렇다, 아무리 단단한 바위를 확고하게 디디고 섰어도, 
그 바위는 우리에게 그것이 생성되기 전 태고의 모습으로, 
바다 속 먼지로 되돌아갈 것처럼 여진다.   
우리의 눈이 빛을 찾는데, 마침 전나무 숲 뒤도 떠오른 달이 
환한 암벽에다 뾰족뾰족한 나무 그림자들을 던져 준다.   
그러면 그 달은 우리에게 한때 태엽을 감아 주었는데 
멈춰 버린 시계의 죽은 바늘처럼 보이는 것이다.   
별들조차, 광활한 하늘조차, 
외로이 버림받아 떨고 있는 한 영혼에게 안식처는 주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생각이 우리에게 때로는 위안을 준다 - 
그것은 자연의 필연성, 무한성, 질서, 그리고 그 의연함이다.
여기, 폭포가 잿빛 바위 양편으로 검푸른 이끼로 뒤덮어 놓은 곳, 
그 서늘한 그늘 속에서 우리의 눈은 모두 한송이 물망초를 발견한다.
그것은 모든 갯가에, 지상의 모든 초원에 피어 있는, 
천지창조의 아침이래 끊임없이 만발하며 이 땅 위에 뿌려졌던 
수백만 자매 꽃들 중의 한송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꽃잎의 섬세한 줄기들, 꽃받침에 모인 꽃가루, 
뿌리에 뻗은 섬유질의 한 올 한 올은 한결같이 헤아려져 정해진 수치이니, 
지상의 어떤 힘도 그것을 늘이지도 줄이지도 못하는 법이다.
우리의 둔한 눈을 예리하게 모아 초인적인 힘을 갖고 
자연의 비밀속에 보다 깊은 시선을 던져 보라.   
이 현미경이 씨앗과 꽃봉오리와 꽃의 소리 없는 공장들을 열어 보이면, 
그 섬세하기 이를 데 없는 조직과 세포 안에서 우리는 무한히 반복되는 형태를, 
섬세한 섬유질 안에서 자연의 설계의 영원한 불가변성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보다도 더 깊이 투시할 수 있다면, 
우리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이처럼 동일한 형태의 세계가 다가와, 
우리는 마치 거울로 둘러싸인 요지경 속에 들어선 듯 
그 무한성에 갈피를 잡지 못하리라.   
이 작은 꽃송이 안에 이토록 무한한 세계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창공을 보라.   
거기에도 영원한 질서가 자리잡고 있지 않은가.   
위성은 유성의 주위를, 유성은 항성의 주위를, 
항성은 또 다른 항성의 주위를 맴돈다.   
한층 예리한 시선에는 저 아득한 성운까지도 아름다운 신세계로 열릴 것이다.   
그리고 생각해 보라.   
저 장엄한 별들이 부침하며 이룩하는 역사를, 
별들의 운행은 사계절을 낳고, 물망초의 씨앗을 거듭거듭 싹트게 하며, 
세포가 열려 꽃잎이 돋아나게 하고, 
마침내 초원의 양탄자를 꽃으로 장식하게 하는 것이다.
푸른 꽃받침 속에서 요람을 타고 있는 딱정벌레를 보라.   
그것들이 생명체로 깨어나며 현존을 누리고 생명의 호흡을 하는 것은, 
꽃의 조직이나 생명 없는 천체의 기구보다 더욱 경이로운 사실이다.   
너 역시 이와 같은 영원한 총체 속에 속해 있음을 느껴 보라.   
그러면 너와 더불어 지구를 타고 돌아가며 너와 함께 살다가 시들어 가는 
저 무한한 피조물들로 해서 위로를 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러나 가장 하찮은 것에서 가장 위대한 것까지, 
지혜와 힘을 지니고, 생성의 기적과 기적의 현존을 모두 포괄하고 있는 이 총체란, 
결국 저 어느 한 존재의 작품이 아니겠느냐.   
그 존재란 네 영혼이 무서워 뒷걸음치는 존재가 아니라, 
그 앞에서 너의 나약함과 무상함을 느끼고 꿇어 엎디며, 
그의 사랑과 자비심을 느껴 다시금 그를 향해 네가 일어서는 그런 존재이다.   
꽃의 세포나 별의 세계, 딱정벌레의 생성보다 
더 무한하고 영원한 무엇이 네 안에 있음을 느낀다면 - 
마치 그림자 같은 너의 내부에 영원한 분의 광채가 두루 비침을 인식한다면 - 
너의 내면과 너의 발밑, 그리고 머리 위에서 반영에 불과한 너를 존재로 만들며, 
너의 불안을 평안으로, 너의 고독을 보편으로 화하게 하는 
실재자의 편재를 느낀다면, 그때에는 너는 알게 되리라 -  
창조주 아버지시여,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시며, 
땅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내게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라고 
생의 어두운 밤 속에서 네가 부르는 대상이 누구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