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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사랑 - 막스뮐러 25 - 후기에 대신하여 - 차경아.

Joyfule 2010. 9. 8. 08:51
 

   
독일인의 사랑 -  막스뮐러 25  
    <<독일인의 사랑>>과의 재회
   - 후기에 대신하여 - 차경아.(번역)
1.
내가 <독일인의 사랑>을 처음 읽은 것은 고교시절이었다.   
아마 이 책을 처음 한글판으로 소개하신 이덕형 선생님의 번역이었을 것이다.
요즘 같은 입시 지옥에 살지 않은 덕분이었을 테지만, 
무엇보다 요즘처럼 자고 나면 책들이 한 보따리씩 쏟아져 나오지 못하던 시절이라서 그렇겠지만, 
그 당시 우리는 새 책이 한 권 나올 때 마다 가뭄에 빗방울을 만난 듯 책방으로 달려가곤 했었다.   
그 빈곤 속에서 누렸던 풍요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그 시절에 만난 책 중의 하나가 <독일인의 사랑>이었다.
언제이고 나도 독일어를 잘할 수 있다면 원문으로 읽어 봐야지.   
이런 책을 내 힘으로 우리말로 옮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막연히 소녀다운 꿈을 꾸었던 기억도 난다.   
이는 물론 당시 읽었던 번역 책자에 불만이 있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기에는 번역이 무엇인지조차 아무 예감도 못했던 철부지였으니까.   
다만 번역물을 읽는 누구나가 가지게 되는, 즉 원문에는 번역문이 다 건지지 못한 
더 아름답고 심오한 부분이 남아 있으리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만큼 그때 이 책은 내게 성공적으로 감동을 준 셈이었다.
그후 어쩌다가 독일 문학을 전공하는 길에 들어섰으면서도, 
아니 어쩌면 상당 부분 바로 전공이랍시고 그것에 매달려 있는 탓으로, 
나는 고교 시절에 읽었던 <독일인의 사랑>의 세계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더러는 독일어 책을 우리말로 옮겨 놓는 일을 해대면서도, 
언젠가는 이 책을 우리말로 옮겨 보리라던 그 옛날의 막연했던 꿈 따위는 물론 
당장 닥친 생활과 과제 속에 묻혀 버렸다.
거기엔 또 다른 이유도 조금은 있었다.   
즉 이미 우리말로 소개된 작품을 굳이 개역하는 일이 과연 어떨까 싶은 나의 작은 의구심 탓이었다.
무슨 특허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수많은 외국 말에 싸인 엄청난 광맥에서 캐낼 것이 무진장 많은데, 
나보다 앞서 캐낸 이의 노고를 뭉개는 일에 끼어든다는 것은 아무래도 꺼림칙한 일인 것이다.  
사실, 이 번역을 끝내고도 이 찜찜함은 석연히 가시지 않고 있다.   
30년이라는 세월에 언어가 변했으면 얼마나 변했으며, 그것이 무슨 큰 변명이 되랴.   
번역의 고충을 누구 못지않게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문장 하나 단어 하나를 대할 때마다 똑같이 고심했을 앞서의 역자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
실로 원문에 일치하는 번역이란 불가능하고, 
아무리 역자가 안간힘을 써도 군데군데 오역은 불가피하게 남는다.   
그렇기는 해도 원문에 가장 근접하는 번역은 단 하나뿐인 것이다.   
그렇다고 나의 번역이 그것이 된다는 보장도 없고, 더구나 자신이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다만 이 개역판을 내면서 이덕형 선생님께 
지상으로나마 감사의 말을 남기는 것으로 내 찜찜함을 조금이나마 덜고 싶다.  
왜냐하면 그 옛날 <독일인의 사랑>을 나와 만나게 해 준 중개인은 
어디까지나 그분임을 부인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미 말했지만 근 30년간 <독일인의 사랑>은 나를 거의 떠나 있었다.  
언젠가 그 비슷한 시기에 지금은 헐려 버린 극장에서 몰래 보았던 
<나의 청춘 마리안느>의 영상과 오버랩되어, 주인공 청년은 벵상을 닮았으리라는, 
또 마리아는 마리안느와 비슷하리라는 막연한 상상만이 마음 한구석에 살아 있었다.   
그러나 이 영상이 그후 내 생활에 대단히 중요한 몫이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이 책에서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수시로 떠올렸던 장면이 있다면, 
그것은 주인공이 소년 시절 사과 가게에서 거스름돈을 둘러 싸고 벌였던 에피소드이다.   
거스름돈 때문에 실랑이를 벌일 필요가 거의 없는 슈퍼마켓에서, 
고액권에서 10원짜리 동전까지 차례로 정리된 계산대의 내장을 들여다볼라치면, 
20년 전 우리 집 좁은 골목 어귀의 과일 가게 노부부와 거스름돈을 주고받으며 나누었던 
정담을 향수처럼 떠올렸고, 그럼 어김없이 <독일인의 사랑>에 나오는 
<귀여운 공산주의자>의 모습이 뒤따라 떠오르곤 했다.
계산에 밝지 못한 것, 내 것과 남의 것을 착각하는 것이 참으로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 - 
이것은 똑똑치 못한 생활 태도를 가진 사람들에겐 이처럼 당찮은 변명과 위안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번에 이 책을 부득이 엄밀하게 읽으면서 나는 소녀 시절에 받았던 감동과 
지금의 나의 시각의 격차를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그 옛날 읽고 난 후 자리잡은 인상처럼, 
이 책이 한 순진한 젊은이의 청순한 사랑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사랑이라는 주제를 놓고 집요하게 장황할이만큼 토론이 벌어지는 
하나의 철학서 내지는 종교서임을 확인하고, 
주인공의 안타까운 감정 변화보다는 토론 내용에 더 큰 관심이 가는 삭막한 나를 발견한 것이다.
이렇듯 같은 책에서도, 나아가서는 같은 인간에게서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 우리의 만남의 색채는 달라진다.   
그렇다고 그 어느 쪽의 수용태도가 옳고 좋은 것이라고 단정해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부인할 수 없는 점은 
이 책이 여전히 아름다운 책이라는 사실이다.   
어쩌다 30년 뒤에까지 내가 살아 있어 이 책을 다시 읽게 된다면 
그때의 관심과 시각은 또 달라져 있으리라.   
그러나 지금도 장담할 수 있는 것은 그때에 가서도 이 책이 여전히 아름답게 느껴지리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