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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사랑 - 막스뮐러 20

Joyfule 2010. 9. 1. 11:11
 

   
독일인의 사랑 -  막스뮐러 20 
마지막 회상    
내가 잠에서 끼었을 때는 태양이 벌써
산마루에 떠올라 창을 통해 비쳐들고 있었다.   
저것이 바로 엊저녁의 것과 같은 태양이란 말인가?  
떠나가는 친구처럼 아쉬운 눈빛으로 
우리의 영혼의 결합을 축복하듯 바라고보 나서 
사라지는 희망처럼 침몰해 간 그 태양이란 말이냐.   
지금 태양은 우리의 즐거운 잔치를 축하하려고 
방으로 뛰어드는 어린애 처럼 나를 향해 빛을 쏟고 있지 않은가!   
또한 나 자신 역시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만신창이가 된 심신을 침대에 던졌던 바로 같은 인물이란 말인가!   
지금의 나는 예전의 생의 용기와 신에 대한 신뢰, 
또 나 자신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 있고, 
이 신념이 신선한 아침 공기처럼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고 있지 않은가!
만약 수면이 없다면 인간은 어떻게 되었을까?   
밤마다 찾아오는 이 사자가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갈지 우리는 모른다.   
밤마다 추리의 눈을 감기면서 그가 아침이면 우리 눈을 다시 뜨게 해 주리라고 -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 되돌려 준다고 그 누가 보증할 수 있을까?
최초의 인간이 알 수 없는 친구에게 자신을 맡길 때는 
실로 용기와 믿음이 필요했을 것이다.  
우리의 천성에는 어딘가 속수무책인 구석이 있어서, 
우리가 믿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당연지사의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믿으며 자신을 맡겨 버린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피로하다해도 
자발적으로 눈을 감고 이 알지 못할 꿈의 나라로 들어설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무력감과 피로감은 우리에게 보다 높은 힘에대한 
신뢰감과 만물의 조화로운 질서에 기꺼이 귀의할 용기를 준다.   
그리고 깨어서든 잠을 잘 때든, 
비록 잠시나마 지상적인 우리의 자아에다 
영원한 자아를 묶어 놓고 있는 사슬을 풀어 버릴 때, 
우리는 생기와 활력이 되돌아옴을 느끼는 것이다.
어제, 도망치는 저녁 안개처럼 
내 머리를 몽롱히 스쳐 갔던 일들이 갑자기 생생히 떠올랐다.   
그녀와 나는 서로에게 속해 있는 것이다.   
그 점을 나는 느끼고 있었다.   
오빠와 누이처럼이든, 아버지와 자식처럼이든, 
아니면 약혼한 남녀 사이이든, 어쨋든 우리는 영원히 공존하는 관계였다.  
문제는 우리가 더듬대는 말로 사랑이라고 부르는
그것의 올바른 이름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너의 오빠라도 좋고
  너의 아버지라도 좋다.   
  아니, 너를 위해 세상의 무엇이라도 되고 싶다.
바로 이 <무엇>에 대한 이름을 찾아내야만 했다.   
세상은 이름없는 것을 결국 인정하지 않으니까.   
그녀는 모든 다른 사랑의 원천인 저 순수하고 전인적인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노라고 내게 말했었다.  
그렇다면, 내 편에서 그녀에게 나의 혼신의 사랑을 고백했을 때, 
왜 그녀가 놀라움과 언짢은 기색을 보였는지 아무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태도가 
그녀의 사랑에 대한 나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우리 자신의 마음속이 불가사의한 것 투성이인데, 
왜 인간의 영혼 안에서 벌어지는 것을 모조리 알려고 하는가?   
자연에서든, 사람의 속마음에서든, 자신의 가슴속에서든, 
우리를 가장 매료시키는 것은 해명할 수 없는 것들 천지가 아닌가.   
우리에게 이해되는 인간, 해부용 표본처럼
우리 눈에 보이는 태엽을 지닌 인간들 앞에서는 
수많은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의 경우처럼 우리는 냉담하게 된다.   
만사를 해명하려 들면서 내면의 기적을 일체 부인하는 
윤리적 합리주의자들이야말로 생명과 인간에 대한 우리의 기쁨을 망치는 자들이다.   
어느 존재안에나 운명이니 영감이니 성격이니 하고 
이름 붙일 수 있는 풀어지지 않는 요소가 있는 법이다.   
이처럼 영원히 남는 요소를 인정치 않고, 
인간의 행동거지를 분석할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야말로 
저 자신은 물론 인간을 모르는 위인들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엊저녁에 절망했던 모든 것에 대해 알기를 깨끗이 체념했다.   
그러자 이제 내 미래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 기분으로 답답한 집을 빠져나와 밖으로 나서는데, 
한 심부름꾼이 편지를 한 통 전했다.   
백작 영양에게서 온 것임을 그 차분한 달필에서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숨쉴 틈고 없이 편지를 뜯었다.   
인간이 바랄 수 있는 최대의 아름다운 사연을 기대하면서.   
그러나 내 모든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편지에는, 수도에서 손님이 오니 
오늘은 찾아오지 말아 달라는 부탁만이 쓰여 있었다.   
한마디 다정한 말도 자신의 상태에 대한 소식도 없이!   
다만 편지 끝에  내일은 궁중 고문관이신 의사 선생님께서 오십니다.  
그러니까 모레까지 안녕 이라는 추신이 붙어 있었다.
어렇듯 느닷없이 인생의 노트에서 이틀이 찢겨져 나갔다.   
아, 차라리 아주 뜯겨져 나간 것이라면 좋으련만 - ,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그 이틀은 감옥의 함석 지붕처럼 내 머리 위에 걸려 있었다.   
이 시간 역시 살아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이틀을 사원 입구 댓돌 위에 앉아 
더 살기를 바라는 거지에게 무슨 적선처럼 줄 수도,
아니면 옥좌를 차지하고 있는 날을 
이틀쯤 연장하고 싶어할 왕에게 희사할 수도 없지 않은가!  
나는 한동안 망연하니 앞을 바라보다가 얼핏 내가 했던 아침기도를 상기했다.   
절망보다 더한 불신은 없으며, 
생의 아무리 크거나 작은 일이라도 모두 신의 위대한 계획의 일부이다.   
그러니 아무리 힘이 들더라도 우리는 
그것에 순종해야 한다고 나는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눈앞에 낭떠러지를 본 기사처럼 나는 고삐를 힘껏 뒤로 잡아 당겼다.  
그리고는  그래야 한다면, 그래야겠지! 라고 속으로 외쳤다.   
어쨌든 하느님이 만드신 이 땅은 불평과 비탄을 하는 장소가 아니다.   
그녀의 수적을 단 몇 줄이라도 손에 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 아니냐?   
곧 그녀를 만나게 된다는 희망이야말로 
지금껏 내가 누렸던 그 어느 행복보다 큰 것이 아니겠느냐?
머리를 항상 물 위에다 내어 놓아라! - 
인생을 헤엄쳐 가는 모든 수영 선수는 그렇게 말한다.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끊임없이 눈과 목구멍에 물을 집어넣느니, 
차라리 불쑥 잠수를 하는 게 낫다!   
생활의 잡다한 사고를 당할 때마다 줄곧 신의 섭리를 생각하기란 힘이 든 일이다.   
또 투쟁이 닥칠 때마다 범속한 일상에서 빠져나와 
신이 계신 곳으로 다가간다는 것은 주저되는 일이며, 
아마 그 주저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럴 때 삶은 우리에게 의무는 못 될 망정 예술로라도 보여야 되지 않을까
- 이를테면 괴롭거나 손해를 볼 때마다 
원망해대는 망나니 아이처럼 꼴불견이 어디 있을까?   
그보다는 눈물이 고인 눈에 어느 새 
기쁨과 천진의 빛이 반짝이는 아이의 모습이 훨씬 아름답지 않으냐.   
봄비를 맞아 떨고 있다가도 햇볕이 뺨의 눈물을 말려 주는 새에 
어느덧 다시 꽃피어 향기를 발하는 꽃송이처럼.
이같은 운명에도 불구하고 이 이틀을 
그녀와 더불어 살 수 있을 듯 한 훌륭한 생각이 곧 떠올랐다.   
벌써부터 나는 그녀가 내게 했던 사랑스러운 말들, 
흉금을 트고 펴 보인 갖가지 훌륭한 생각들을 기록해 놓고 싶어했었다.   
그래서 이 이틀은 우리가 공유했던 아름다운 시간에 대한 
회상과 한결 더 아름다운 앞날에 대한 희망 속에서 흘러갔다.  
수기를 쓰며 나는 그녀 곁에 갔었고, 
그녀와 함께 있었으며, 그녀 안에서 살았다.   
그러면서 그녀의 손을 직접 잡고 있었을 때보다는 
더 가까이 그녀의 사랑과 정신을 느꼈다.
이 수기들은 지금에 와서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얼마나 여러 번 이것을 읽고 또 읽었던가.   
그렇다고 내가 그녀가 한 말을 한마디라도 잊었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이 수적은 나의 행복의 증인인 것이다.   
이 안에는 침묵으로 웅변 이상을 말해 주는 
친구의 눈길 같은 무엇이 감추어져 나를 보고 있다.
흘러간 행복의 기억, 흘러간 고뇌의 기억, 
아득한 과거로의 소리없는 침잠 - 
이 앞에서는 우리를 에워싸고 묶고 있는 일체의 것이 물러가 버린다.   
우리는 이미 오래 전에 지하에 잠든 자식의 
풀 덮인 무덤 위로 쓰러지는 어머니처럼 이를 향해 몸을 던진다.   
어떤 희망이나 소망도 이 가이없는 고요한 침잠을 막지는 못하리라 - 
이를 우리는 아마 우수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나 이 우수에는 하나의 행복이 깃들어 있다.   
이 우수를 아는 이는 오로지 뼈저리게 사랑하고 고뇌해 본 자들 뿐이리라.
- 지난 날 자신이 신부였을 때 썼던 면사포를 딸의 머리에 둘러 주면서
돌아간 남편을 생각하는 어머니에게 지금 무엇을 느끼느냐고 물어보라 -
죽음이 갈라 놓은 사랑하는 소녀로 부터, 그녀가 죽은 뒤 
소년 때에 자기가 그녀에게 보냈던 마른 장미꽃을 받아든 남자에게 
지금 무엇을 느끼느냐고 물어보라.   
그들은 둘 다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러나 그 눈물은 고통의 눈물이 아니며, 더욱이 기쁨의 눈물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서의 눈물이다.   
그들은 신의 사랑과 지혜를 믿으면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이 고요히 사라져 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