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세계문학

독일인의 사랑 - 막스뮐러 7

Joyfule 2010. 8. 17. 13:01
 

   
독일인의 사랑 -  막스뮐러 7  
그밖에도 우리의 어린 시절 우정을 방해하는 다른 사정이 있었다.
독일의 국민 생활의 궁핍과 독일 통치 체제의 죄상을 
맨 처음으로 인식한 청년들이 흔히 그렇듯, 
나 역시 쉽사리 진보화의 몇 가지 상투어를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말투는, 엄격한 목사 가정에서 상스런 어투를 쓰는 것만큼이나, 
궁정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언동이었다.   
요컨데, 그런 저런 사정으로 나는 여러 해 동안 그 계단을 올라간 적이 없었다.
그렇긴 해도 그 성 안에는 내가 거의 매일처럼 그 이름을 불러 보며,
줄곧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한 여인이 살고 있었다.   
내겐 벌써 오래 전부터 생전에는 그녀를 
다시 만나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깊이 들어 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내게 현실 안에는 존재하지도 않고, 
또 존재 할 수도 없는 그런 형체로 부상되어 있었다.   
그녀는 나의 수호 천사 - 나의 또 다른 자아로 화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스스로와 얘기하는 대신 그녀를 향해 말을 걸었다.   
어떻게 그녀가 내게 그런 존재로 화했는지를 스스로도 알 길이 없었다.   
그럴 것이, 실은 나도 그녀를 거의 알지 못했으니까.   
그것은 마치 사람의 시각이 하늘에 뜬 구름을 여러 형상으로 변화시켜 보듯이, 
나의 상상력이 어린 시절 하늘에서 마술처럼 불러 낸 몽롱한 환영이요, 
소리 없이 암시된 현실의 윤곽을 소재로 하여 그려 낸 
하나의 완성된 환상이었다는 느낌이다.   
아무튼 나의 모든 사고는 부지중에 그녀와의 대화로 화해갔다.  
내 안에 있는 모든 선한 것, 내가 지향하는 모든 것, 
내가 믿는 모든 것, 나의 모든 보다 나은 자아는 그녀에게 속해 있었고, 
내가 그녀에게 부여한 것인 동시에 나의 수호 천사인 그녀의 입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고향 집에 온 지 며칠 되지 않은 어느 날 아침, 내게 한 통의 펀지가 왔다.   
백작 영양 마리아에게서 온 영어로 된 편지였다.
친애하는 친구여,
당신이 얼마 동안 이곳에 와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참 오랫동안 못 만났군요.   
괜찮으시다면, 옛 친구를 다시 만나고 싶어요.   
오늘 오후 스위스 오두막에 혼자 있을겁니다.
당신의 친구, 마리아.
나는 당장에 오후에 찾아뵙겠다는 내용의 답장을 역시 영문으로 써보냈다.
스위스 오두막은 그 성의 측면체를 이루는 집으로, 정원을 향해 길게 뻗어 있어 
성 앞마당을 통과하지 않고서도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내가 정원을 지나 그 집에 닿았을 때는 다섯 시였다.   
나는 모든 감정을 억제하고 예의 바른 담소를 하리라 단단히 마음먹었다.   
그래서 우선 내 마음 속의 수호 천사를 달래어 진정시키고, 
지금 만날 여인은 천사와는 무관한 존재임을 입증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마음은 결코 편안치가 않았고, 
나의 수호 천사 역시 내게 조금도 위안을 주려 들지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마음을 다잡고는 인생의 가면 무도회 운운,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반쯤 열린 방문을 두드렸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웬 낯선 부인이 나와 역시 영어로 말을 걸며 
백작 영양께서는 곧 오실 것이라고 전했다.   
그리고 그녀는 갔고, 나는 혼자 남아 한동안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방 안의 사방 벽은 떡갈나무 목재로 되어 있었다.   
또 엮어 짠 난간이 빙 둘러 돌아가 있고, 
그 난간으로 기어오른 담쟁이덩굴이 그 무성한 잎새로 온 방 안 주위를 휘감고 있었다.
테이블이며 의자들도 모두 떡갈나무 목재로 조각된 것들이었고, 
바닥은 무늬목 마루판이었다.
그방 안에서 그토록 많은 낯익은 물건들을 보는 것은, 실로 독특한 감회를 주었다.   
대부분의 물건들은 성 안 옛날 우리의 놀이방에서 이미 낯익은 것들이었다.   
그밖에 다른 것들, 말하자면 초상화들은 새로운 물건이었다.   
그렇긴 해도 그것들은 대학의 내 방에 걸어 놓은 것과 똑같은 초상화들이었다.   
이를테면 그랜드 피아노 위에 걸린 베토벤과 헨델, 멘델스존의 초상화 - 
그것들은 바로 내가 골랐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방 한쪽 구석에는 내 생각에는 고대 입상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밀로의 비너스가 서 있었다.   
또 이곳 책상에 놓인 단테와 셰익스피어의 책자들, 
타울러의 설교집,<독일신학>, 뤼케르트의 시집, 테니슨과 번즈의 시집, 
그리고 칼라일의<과거와 현재>등 - 
모조리 나의 서재에도 있는 것으로 바로 얼마 전까지도 손에 잡고 있던 책들이었다.
나는 곰곰 생각을 모으려고 하다가는 얼른 생각을 털어 버리고,
돌아가신 후작 부인의 초상화 앞으로 다가섰다.   
바로 그때 문이 열렸고 어릴 적에 자주 보았던 두 장정이 
백작 영양을 침대에 누인 채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아, 그 모습! -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얼굴은 호수처럼 잔잔했다.
두 장정들이 나가자, 이윽고 그녀는 내게 시선을 보냈다. 
- 옛날 그대로의 그윽하고 바닥을 헤아릴 수 없는 그 눈 - 
그녀의 얼굴은 순간마다 생기를 띄우더니 
마침내 온 얼굴에 미소를 함빡 머금고 입을 열었다.
우리는 오래된 친구예요.   
우리는 변한 게 없는 것 같군요.   
나는 지이 (예의 바르게 쓰는 존칭)라고는 부르지 못하겠어요.   
또  두우 (친한 사이에, 특히 남녀간에는 애인 사이에 쓰는말)라고 부를 수도 없으니 
영어로 말해야겠는 걸요.  Do you understand me?"
이같은 환대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어쨋든 그곳에서 내 눈앞에 보이는 장면은 가면 무도회는 아니었다.   
거기에는 한 영혼을 갈구하는 영혼이 있었다.   
또 변장을 하고 검정 가면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두 친구가 단지 눈맞춤만으로 서로를 알아보는 것 같은 그런 인사가 있었다.
나는 내게로 내민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천사  테 이야기할 때는 <지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형식의 힘과 생활의 관습은 얼마나 질긴 것인지!  
아무리 친한 영혼끼리라도 자연의 언어로 말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대화가 끊기고, 우리들은 한 순간 어색함을 느꼈다.   
그때 나는 침묵을 깨고 때마침 머리에 떠오른 생각을 입 밖에 냈다.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새장 안에서 사는 데 길이 들어 있지요.
그래서 자유로운 대기 속으로 풀려 나도 감히 날개를 필 엄두를 못 내고,
날아오르기만 하면 사방에 부딪칠세라 두려워하고 있어요.
그 말이 맞아요. 라고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그대로 역시 좋은 일이고, 달리 어쩔 수도 없지요.   
사람들은 숲 속을 나는 새들처럼 나뭇가지 위에서 만나 
굳이 서로를 소개할 필요도 없이 같이 노래를 부르는, 
그런 삶을 누리기를 곧잘 희망합니다.   
그렇지만, 친구여, 새들 가운데는 부엉이들이나 참새 같은 무리도 섞여 있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그런 것들을 모른 척하고 지나칠 줄도 알아야 좋은 거예요.   
그래요, 어쩌면 삶이란 시와 같은 것인지 모르겠군요.   
참 된 시인이 가장 아름답고 진실된 것을 운율이라는 
구속된 형식에 담아 표현할 줄 알 듯이, 
인간이라면 사회의 속박에도 불구하고 사상과 감정의 자유를 지킬 줄 알아야겠지요.
나는 이때 플라텐의 싯귀를 머리에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어느 곳에서든
  영원한 것으로 현현되는 것은,
  구속된 운문에 담긴
  구속할 수 없는 정신이니,
맞아요 하고 그녀는 다정하면서도 사뭇 장난스러운 미소를 띄우고 말했다.    
어쨋든 내게는 하나의 특권이 있답니다.   
그것은 나의 병고와 외로움이지요.   
내게는 청춘 남녀들이 퍽 애석하게 여겨질 때가 많아요.
그들은 스스로가 또는 그들의 가까운 친구들이 자기네를 향해서 -
사랑이나 사랑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한, 
어떤 우정이나 신뢰감도 갖지를 못하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오히려 많은 것을 잃는답니다.   
처녀들은 자신의 영혼 안에 무엇이 잠들어 있는지를, 
또 숭고한 남자 친구의 진지한 권고의 말 한마디가 
그 잠을 깨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지요.   
그런가 하면 젊은 남자들의 경우도, 
만약 자신의 내면의 투쟁을 멀리서 지켜봐 주는 애인을 대상으로 가질 수 있다면, 
아마 그 옛날 기사도적 덕성을 되찾을는지 모르지요.   
그런데 그렇게 되지가 않아요.   
왜냐하면 거기엔 사랑이, 아니면 사랑이라고 칭해지는 것이 늘 끼어드니까요
 - 무섭게 고동치는 가슴이라든가,
파도처럼 밀려도는 희망, 예쁜 얼굴을 마주했을 때 환희 - 
달콤한 감상 -
어쩌면 약삭빠른 타산까지 - 
한마디로 순수한 인간애의 참모습이라고 할 
저 고요한 대양을 교란시키는 온갖 것이 끼어든단 말입니다.
그녀는 갑자기 말을 중단했다.   
괴로운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언뜻 떠올랐다.
오늘은 더 오래 얘기를 할 수가 없어요 라고 그녀는 말했다.    
내 주치의가 원치 않는 일이죠.   
멘델스죤의 음악을 듣고 싶네요.   
저 이중주 - 어린 시절의 친구인 당신은 이미 
그 옛날에도 연주할 수 있었던 곡이 아닌가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막 말을 마치고 여느 때처럼 두 손을 맞잡았을 때 
그 반지가 - 지금은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 옛날 그녀가 내게 주었고 내가 그녀에게 주었던 반지였다.   
너무나 많은 생각이 벅차게 몰려오는 바람에 나는 말을 잃었다.   
그래서 묵묵히 피아노 앞에 앉아 그 곡을 연주했다.
연주가 끝나고 나서 나는 그녀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듯 언어가 없이 음률로만 얘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럴 수 있어요 라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모든 것을 알아들었답니다.
하지만 오늘은 더 오래 버틸 수가 없어요 -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져 가고 있거든요.   
자, 그럼 우리 서로를 길들여 친해지도록 해요.   
병들어 은둔하고 있는 이 가엾은 여자가 관용을 기대하는 거랍니다.   
우리 내일 같은 시간에 만나는 거예요. 괜찮겠어요?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손에 키스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손을 부여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면서 말했다.
이렇게 하는 것으로 됐어요.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