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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 앙드레 지드.32

Joyfule 2010. 3. 20. 10:08
 
좁은 문 - 앙드레 지드.32   

그런대로 나는 다시 한번  알리싸를 만났다. 
그것은 3년 후 여름도  끝날 무렵이었다. 
열 달 전에 나는 그녀의 편지로 
삼촌이  별세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시 나는 여행을 하고 있었던  팔레스티나에서 
꽤 긴 답장을 부쳤지만 종내 회답이 없었다.
르아브르에 있던 내가 어떤 구실로 자연스럽게 
퐁궤즈마르에까지 가게 되었던 것인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알리싸가 그곳에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홀로 있지 않으면 어쩔까 하고 걱정이 되었다. 
나는 그곳에 갈 것이라고 예고도 하지 않았다. 
여느 때 방문하는 것처럼 찾아가는 것이 싫어서 나는 이렇다 할 생각 없이 걸어갔다. 
들어가 볼 것인가? 그래 그렇게 하자. 
나는 단지 홀로 그 가로수 길을 거닐다가 혹시 지금도 가끔 
그녀가 와서 앉을지도 모를 벤치 위에서 앉아 보자...
그리고 나는 내가 가버린 후에 내가 다녀갔다는 것을 그녀에게 알리려면 
어떤 표시를 남겨야 할 것인가 하는 것까지 궁리했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나는 천천히 걸었다. 
그녀를 만나지 않기로 결심을 하자 내 마음을 졸라매고 있던 
쓰라린 슬픔은 거의 감미로운 애수로 바뀌었다. 
나는 벌써 가로수가 있는 길까지 이르렀다. 
나는 들키지나 않을까 염려가 되어 
농가의 안마당을 구분하고 있는 둑을 따라 길가를 걸었다. 
나는 이 둑의 한 지점에서 올라갔다. 
낯선 정원사가 오솔길에서 제초 작업을 하고 있다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새로 세워진 울타리가 안쪽을 둘러싸고 있었다. 
내가 지나가는 발자국소리를 듣고 개가 짖었다. 
좀 더 나아가 가로수길이 끝나는 곳엣 나는 흙담이 있는 바른편으로 돌았다. 
그러고는 이제 막 걸어온 길과는 병행되는 
너도밤나무 숲이 있는 곳을 향해 채소밭의 그 비밀 문 앞을 지나갔다. 
그때 문득 이 문을 통해 정원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문은 닫혀 있었다. 
그러나 안의 빗장이 퍽 약해서 나는 어깨로 밀어 부술까 하고 생각했다. 
바로 이때 발자국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담이 움푹 들어간 곳에 몸을 숨겼다.
정원에서 나오는 것이 누구인지 나는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발자국소리를 듣고 그것이 알리싸라는 걸 알았다.
그녀는 몇 걸음 앞으로 나오더니 가냘픈 목소리로 부르는 것이었다.
"제로옴이야?...."
심하게 고동을 치던 내 심상이 딱 멈추었다. 
그러고는 막혀 버린 나의 목에서 단 한 마디 말도 나오지 못하는 동안 
그녀는 좀 더 힘을 주어 되풀이해 불렀다.
"제로옴, 너지?"
그녀가 나를 이렇게 부르는 소리를 듣자 
나는 너무도 벅찬 감동에 못이겨 무릎을 끊고 앉았다. 
여전히 내가 대답을 못하자 알리싸는 몇 걸음 걸어나와 담을 돌았다. 
그러자 나는 내 몸에 알리싸를 느꼈다. 
그녀는 당장에 보기가 두려운 듯이 두 팔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내게로 몸을 굽히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그녀의 그 가냘픈 두 손에 마구 입술을 갖다댔다.
"왜 숨었지?"
그녀는 헤어져 있던 3년간이 
불과 며칠 동안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어떻게 나인 줄 알았어?"
"기다리고 있었어."
"기다리고 있었다고?"
나는 너무나도 놀라서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풀이할 뿐이었다. 
내가 여전히 무릎을 끓고 있자니까,
"벤치로 가자."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래, 나는 다시 한번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 
사흘 전부터 나는 저녁마다 이곳에 와서 오늘처럼 너를 불렀어. 
왜 대답을 하지 않았지?"
"네가 그렇게 갑자기 오지 않았던들 난 너를 보지 못하고 떠났을 거야."
나는 기절할 뻔했던 감동을 억누르면서 처음 말했다.
"마침 르아브르를 지나던 길이라 저 가로수 길을 좀 거닐어 보고 
정원 주변도 돌아보고, 요즘도 네가 와서 앉을 듯 싶은 
이회암 채굴터에 있는 그 벤치에서 잠시 쉬어볼까 했을 따름이야. 그러고는...."
"사흘 전부터 저녁마다 이곳에 와서 내가 무엇을 읽었나 좀 봐."
그녀는 내 말을 막으면서 한 다발의 편지를 내밀었다. 
내가 이탈리아에서 보낸 편지들이었다.
 이때 나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변해 있었다. 
야위고 파리해진 그녀의 모습이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내 팔에 기대 의지해 있으면서도 
그녀는 춥거나 혹은 겁에 질린 듯 내게 바짝 붙어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복상 중이었다. 
모자 대신 머리에 쓰고 있던 검은 베일이 그녀의 얼굴을 더욱 창백하게 보이게 했다.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금시 기절할 것 같았다.
나는 요즈음 퐁궤즈마르에 그녀 혼자 있는지의 여부가 궁금해 물었다. 
혼자는 아니었다. 로베르가 함께 있다는 것이었다. 
8월에는 줄리에뜨와 에뜨와르, 
그리고 그들의 세 아이가 와서 한 달 동안 함께 지내고 갔다고도 했다. 
우리는 벤치까지 왔다. 우리는 앉았다. 
그러나 얼마 동안 우리의 대화는 여전히 진부한 소식을 묻는 정도였다. 
그녀는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나는 별로 내키지 않은 기분으로 이제는 내가 
일에 대한 흥미를 상실했다는 것을 그녀가 깨달아 주었으면 싶었다.
그녀가 전에 나를 실망시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었다. 
그렇게 보였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나는 원한과 사랑으로 마음이 가득 차서 
될 수 있는 대로 쌀쌀하게 아야기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때때로 용솟음쳐 올라오는 감동에 
목소리가 떨려나와 스스로도 원망스러웠다.
얼마 전부터 한 조각 구름에 가리어 있던 석양이 
우리 맞은편 지평선에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는 턴 빈 들판을 떨리는 낙조로 가득 채우고 
우리 발 밑에 펼쳐 있는 좁은 골짜기를 느닷없이 
붉은 빛으로 뒤덮더니 이윽고 사라져 버렸다. 
나는 황홀해서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 빛나는 도취경이 다시 한번 나를 휘감고 
나의 뼈속까지 스며드는 것을 느끼자 원망의 마음은 사라져 버리고 
마음 속에서는 사랑의 속삭임만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몸을 굽혀 내게 기대고 있던 알리싸가 일어섰다. 
그녀가 웃옷 속에서 보드라운 종이에 싼 조그마한 물건을 꺼내 
내게 내밀려다가 망설이듯 멈추어 버리는 것을 의아해서 바라보자.
"자, 제로옴, 이건 나의 자색 수정 십자가야. 
오래 전부터 네게 주고 싶었어. 
사흘 전서부터 저녁마다 이렇게 가지고 왔어."
"그걸 어떻게 하라는 거지?"
나는 아주 투명스럽게 물었다.
"나에 대한 추억으로 이걸 간직했다가 너의 딸에게 주어."
"딸이라니?"
무슨 말인지 깨닫지를 못해 나는 알리싸를 쳐다보며 소리쳤다.
"조용히 내 말을 잘 들어줘, 부탁이야. 
아니, 나를 그렇게 쳐다보지 말아. 그렇지 않아도 말하기가 힘들어. 
하지만 이것은 꼭 이야기하고 싶어. 
이것 봐, 제로옴, 언젠가는 결혼할 것 아냐? 아니, 대답하지 말아. 
말을 막지 말아 줘. 부탁이야.
나는 단지 내가 너를 퍽 사랑했다는 것을 네가 잊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그리고...벌써 오래 전부터, 3년 전부터...
네가 좋아하던 이 조그마한 십자가를 너의 딸이 
어느 날 누가 준 것인지도 모르면서 
나의 기념으로 달아줄 날이 올 것을 생각해 보았어... 
그리고 어쩌면 그 애에게... 내 이름을 붙여 줄 수도 있으리라고...."
그녀는 목이 메어 말을 끊었다. 
나는 적의에 찬 어조로 소리쳤다.
"왜 네가 직접 주지 않고?"
그녀는 말을 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녀의 입술은 마치 흐느껴 우는 어린애의 입술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울지는 않았다. 
이상하게 반짝이는 그녀의 눈길은 얼굴을 
초인간적이며 천사와 같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