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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 앙드레 지드.31

Joyfule 2010. 3. 19. 06:36
 
좁은 문 - 앙드레 지드.31   

당황해 버린 나는 대답할 말을 전혀 찾아내지 못했다.
"만일 오늘이라도 너도 함께 이 설교집과 명상록을 읽어야 한다면 나는...."
"하지만."하고 그녀는 내 말을 가로막았다.
"네가 이런 걸 읽은 것을 보면 나는 서글퍼질 거야! 
나는 네가 이런 것보다는 훨씬 훌륭한 것을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해."
그녀는 지극히 간결한 어조로 또 이처럼 자기와 나의 생을 분리시키는 
이러한 말이 나를 얼마나 슬프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염두에도 없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의 머리는 확확 달아 올랐다. 
나는 좀 더 이야기하고 그리고 울고 싶었다. 
만일 그녀가 내 눈물을 보았더라면 굴북됐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벽난로 위에 팔꿈치를 짚고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 괴로움을 보지 못했는지 
혹은 보고도 못본 체하는지 계속해서 꽃만 매만지고 있었다. 
이때 식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이러다간 점심 먹을 채비를 못하겠네."하고 그녀는 말했다.
"어서 가 줘."
그러고 나서 무슨 장난 이야기나 하듯 말했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또 해."
그 이야기는 다시 계속되지 않았다.
늘 나와는 엇갈리게 되었다. 
그것은 그녀가 나를 피해서가 아니라 단지 뜻하지 않았던 일이 
훨씬 더 급박하고도 중요하게 닥쳐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차례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나의 이 차례라 하는 것은 그 끊임없이 생겨나는 집안 일이라든가 
꼭 해야 될 곳간 일의 감독이라든가, 소작인들이나 또는 
그때 그녀가 점점 더 열중하게 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방문이라든가 
하는 따위의 일이 다 끝난 뒤에야 돌아오는 것이었다. 
내게는 그 나머지 시간, 극히 짧은 시간밖에는 차례가 오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분주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이런 자질구레한 일을 하는 것을 보고, 
또 나 자신 그녀 뒤를 따라다니기를 단념했기 때문에 
그녀가 얼마나 나를 소홀히 하고 있는가 하는 느낌은 그다지 들지 않았던 것이다.
잠시 이야기를 해보아도 그러한 느낌은 더욱 절실해졌다. 
알리싸와 잠시나마 이야기를 하게 될 경우에도 
그것은 어설픈 대화에 지나지 않았고 어린애 장난을 시중들어 주는 것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막연히 미소를 지으며 내 곁을 재빨리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그 어느 때보다도 내게서 멀리 떠나가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미소에는 가끔 멸시에 가까운 표정, 
어딘가 비꼬는 듯한 표정이 섞여 있는 것 같았고 
또 그렇게 내 욕망을 피하는 데 재미를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스스로 나무람을 받을 짓을 하고 싶지 않고 
또 내가 무엇을 그녀에게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될 뿐 아니라 
무엇을 그녀에게 비난해야 할지도 몰라 
나는 마침내 모든 불만을 내 자신에게로 돌려 버렸다.
그처럼 크나큰 행복을 기대했던 며칠이 이렇게 흘러가 버렸다. 
나는 날이 흘러가는 것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 
날짜를 늘여 보고 싶지도 않았고 시간의 흐름을 늦추고 싶지도 않았다. 
그토록 나의 고통은 하루하루 커가기만 했다.
그러나 내가 떠나기 이틀 전 알리싸가 나를 따라 
폐광이 된 이회암 채굴터 근처에 있는 그 벤치에 함께 갔을 때, 
안개가 끼지 않아 지평선 끝까지 모든 것이 하나하나 파랗게 물들어 있었고, 
지나간 날의 가장 어렴풋한 추억마저 뚜렷이 생각나는 
그러한 어느 맑은 가을 저녁이었다. 
나는 참다 못해 어떤 행복을 잃었기에 지금 
난 이다지도 불행하게 되었나 하는 것을 말해 보았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어?"하고 그녀는 곧 대답했다.
"지금 너는 어떤 환영에 대한 사랑에 빠져 있는 거야."
"아니야, 환영이 아니야, 알리싸."
"마음 속에 그리는 어떤 영상과...."
"아아! 난 그런 걸 만들어 내고 있는 게 아니야. 
알리싸는 정말 나의 여인이었어. 나는 지금 옛날의 그 알리싸를 부르고 있어. 
알리싸! 너는 내가 사랑하던 여자였어. 
그때의 너를 너는 지금 어떻게 해버렸지? 어떻게 해버렸어?"
그녀는 잠시 동안 말없이 천천히 꽃 산 송이를 꺾으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제로옴, 왜 그전보다도 나를 덜 사랑한다고 솔직히 말하지 못해?"
"왜냐구? 그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야, 그건 정말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야."
나는 분노에 차 소리쳤다.
"왜냐하면 이보다 더 널 사랑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야."
"지금의 나를 사랑하고... 그러면서도 옛날의 나를 그리워하고!"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으려 하면서 또 어깨를 약간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나는 내 사랑을 과거에 붙여 둘 수는 없어."
땅이 내 발밑에서 꺼지는 듯싶었다. 
그래서 나는 무엇에고 잡히는 대로 매달렸다.
"사랑도 모든 다른 것도 함께 흘러가 버리는 거야."
"내 사랑은 내가 죽을 때까지 함께 할 거야."
"그것도 차츰 기울어 갈 거야. 
네가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알리싸는 이젠 단지 너의 추억 속에 남아 있을 뿐이야. 
그녀를 사랑한 적도 있었지, 하고 네가 단순히 추억에 잠길 날이 올 거야."
"너는 마치 다른 무엇이 내 마음 속에서 알리싸에 대치될 수 있거나 
또는 애 마음이 이제 더 사랑을 해서는 안된다는 투로 말하고 있어.
너 자신 나를 사랑해 왔다는 것은 다 잊었어? 
그렇지 않고서야 나를 괴롭히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듯이 보일 수가 있어?"
나는 파랗게 질린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다.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그녀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냐, 아냐. 알리싸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아무것도 변한 게 없지 않아?"
나는 그녀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그녀는 더욱 자신 있게 말을 이었다.
"한 마디로 말할 수 있는데, 왜 못하지?"
"무슨 말을?"
"나는 나이가 많아."
"쓸데없는 소리."
나는 그 당장 나도 또한 그녀만큼 나이를 더 먹었으며 
두 사람의 나이 차는 언제나 다름이 없다고 항의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유일한 기회는 이렇게 해서 지나가 버렸다. 
나는 말다툼에 끌려들어감으로써 모든 유리한 점을 포기한 폭이 됐다. 
나는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나는 그녀와 나 자신에 대한 불만을 품고 또 
그때까지 내가 '덕'이라고 부르던 것에 대한 막연한 혐오감과 
내 마음을 떠나지 않는 그 집념에 대한 울화에 가득 찬 채 퐁궤즈마르를 떠났다. 
이 마지막 해후에서 내 사랑을 너무 과장했던 나마지 
나는 모든 열정을 소비해 버린 것 같았다. 
처음 내가 항변해 보려던 알리싸의 말 한 마디가 
내 항변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생생하고 의기 양양하게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래! 그녀의 말이 맞을 거야, 
난 이제까지 환영만을 사랑하고 있었던 거야. 
내가 사랑했었고 아직도 사랑하고 있는 알리싸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거야... 
그래! 우리는 나이가 든 거야! 내 마음을 얼어붙게 한 
그녀의 멋없는 변모도 결국은 자연스러운 일에 지나지 않는 거야.
내가 그녀를 조금씩 조금씩 높여 갔고 
내가 좋아하던 모든 것으로 그녀를 장식하면서 
그녀를 마음속에서 우상화했다고 한들 
그러한 내 노력에서 지금 피로 외에 무엇이 남아 있는가? 
저 혼자 있게 되자마자 알리싸는 자기의 수준, 그 평범한 수준으로 내려가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 내려가 버리자 나는 사랑할 기분이 내키지 않게 되었다. 
아아!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그녀를 올려 놓았던 
그 높은 곳에서 다시 그녀와 함께 있으려던 그 덕행에 대한 
헌신적인 노력도 이제는 얼마나 어리석고 터무니 없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인가! 
조금만 긍지가 덜했던들 우리의 사랑은 순탄했을 것이다. 
하지만 재상이 없이는 사랑에의 집착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고집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충실한 것도 아니다. 
충실하다면 그것은 과오에 대해서 충실할 뿐이다. 
지금까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고 자인하는 것이 가정 현명한 일이 아닐까?
그러던 때에 아테네 학원에 추천을 받아 
나는 별다른 야망도 흥미도 없이 다만 떠난다는 생각에서, 
달아나 버리기나 하는 것처럼 즐거워서 입학을 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