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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사랑 - 막스뮐러 16

Joyfule 2010. 8. 27. 12:20
 

   
독일인의 사랑 -  막스뮐러 16  
일곱째 회상  
이렇게 갈수록 참담한 기분에 빠져드는데, 
갑자기 나직한 발소리가 나서 나를 멍한 꿈에서 깨워 주었다.   
영국 부인이 계단을 내려와 나를 한 방으로 안내했다.   
나는 혹시나 이 부인이 내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눈치채고 있지 않나 싶어 살피듯 그녀를 눈여겨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다.   
눈꼽만치도 관심을 드러내거나 의아해하는 기색이 없이 차분한 어조로,
영양께서는 오늘 한결 상태가 나아지셔서 
반시간 뒤에 나를 만나고자 하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훌륭한 수영 선수는 바다 멀리까지 헤엄쳐 나가기를 겁내지 않는다.  
그는 팔에 점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낄 때야 비로소 되돌아갈 생각을 한다.   
그리고는 아득히 먼 곳의 해안에는 
감히 시선을 던지지 못하고 허겁지겁 파도를 가른다.   
그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리고는 마침내 맹목으로 허위적거리며 
자신의 처지를 거의 의실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   
이때 갑자기 그의 발이 땅에 닿고 
그의 팔은 해변의 아무 바위나 움켜잡게 되는 것이다.
부인의 말을 들었을 때 내 기분이 바로 그러했다.   
새로운 현실이 나를 맞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번뇌는 한 가닥 꿈이었다.   
이같은 순간이란 인간의 생에서 극히 드문 법이다.   
수많은 이들이 이같은 환희를 모르고 죽어 간다.   
하지만 자식을 처음으로 품에 안는 어머니,
공을 세우고 전쟁터에서 돌아오는 외아들을 맞는 아버지, 
자기 나라 국민의 갈채를 받는 시인, 
사랑하는 애인에게 뜨거운 손을 내밀었을때 뜨거운 응답의 악수를 받는 청년, 
이들은 꿈이 현실로 화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것이다.
반시간이 흘렀다.   
그러자 한 하인이 와서 나를 이끌고 수많은 방들을 지나 한 방문을 열었다.   
저녁의 어스름한 빛 속에 하얀 자태가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 위로 난 높은 창문으로는 호수와 노을진 산들이 보였다.
참 기이한 만남이지요 라고 그녀의 맑은 목소리가 내게 울려 왔다.  
그 한마디 한마디는 무더운 여름 땡볕 뒤의 시원한 빗방울 같았다. 
기이한 만남이 있는가 하면 기이한 상실도 있지요 
라고 나는 말하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 우리는 다시 만나 함께 있음이 온몸으로 느껴져 왔다.
그렇지만 서로를 상실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탓이랍니다 라고 그녀가 말을 이었다.   
여전히 멜로디처럼 말을 반주하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는
부지중에 한결 부드러운 어조로 바뀌었다.
그래요. 그건 그렇습니다.  
먼저 몸이 어떤지를 얘기해 주십시오.  
내가 이렇게 앉아 얘기를 나누어도 괜찮은 건가요? 하고 나는 물었다.
사랑하는 친구여 하고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도 아다시피 나는 늘 아프답니다.  
내가 좀 기분이 낫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저 의사 선생님을 위해서예요.   
사실 그분은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 
오로지 자신과 자신의 의술 때문이라고 확신하고 계시거든요.   
이번에 저 수도에 있는 성을 떠나기 전에 
나는 그분을 정말 깜짝 놀라게 해 드렸어요.   
어느 날 저녁인가 내 심장의 고동이 멎어 버렸거든요.   
이제 다시는 심장이 희생하지 못할 거라고 여길 만큼 나 자신도 무척 겁이 났었어요.   
어쨋든 이건 지나간 얘기죠. 
뭣 때문에 이런 얘기를 할 필요가 있겠어요?   
다만 한 가지 내 마음을 우울하게 하는 것이 있어요.   
나는 항상 언제이고 평화로이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나의 병고가 이승과의 하직마저 아주 힘들게 할 것 같은 느낌이에요. 
그녀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당신은 어디에 가셨였지요?   
얘기 좀 해 주세요.   
어째서 그렇게 소식을 끊으셨나요?   
그 늙은 의사 선생님은 당신의 갑작스런 여행에 대해 
이런 저런 이유를 늘어놓으셨어요.   
그래서 나는 결국 그분에게 당신 말을 못 믿겠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나중에는 가장 믿을 수 없는 이유를 털어놓이시지 않겠어요?   
무슨 이유였는지 맞춰 보세요. 
그 이유는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요. 
나는 그녀가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게 하려고 얼른 말을 가로챘다.    
그렇지만 그 이유는 진실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다 지나간 얘기입니다. 이제 와서 왜 이런 얘기를 해야 되지요? 
그렇지 않아요.   어째서 그것이 지나간 얘기인가요?   
그 의사 선생님이 당신의 돌연한 여행의 궁극적 이유를 말해 줬을 때, 
나는 그분더러 당신들 둘 다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어요.   
나는 병들고 외로운 여인이에요.   
그러니까 지상에서의 나의 삶이란 서서히 죽어 가고 있는 것에 불과해요.   
그런 내게 만약 하늘이, 나를 이해하는, 
아니면 그 의사 선생님 말대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몇 보내셨다면, 
왜 굳이 그 관계가 나와 그들의 평화를 깨뜨려야 하는 걸까요?   
의사 선생님이 그같은 고백을 털어놓았을때, 
마침 내가 좋아하는 늙은 시인 워즈워드를 읽고 있던 참이었지요.   
그래서 의사 선생님께 이렇게 말했어요.
 <선생님, 우리는 너무나 많은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 
표현할 말을 조금밖에 갖고 있지 못해요.   
그러니까 한마디 한마디에도 수많은 생각을 쑤셔 넣지 않을 수 없지요.  
혹시 우리를 모르는 사람이 그 젊은 우리의 친구가 바로 나를 사랑한다는, 
아니면 내가 그를 사랑한다는 소리를 듣는다고 쳐 보세요.   
그 사람들은 얼른 로미오가 줄리엣을, 
또 줄리엣이 로미오를 사랑하는 것 같은 그런 사랑을 연상할 거예요.   
그렇다면 선생님이 저보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신 말씀은 지당한 얘기가 되겠지요.   
그렇지만 선생님, 선생님도 저를 사랑해 주시고, 
저도 선생님을 사랑하고 있지 않아요?   
벌써 오래 전부터 저는 선생님을 사랑하면서도 
아마 한번도 그런 얘기를 털어놓은 적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는 절망하거나 불행했던 적은 한번도 없어요.
그래요, 선생님, 좀더 얘기를 해야겠어요.   
선생님께서는 제게 대해 불행한 사랑을 느끼고 계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그 젊은 친구를 질투하고 계신 거랍니다.   
선생님께서는 나의 상태가 아주 좋은 것을 알면서도 
매일 아침 어김없이 오셔서 어떠냐고 묻곤 하시지요?   
선생님집 정원의 가장 예쁜 꽃도 가져오시구요.   
내 사진도 달라고 하셨지요?  
그러고 - 어쩌면 이 말은 안하는 게 옳을는지 모르지만 - 
지난번 일요일에는 내 방에 들어오셔서 내가 잠든 줄로 생각하셨었지요?   
나는 정말 잠들었어요. 최소한 꼼짝도 할 수가 없었을 거예요.   
그렇지만 저는 보았어요.   
선생님께서 내 침대 곁에 앉아 꼼짝없이 나를 응시하셨던 것을요.   
그때 나는 선생님의 그 눈빛을 내 얼굴에 닿아 어른거리는 햇빛처럼 느꼈었지요.  
그런데 급기야 선생님 눈빛이 흐려졌어요.   
그리고 나는 그 눈에서 눈물 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지요.   
선생님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큰 소리로 흐느끼며, 
마리아, 마리아!하고 부르셨어요.   
아, 선생님, 우리의 그 젊은 친구는 내게 그런 적이 없어요.   
그런데도 선생님은 그를 멀리 보내셨단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