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세계문학

독일인의 사랑 - 막스뮐러 18

Joyfule 2010. 8. 30. 09:55
 

   
독일인의 사랑 -  막스뮐러 18  
일곱째 회상  
그때 그녀의 부드러운 음성이, 꿈을 꾸는 듯한 기도에서 
우리를 깨워주는 오르간의 첫 음처럼 울려 왔다.
바로 이 시에 그려진 것처럼 당신이 나를 사랑했으면 싶어요.   
저 의사 선생님두요.   
바로 이런 식으로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믿을 수 있어야 해요.   
그런데 세상은, 물론 나는 세상을 잘 모릅니다만, 
이런 사랑과 믿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우리가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아갈 수도 있었을 이 땅을 
인간들이 슬픈 현존으로 만들어 버린거예요.
옛날에는 달랐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호머가 나우지카 같은 
사랑스럽고 건강하며 섬세한 여인을 만들어 낼 수 있었겠어요?   
나우지카는 첫눈에 오딧세이를 사랑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친구들에게 당장에 말하지요.
<저런 분이 내 남편이 되어 여기 머물려고 하신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그런데도 오딧세이랑 당장 거리에 나타나기를 부끄러워하면서, 
당신처럼 늠름하고 훌륭한 이방 사람을 집으로 데려가면
사람들이 남편을 데려왔다고 할 것이라고 그에게 대놓고 털어놓아요.  
이 모든 행동이 얼마나 아름답고 자연스러운가요.   
그렇지만 오딧세이가 처자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 
나우지카는 아무 불평도 내색하지 않고 스스로 그의 눈앞에 숨어 버리지요.  
아마도 그 여자는 그 늠름하고 훌륭한 이방인의 모습을 
소리 없는 기쁨으로 찬탄하며 오래오래 가슴에 새기고 있었을 겁니다.   
그걸 우리는 느낄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네 시인들은 왜 이런 사랑을 모를까요?   
이처럼 환희에 찬 고백과 조용한 이별을! 
오늘날의 시인이라면 나우지카를 여자 베르테르로 만들어 버렸겠지요
 - 그럴 것이, 우리에겐 사랑이 결혼이라는 
희극이나 비극의 전주곡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그럼 다른 유의 사랑은 진정 없는 걸까요?   
이같은 순수한 행복의 샘은 아주 말라 버린 걸까요? 
사람들은 오로지 취하게만 하는 묘약만 알 뿐, 
생기를 주는 사랑의 샘물을 모르는 걸까요? 
이 말을 듣자 내게는 그 영국 시인의 다음과 같은 탄식이 떠올랐다.
  만약 이 믿음이 하늘로부터 온 것일진대,
  만약 그것이 자연의 거룩한 계획일진대,
  인간이 인간으로 무엇을 만들든,
  탄식할 아무 이유가 없으리.
참으로 시인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라고 그녀가 말했다.    
시인의 언어는 수천의 영혼 안에서 침묵하고 있는 
저 가장 깊은 곳의 감정을 현존으로 불러내어 옵니다.   
그들의 노래가 가장 감미로운 비밀의 고백이 된 예가 얼마나 많았는지요!   
시인의 심장은 가난한 자의 가슴에서도 부자의 가슴에서도 고동칩니다.  
행복한 이들은 시인과 더불어 노래하고,
슬픈 이들은 시인과 더불어 눈물을 짓지요.
그렇지만 워즈워드처럼 완전히 나의 것으로 느껴지는 시인은 내겐 없어요.   
하긴 그를 좋아하지 않는 나의 친구들도 많아요.   
그들은 워즈워드가 시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정말 워즈워드는 전통적인 시인의 상투어이며 과장법, 
이른바 시적 감흥이라고 하는 일체의 것을 피합니다.   
그렇지만 바로 그런 요소가 내가 이 시인을 좋아하는 점이에요.   
그는 진실을 말합니다
 - 그리고 진실이라는 이 한마디에 무엇이든 다 들어 있는 거예요! 
그는 우리로 하여금 초원에 핀 들국화처럼
우리의 발밑에 놓인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한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솔직이 부르지요 - 
누구도 놀라게 하거나 현혹시키려 하지 않아요.   
찬탄을 받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다만 우리의 손이 탐하여 움켜쥐거나 꺾어 갖지 않는 모든 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사람들에게 보여 주려 합니다.
풀줄기 위에 맺힌 이슬 방울이 황금 속에 박힌 진주보다 더 아름답지 않은가요?   
어디선지 모르게 우리를 향해 졸졸 흘러 오는 살아 있는 샘물이 
베르사이유 궁전의 인공 분수보다 더 경이롭지 않은가요?   
이 시인의 <산속의 소녀>가 괴테의 헬레나나 바이런의 하이디보다 
더 사랑스럽고 참된 아름다움의 구현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의 친근감가는 언어와 순수한 생각들 -
일찌기 우리 나라에 이같은 시인이 없었다는 게 얼마나 애석한 일인지요! 
쉴러가 만약 고대 그리스 인들이나 로마 인들에게 기대지 않고
자기 자신을 더 신뢰했다면 우리의 워즈워드가 되었을지 모르지요.   
만약 뤼케트가 초라한 조국을 등지고
<동방의 장미꽃>에서 고향과 위안을 구하지 않았다면 
아마 워즈워드에 가장 가까운 시인이 되겠지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되는 용기를 지닌 시인은 실로 드물답니다.  
워즈워드는 그런 용기를 갖고 있었습니다.   
위대한 사람들의 경우 우리가 즐겨 귀기울이는 것은 
그들의 위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처럼 자기네의 사상을 길러, 
무한으로 통하는 새로운 전망이 열릴 투명한 순간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과정이랍니다.   
마찬가지로 워즈워드의 시는 누구나가 말할 수 있는 얘기만 담고 있지만, 
바로 그래서 나는 그를 좋아합니다.   
위대한 시인은 결코 평정을 잃지 않는 법이죠.   
호머를 읽어 보면, 단 한 줄의 아름다움도 담지 않은 싯귀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단테도 마찬가지예요.  
그런가 하면 핀다르 같은 시인은 모두의 찬사를 받지만, 
그의 열광적인 도취경이 오히려 나를 절망으로 몰아넣어요.
한여름만이라도 이 시에 그려진 호숫가에서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워즈워드와 더불어 그가 읊은 모든 장소를 찾아 보고,
그가 시에 담아 도끼날을 면케 한 모든 나무들에게 인사를 할 수 있다면,
한번이라도 그가 서술했던, 아마 그림으로라면 터너밖에 표현하지 못했을,
아득한 일몰을 같이 바라볼 수 있다면 여한이 없을 것 같아요. 
그녀의 어조는 실로 독특했다.   
대부분 사람들의 경우처럼 말꼬리가 내려가지 않고 
반대로 올라가서 마치 7도화음의 의문문으로 맺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항상 사람들에게 올려서 말을 했지 내려서 말하는 법이 없었다.   
그 가락은 마치 어린애가  아빠, 그렇지 않아요? 라고 할 때와 같이 들렸다.   
이런 그녀의 어조에는 간청하는 듯한 무엇이 서려 있어서,
상대방으로서는 뭐라고 반대의 말을 하기가 퍽 어려웠다.
워즈워드는 나도 좋아하는 시인입니다 라고 나는 입을 떼었다.   
인간으로서의 그를 더 좋아하지요.   
힘들이지 않고 오른 작은 언덕이 천신만고로 몽블랑을 올랐을 때보다 
더 아름답고 풍요하며 생생한 전망을 보여 줄 때가 있다고들 말합니다.   
워즈워드의 시는 내게는 바로 이런 경우랍니다.   
처음엔 이 시인이 너무 진부해 보였지요.   
그래서 곧 잘 그의 시를 읽다 집어쳤고,
어떤 연유로 이렇다 하는 오늘의 영국 지성들이
그를 그렇게 격찬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긴 해도, 어느 나라 언어를 쓰는 시인이든 
자기의 국민이나 그 민족의 정신적 귀족층에게 인정받는 시인이라면 
우리도 감상할 수는 있으리라는 확신은 가졌지요.   
찬탄이란 우리가 배워야 할 기술입니다.  
많은 독일인들은 라신(프랑스의 고전비극의 완성을 이룬 극작가)이 
우리 마음에 안 든다고 말합니다.   
또 영국인들은 괴테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며, 
프랑스 인들은 셰익스피어가 농사꾼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들은 무엇을 뜻할까요?   
그것은 어린애가 자기는 베토벤의 교향곡보다
왈츠곡이 더 좋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찬탄의 기술이란, 각기 민족이 자기 나라의 위대한 인물들에게서
찬탄하는 대상적 요소를 찾아내어 이해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무릇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페르시아 인들도 그들의 하피스를 착각하고 있지 않으며, 
인도인들 역시 그들의 칼리다시에 대해 
틀린 기대를 품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발견하고 인정하게 될 겁니다.  
위대한 인물이란 단숨에 이해되는 존재가 아니지요.   
거기엔 정력과 용기와 끈기가 요구됩니다.   
첫눈에 마음에 든 것이 오래 우리를 사로잡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은 참 기이하지요. 
그렇긴 해도 하고 그녀가 끼어들었다.    
페르시아 인이든 인도인이든, 기독교인이든 이교도이든, 
또한 로마 인이든 게르만 인이든간에, 
지상의 모든 위대한 시인, 참된 예술가, 영웅들한테는 공통된 점이 있답니다.  
그것을 뭐라고 이름 붙여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뭏든 그것은 그들의 내면에 감추어진 무한한 것, 
영원을 투시하는 눈, 하찮은 것과 무상한 것을 신화시키는 그런 것일 거예요.   
위대한 이교도 시인인 괴테도 <하늘에서 내려오는 감미로운 평화>를 알고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