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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사랑 - 막스뮐러 15

Joyfule 2010. 8. 26. 12:10
 

   
독일인의 사랑 -  막스뮐러 15  
일곱째 회상  
그때에는 네 마음속과 주변이 밝아지고 
새벽의 어둠이 차가운 안개와 더불어 걷히며, 
새로운 따스함이 진동하는 자연 속을 관류할 것이다.  
너는 다시는 놓지 않을 하나의 손길을 찾아낸 것이다.   
그 손은 산이 흔들리고 달과 별이 다라져도 너를 지켜 줄 것이다 - 
네가 어디에 있거나 너는 그분 곁에 있으며, 그분 역시 네 곁에 계신다.   
그분은 영원히 가까이 계시는 분,
꽃과 가시를 포함한 이 세계의 주인이시며, 
슬픔과 고뇌를 뭉뚱그려 인간의 주인이시다.    
신의 뜻이 아니면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네게 일어나지 않느니라.  
이러한 상념에 매달리며 나는 계속 헤매었다.   
순간순간 나의 마음은 밝게 개었다 어두워지곤 했다.   
우리가 비록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안식과 평안을 찾았다 해도
이 성스러운 은둔의 생활에 고요히 머문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렇다, 우리는 안식과 평안을 발견한 뒤에도 
곧잘 많은 부분을 다시 망각하며 안식과 평안으로 되돌아갈 길을
알지 못할 때가 자주 있는 법이다.
수 주일이 흘렀다.  
그녀로부터는 한 줄의 소식도 없었다.    
어쩌면 그녀는 이미 영원한 안식을 찾아갔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내 입가에 뱅뱅 돌며 아무리 떨치려 해도
다시 돌아오는 또 다른 노래였다.   
그건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의사의 말로는 그녀는 심장병을 앓고 있으며,
자기도 매일 아침 그녀에게 갈 때마다 이미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수도 있다는 각오를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녀와 작별 인사도 못하고, 
그녀를 사랑한다는 말을 끝내 하지 못하고 만약 그녀가 세상을 떠나 버린다면 - 
그런 나를 스스로 용납할 수 있을까?   
그녀를 뒤  쫓아가, 저승에서라도 그녀를 다시 만나
그녀도 나를 사랑하고 있으며 
나를 용서한다는 말을 듣지 않고 배겨날 수 있을까?   
아, 인간은 왜 이다지도 삶을 유희하는 것일까.   
매일매일이 마지막 날일 수도 있으며, 
잃어버린 시간은 곧 영원의 상실임을 생각하지 않고, 
왜 이렇듯 자신이 행할 수 있는 최선의 것과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움을 하루하루 미룬단 말인가.
그러자 내가 마지막 만났을 때 의사가 하던 말이 생생하게 떠올랐고,
나의 돌연한 여행의 결심은 단지 의사에게 
내가 강하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것이었음을 - 
머물러서 그에게 나의 나약함을 고백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임을 깨달았다.
이제 분명해졌다.   
내게 주어진 의무는 지체없이 그녀에게 되돌아가 
하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돌아갈 작정을 하자마자 문득  
가능한 한 빨리 마리아를 시골로 가게 해야겠다 던 의사의 말이 생각났다.   
그녀 자신도 여름이면 대개 자신의 성에서 지낸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그 성에, 여기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을 승산이 컸다.   
하룻길이면 그녀에게 갈 수 있다.  
이런 생각이 들자 나는 즉각 행동에 옮겼다.   
동이 트자 출발했고, 저녁 때는 그녀의 성문 앞에 닿았다.
고요하고 밝은 저녁이었다.   
산봉우리들이 저녁 노을을 받아 황금빛으로 반짝이고, 
산 중턱은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계곡으로부터 회색 안개가 올라와 높은 지대로 떠오르면서 
갑자기 환해지더니 구름바다처럼 하늘로 물결쳐 올랐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로운 색조가 살랑이는 어두운 호면에 비추이고 있었고 
호면으로는 산줄기들이 오르락 내리락 출렁이듯 솟아 있어, 
현실 세계와 호면의 투영을 구별해 주는 윤곽은 다만 
나무 꼭대기와 교회의 뽀족탑, 집집마다 솟아오르는 연기들뿐이었다.
그러나 나의 시선은 오로지 한 지점에 향해 있었다.   
내 예감이 거기 가면 마리아를 만날 수 있으리라고 말해 준 옛 성채였다.   
하지만 불이 켜진 창문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저녁의 정적을 깨는 발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내 예감이 틀린 것일까?   
나는 천천히 첫번째 성문을 통과하여 계단을 올라 성의 안마당에 들어섰다.   
거기엔 보초가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보초한테 달려가, 성에 누가 와 있느냐고 물었다.    
백작 영양과 그 시종들입니다. 라는 짧은 대답이었다.   
그 순간 나는 벌써 현관 앞에 서서 초인종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벌이고 있담!  
여기엔 나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고,
내가 누구라고 말할 수도 없지 않은가.   
게다가 몇 주일 동안 산 속을 헤매고 난 터라 꼭 거지 행색이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누구를 찾아야 하지?  
그러나 그런 생각을 미처 털 틈도 없이 문이 열리고 
정식으로 제복을 입은 문지기가 나와 의아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나는 영양 곁을 떠나지 않고 시중을 들리라고 여겨지는 
그 영국 부인이 성에 와 있느냐고 물었다.   
문지기가 그렇다고 말하자, 나는 종이와 펜을 달라고 부탁해서, 
영양께서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하여 내가 왔노라는 전갈을 썼다.   
문지기는 하인을 불러 편지를 갖고 올라가게 했다.   
그가 긴 복도를 걸어 가는 동안 점점 내 처지가 참을 수 없이 느껴졌다.
벽에는 후작가의 초상화들이 걸려 있었다.   
완전 무장을 한 기사들, 옛날 복장을 입은 여인들, 
가운데에는 붉은 십자가를 가슴에 늘어뜨린 
흰 수녀복 차림의 여인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이제껏 나는 이런 초상화를 퍽 자주 보아 왔다.   
하지만 그 그림의 주인공의 가슴에서도 
언젠가 인간의 심장이 뛰고 있었으리라고 생각해 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그들의 모습에서 
모든 뜻을 읽을 수 있을 듯한 느낌이 들었고, 
그들 모두가 나를 향해,  우리도 한때 살아 있었고, 
우리도 한때 괴로와했느니라 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이 철갑의 무장 밑에서도 어느때는 
지금 내 가슴속처럼 비밀들이 감추어져 있었으리라.   
또 이 흰 수녀복과 붉은 십자가는, 
그 주인공의 가슴에서도 지금의 내 가슴속에서 벌어지는 것 같은 
치열한 갈등이 있었다는 산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러자 그들 모두가 동정어린 시선으로 나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곧 그들은 다시금 오만한 표정으로 되돌아가며, 
너는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아, 라고 말하려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