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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남정기 - 김만중.12.

Joyfule 2010. 1. 21. 06:54

 

 

    사씨남정기 - 김만중.12.  

 

 

"내가 이런 일이 있을 줄 예측한 지가 오래매 새삼스럽게 놀랄 것도 없다.

피하지 못할 운수일지도 모른다."
하고 안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튿날에는 유씨 종중이 모두 모여서 가문의 괴변을 처리하려고 의논하였다.

이 자리에서 유한림이 사씨의 전후의 죄상과 모든 의심쩍은 말을 하였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전부터 사씨의 현숙함을 알고 있었으며

사씨 또한 모든 친척을 후대하여 왔으므로 깜짝 놀라며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유한림은 반드시 증거를 잡아 내겠으니 비밀을 아는 사람은

가문을 위하여 서슴지 말고 증거인으로 나와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남의 집안의 비밀 일을 어떻게 알겠느냐고 펄쩍 뛰며 이구동성으로,
"이 일은 한림 스스로 잘 살펴서 처치할 일이지 우리가 어찌 판단하겠소.

우리 소견은 한림이 공명정대하게 처치하기를 바랄 뿐이오."
하고 은근히 사씨의 무죄를 암시하는 동시에

그런 불상사의 분규에는 휩쓸려 들기를 꺼려하였다.

 

유한림은 향촉을 갖추어서 사당 앞에 올리고

친척들과 함께 분향 예배하고 사씨의 죄상을 고하였다.

그 조상에 고발하는 글월에,
'유세차 가정 삼십 년 모월 모일에 효증조 한림학사 유연수는

삼가 글월을 현증고조(顯曾祖考) 문현각 태학사 문충공부군(文忠公府君),

현증조비 부인 호씨, 현조고 태상경 이부상서부군(吏部尙書府君) 현조비 부인 정씨,

현고 태사공 예부상서부군(禮部尙書府君), 현비 최씨 영전에 아뢰옵나니

부부는 오륜이요 만복지원이매 나라를 비롯하여

서인에 이르기까지 어찌 삼가지 아니하리오.

슬프도다, 저 사씨 처음으로 유씨 문중에 들어오매,

가내에 예성이 자못 자자하고 예도에 어김이 없으므로 천행이었습니다.
그러나 범사에 처음만 있고 내내 여일치 못하여 혹 불미한 일이 있어도

대체를 생각하고 책하지 않았더니 그 후로 사씨의 행색이 점점 방자하여졌습니다.

선고(先考)의 삼년상을 함께 모신 후에 출사하여

집에 있지 못하는 사이에 더욱 음흉하였고 모병(母病)을 빙자하고

본가에 가서 누행이 탄로되었으나 혹 억울한 중상을 입은 것이 아닌가도 생각하고

자취를 집안에 머무르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후회하지 않고 그 죄가 칠거에 더하니 조종심령이 흠향치 않으실 바이므로

후사멸절할까 두려워서 부득이 출거시키고자 하옵니다.

소첩 교씨는 비록 육례는 갖추지 못하였으나 실로 명가의 자손이요,

고서를 박람하여 가히 조종의 제사를 받듦직하온지라 교씨를 봉하여 정실로 삼나이다.'


유한림은 조상 영전에 고하는 이 글월을 다 읽은 뒤에 시비들을 시켜서

사씨를 데려다가 사당 앞에 사배 하직케 하매 사씨의 눈물이 비오듯 하였다.

친척들은 대문 밖에서 쫓겨나가는 사씨와 이별하고 모두 동정의 눈물을 흘렸다.

유모가 사씨 소생 인아를 안고 나오자 사씨 부인이 받아서 안고 차마 이별하지 못하였다.
"너는 내 생각을 말고 잘 있거라. 혹 우리가 다시 만날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

새도 깃을 잃으면 몸을 부전하기 어렵다 하니 나 간 뒤에 넌들 어찌 완명할 수 있으랴.

서로가 죽더라도 하생에서 미진한 인연을 후생에 다시 만나서

모자의 연분이 되기를 원한다."
사씨의 슬픈 회포가 피눈물로 화하여 흘렀다.

문전에서 발이 떠나지 않는 사씨 부인은 다시 자기 모자의 슬픈 신세를 하소연하였다.


"네 조부님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에 모시고 따라가지 못하고 살아 있다가

지금 이런 광경을 당하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하고 사랑스런 아들 인아를 다시 유모에게 돌려주고

죽으러 가는 죄인처럼 가마에 오른 뒤에도

유모에게 안긴 천진난만한 인아의 조그만 손을 잡고 어루만지다가

마지막으로 어린 손을 놓고 이내 가마가 떠나자

어린 인아가 엄마를 따라가려고 애처롭게 울어댔다.

사부인은 우는 목소리로 유모에게

인아의 장래를 수없이 당부하고 하인 하나만 데리고 떠나버렸다.
이때 유한림 집안에서는 교씨의 흉계가 성공되었으므로

교씨의 시비들이 저희들 세상이 되었다고 기뻐하였다.

그 시비들은 교씨를 사당 앞으로 인도하고 분향 예배시키기를 서둘렀다.

주홍군의 패옥 소리가 맑게 울리고 황홀히 빛나서 마치 신선과 같이 아리따운 자태였다.

사당 예배를 마치고 정실 부인으로서 많은 비복들의 하례를 받았는데

교씨는 비복들에게 향하여 훈시하였다.
"내가 오늘부터 새로 이 댁의 내사를 다스릴 터이니

너희들은 각각 맡은 일에 근면하고 죄를 범하지 말아 주도록 명심하라."


이에 응하여 시비 중의 팔구 명이 앞으로 나와서 교씨에게 아뢰었다.
"그전의 사씨 부인이 비록 출거하셨으나

여러 해 섬기는 동안에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다행히 부인께서 허락하시면 문 밖까지 나가서

전 부인께 이별 인사를 드리고 전송하고자 하옵니다."
"그것은 너희들의 인정상 원하는 것이니 내가 어찌 막겠느냐?"
교씨의 허락이 내리자 모든 시비들이 일시에 문 밖으로 달려나가서

이미 저만큼 떠나가는 가마를 따라가서 통곡하였다.

사씨가 교자를 멈추고 타일렀다.
"너희들이 나를 생각하고 이렇게 나와서 나를 보내 주니 고맙다.

앞으로는 새로운 부인을 잘 섬기며 나를 잊지 말아다오."
이 말에 여러 시비가 울면서 배별을 슬퍼하여 마지 않았다.


유한림의 집에서 쫓겨난 사씨는 가마꾼에게

신성현으로 가지 말고 유씨의 묘소로 가라고 분부하였다.

교자가 묘소에 이르자 사씨는 시부모 묘전에 수간초옥을 짓고 거기서 홀로 살았다.

그 뒤로 한적한 산중에서 화조월석에 친부모와 시부모를 사모하는 효성이 지극하였다.
이런 소식을 들은 사씨의 남동생이 찾아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탄식하였다.
"여자가 남편에게 용납되지 못하면 마땅히 친정으로 돌아와서

형제와 함께 지낼 것이지 누님은 왜 이런 무인 산중에 홀로 고생을 하고 계십니까?"
"네 말은 고맙다. 내가 어찌 동기지정과 모친 영혼을 모르겠느냐.

그러나 한번 친정으로 돌아가면 유씨 집안과는 아주 인연이 끊어지고 말 것이요,

또 한림이 비록 갑자기 나를 버렸으나 내가 돌아가신 시부님께 죄진 일이 없으니

시부님 산소 밑에 여년을 마치는 것이 나의 마지막 소원이다.

그러니 내 걱정을 말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