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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남정기 - 김만중.11.

Joyfule 2010. 1. 20. 09:01

 

   사씨남정기 - 김만중.11.  

 

 

이를 본 두부인의 마음이 칼로 저미듯이 아팠다.

수심에 잠겨 있던 사씨 부인이 고모님을 보고 반가워하며 축하 인사를 올리었다.
"이번에 고모님 댁이 영귀하셔서 임지로 행차하시매,

죄첩이 존하에 나아가서 마땅히 하직올려야 하오련만,

몸이 만고의 누명을 쓰고 있기 때문에 나아가 뵈옵지 못하와

제 목숨이 있는 동안에 다시는 뵙지 못하게 되면 무궁한 한이 되겠더니

천만 뜻밖에 누처에 왕림하여 주셔서 감사하옵니다."
두부인이 눈물을 흘리면서 위로하였다.
"오라버님의 임종시의 유언에 유한림을 나에게 부탁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되 내가 조카를 잘 인도하지 못한 탓으로

사람을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모두 내 허물이다.

그리고 타일에 어찌 지하로 들어가서 오라버님 영혼을 뵙겠느냐.

모두 내 불명이지만 질부 너무 근심하지 말고

필경은 사필귀정으로 길운을 만나서 흑운을 벗어날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간사한 무리가 능히 모해하지 못하고

조카 한림이 자기의 불명을 뉘우치고 질부 누명을 씻어 줄 것이다.

예로부터 영웅열사와 절부열녀가 시운을 만나지 못하면

한때 곤욕을 당하는 법이니 널리 생각하고 심신을 상함이 없도록 하라.

이 유씨 가문이 본디 충문지가로서 간악한 소인에게는

원한을 사서 해를 많이 당하였으나 가중은 한결같이 맑더니

선대가 별세하신 후로 이렇듯 괴이한 변고가 있으니

이것은 집안의 요사한 시첩이 조카의 총명을 흐리게 한 까닭이다.

요사이 조카의 거동을 보니 그전의 총명과 맑은 기운이 하나도 없고,

나하고도 집안 일을 의논하는 일이 적어서 숙질간의 의도 감소되어 버렸다.

내가 동정을 살펴보니 한림에게도 귀신에 홀린 것 같아서

빨리 그 매혹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지만, 그것도 시기가 와야 미몽을 깨우칠 것 같다.

질부도 천정(天定)의 운수로 여기고 과도하게 심사를 상하지 말라."


되풀이하여 신신당부한 두부인은 시비를 시켜서 유한림을 그 방으로 불러오게 하였다.

두부인은 유한림을 맞아서 정색으로 슬퍼하면서 엄숙히 훈계하였다.
"요새 네 행사를 보니 아무래도 본심을 잃은 사람 같으니 매우 뜻밖의 일로써 슬프기 짝이 없다.

네 선친이 별세하실 때에 집안의 대소사를 나에게 부탁하신 말씀이

아직도 귓전에 새로운데 내가 용렬하여 질부 사씨의 빙옥 같은 행실까지

시운이 불리한 탓인지 누명을 쓰고 고통하고 있는 정사를 보고도

내가 멀리 떠나게 되니 마음을 놓고 갈 수가 없다.

내가 지금 질부 있는 이 자리에서 한 말을 꼭 부탁하겠다.

금후에 집안에서 질부를 음해하거나 혹 무슨 흉사를 보게 되는 경우라도

결코 사씨를 의심하고 냉대하지 말고 내가 돌아옴을 기다려서 처리하라.

질부는 절부정녀니까 결코 그른 생각이나 그른 행동은 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질부의 신세가 위태로운 정상을 보니 내 발길이 돌려지지 않는다.

그러니 조카 한림은 부디 조심하고 간사한 말을 듣지 말아라."


유한림은 이마를 찌푸리고 엎드려서 묵묵히 고모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두부인은 깊은 한숨을 쉬고 재삼 사씨의 일을 당부하고 돌아갔다.

사씨 부인은 가장 믿어 오던 보호자가 떠나감을 멀리 바라보며 슬프게 울었다.
교씨는 원수같이 여기다가 이제 멀리 장사로 감을 내심으로 기뻐하고 십랑을 불러 놓고,
"지금까지 원수 같던 두부인이 이제 아들을 따라 멀리 가게 되었으니

이때에 빨리 계획대로 해치우는 것이 좋겠네."
십랑이 찬성하고 계획을 진행하기로 하고 납매를 불러서 이리저리하라고 일렀다.

그 말을 들은 납매는 설매를 불러서 계교를 일러주었다.
"매우 중대한 일이니 먼저 교낭자께 알리고 하는 것이 좋을 것 아니요?"
하고 설매는 교씨의 확실한 다짐을 받으려는 생각에서 말하자

납매도 찬성하고 교씨와 함께 만나서,
"지금 사씨 부인을 이 댁에서 내쫓으려면 아씨 아드님

장기 아기의 목숨을 끊어야 한림께서도 격분하시고 계교를 행할 수 있을까 합니다."
교씨도 자기 아들의 목숨을 희생으로 삼아야 되겠다는 말에는 깜짝 놀랐다.
"미운 사씨를 위한 일이라면 무슨 일을 하여도 좋지만

어찌 귀여운 내 아들의 목숨을 재물로 바치겠느냐? 그리고 어찌 내가 살 수 있겠느냐?"


이에 악에 바쳐서 묵묵히 말을 못하고 있었다.
이때에 유한림은 두부인이 멀리 떠난 후 더욱 기댈 곳이 없어서

주야로 백자당에서 교씨와 즐겁게 지내던 중

아들 장지의 병이 낫지 않는 것을 근심하면서 납매와 설매에게 약시중을 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설매가 역시 사씨 부인의 시비인 춘방을 시켜서

약을 달이게 한 뒤에 장지에게 먹일 때 몰래 독약을 섞어서 먹였다.
이 얼마나 끔찍하랴.

교씨는 남을 잡으려고 제 자식을 죽이기까지 하였으니

어찌 천도가 무심하며 만고의 독부가 아니겠는가.

천진한 어린아이 장지가 약을 먹자마자 전신이 푸르게 부어오르고

일곱 구멍에서 일시에 피를 흘려 내면서 한마디 큰소리를 지르고 죽어 버렸다.

교씨와 유한림이 대경실색하고 장지의 시체를 살펴보니

독약을 먹고 죽은 것 같으므로 유한림이 의심하고

약 그릇을 자져와 남은 약을 개에게 먹여 본즉 약을 먹은 개가 즉사하였다.

이것을 본 유한림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는 것을 본 교씨가 대성통곡하면서,
"내 평생에 남의 원한을 살 만한 일은 한 적이 없는데

어떤 간악한 자가 우리 모자를 죽이려고 이런 악독한 짓을 했을까?"
하고 죽은 자식을 붙잡고 장지의 이름을 부르고 울다가 유한림에게 향하여,
"한림이 내 원수를 갚아주지 않으시면 나도 죽어 버리고야 말겠나이다."
유한림은 교씨를 위로하고 좌우의 시녀를 족쳐서

장지에게 먹인 독약의 출처를 추궁하려고 하였다.

사씨 부인은 시비 춘방이 설매의 꼬임으로 약을 달였는데

약을 쓴 뒤에 장지가 급사한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겁을 집어먹고 탄식하였다.
"장지의 어린 목숨이 불쌍하다. 죄 없는 자식이 어미를 잘못 만나서 참혹한 죽음을 하였구나.

공교롭게 내가 달인 약을 먹고 죽었다는

그 의심을 받은 내 신세가 앞으로 무슨 화를 입을지 모르겠다."


유한림이 서헌에 나와서 여러 비복들을 호령하고

당장에 납매와 설매를 잡아내다가 엄형으로 독약의 출처를 추궁하여

살이 터지고 피가 흘렀으나 좀처럼 자백하는 자는 나오지 않았다.

설매는 교씨의 심복이라 이를 갈고 불복하였으므로 유한림은 하는 수 없이

시비들을 모두 감금하고 자백하는 자가 나오기를 기다리려고 하였다.
시비들이 그 흉한 사고를 사씨 부인에게 알리고 통곡하였으므로

사씨 부인도 경악하면서 올 것이 마침내 왔다고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