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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헷세 연보

Joyfule 2010. 8. 12. 07:38

헤르만 헷세 연보

1877년
7월 2일 남부 독일 뷔르템베르크주의 나골드 강변에 있는 슈바르츠발트의 칼브에서 태어남. 그의 아버지 요하네스 헷세 Johannes Hesse(1847~1916)는 러시아 국적을 가진 지방청 의사로 일생 동안 인도와 중국의 철학과 정신 세계에 몰두해서 헤르만에게 동양 사상의 연구를 도와주었다. 어머니 마리 군데르트 Marie Gundert(1842~1902)는 선교사이며 인도 학자였던 헤르만 군데르트 박사의 딸로 요하네스 헷세와 재혼하여 아델레 헤르만 Hermann (1875~1949), 파울 Paul(1878년 출생 직후 사망), 게르트루트 Gertrud(1879~1880), 마리 Marie(1880~1953), 한스 Hans(1882~1935)를 슬하에 두었다.
1881년
양친과 함께 바젤로 이주하여 1886년까지 그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냄.
1883년
아버지가 스위스 국적을 취득함.
1886년
가족과 함께 다시 고향 칼브로 돌아옴. 1889년까지 실업학교에 다님. 나골드 강변의 아름다운 자연은 작가의 시적 상상력을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겨주었다.
1890년
뷔르템베르크주의 국가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괴핑겐에서 라틴어 학교에 다님. 이때의 학교 생활을 그린 것이 「라틴어 학교 학생」이다. 1891년 7월에 튀빙겐 수도원 재단에서 학비를 면제받고 신교 신학도로서 교육을 받기 위한 전제 조건이 되는 이 시험에 합격했기 때문에 헷세의 아버지는 스위스 시민권을 포기하고 1890년 11월 뷔르템베르크주의 국적을 취득했다.
1891년
9월에 마울브론 신학교에 입학. 처음에는 잘 적응했으나 7개월 후인 1892년 4월에 그곳을 탈출했는데 훗날 그가 고백하고 있듯이 “시인이 되거나 아니면 전혀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라틴어 학교에서 신학교까지의 학창 시절은 『수레바퀴 아래서』에 잘 그려져 있다. 그는 정신이상으로 간주되어 바트 볼에 있는 블룸하르트 목사의 병원에서 두달 동안 치료를 받았는데 6월에 연상의 여인 오이게니 콜프 Eugenie Kolb에 대한 사춘기적인 사랑으로 고민하다가 자살을 기도한 후 슈데텐 정신병원으로 옮겨져 3개월간 치료를 받았다. 부모들이 원하는 만큼의 정신적 치유는 이루어지지 않은 채 11월 칸슈타트 김나지움에 입학하였다.
1893년
7월에 중등학교 자격시험에 합격하였지만 우울증과 자살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서 학업을 포기하고 에쓰링겐의 마이어 서점에 취직했으나 곧 그만두었다. 그 후 얼마동안 칼브 출판협회에서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독서에 몰두했다.
1894년
다음해 가을까지 페로의 탑시계 공장에 실습생으로 취직하였으나 다시 그만둠.
1895년
1898년까지 튀빙겐에 있는 헤겐하우어 서점에서 처음에는 점원으로 다음에는 서적 분류 조수로 일함. 이곳에서 어느 정도 정신적인 안정을 되찾아 괴테를 중심으로 한 문학사를 탐독했으며 처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1896년 무렵부터 시들을 문학잡지에 발표하는 동시에 『슈바이니겔 Schweinigel』이란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 원고는 분실되었다. 훗날 장편소설이 된 『헤르만 라우셔 Hermann Lauscher』의 제1장인 「나의 유년시절 Meine Kindheit」을 집필하였다.
1899년
최초의 시집 『낭만의 노래 Romantische Lieder』와 산문집 『한밤중 후의 한 시간 Eine Stunde hinter Mitternicht』을 자비 출판하였다. 릴케와 숄츠에 의해 긍정적인 평을 들었지만 경제적인 실패를 감수해야만 했다. 가을에는 바젤로 거처를 옮겨 라이히 서점의 서적 분류 조수로 취직.
1900
튀빙겐에서 쓰기 시작했던 고백적 작품인 『헤르만 라우셔의 유작과 시 Hinterlassene Schriften und Gedichte von Hermann Lauscher, herausgegeben von Hesse』를 라이히사에서 출판. 이 책은 1907년에 「룰루 Lulu」와 「잠 못이루는 밤 Schlaflose Naechte」을 중보하여 『헤르만 라우셔』라는 축소된 제목으로 다시 출판되었다. “이 초기 작품은 후기 작품들의 근본적인 모티브를 선취하면서 이미 헷세의 성숙기와 거듭 유사한(내지 더욱 발전된) 편집자의 태도, 즉 비현실과 현실간의 교체 작용과 의성어적 요소의 문학적 가공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제2의 시집 『야상곡 Notturni』을 인쇄는 하지 않고 자필로 쓴 형식으로 친구와 후원자들에게 팔려고 내놓음.
1901년
이탈리아의 플로렌스·제노바·피사·베니스 등으로 여행한 후 바젤에 있는 바텐빌 고서점에 취직함. 『스위스 일반 신문 Allegemeine Schweizer Zeitung』에 기사와 서평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는 그의 작품보다 더 큰 명성과 부를 작가에게 안겨주었다.
1902년
바젤과 이탈레아에서 쓴 1백여 편의 시를 모아 『시집 Gedichte』을 베를린의 그로테사에서 출판하여 어머니에게 헌납하였지만 이 책이 출판되기 직전 어머니가 돌아가심.
1903년
서점을 그만두고 플로렌스·베니스 등을 다시 여행함. 사무엘 피셔 출판사의 청탁으로 1901년에 시작했으나 완성시키지 못한 카멘친트의 원고를 완성시킴.
1904년
친구인 핑크 Ludwig Finckh에게 헌납된 교양소설 『페터 카멘친트 Peter Camenzind』가 출판되어 일약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게 되었다. 루소와 켈러, 아씨시의 영향을 받긴 했지만 주로 자신의 체험을 시적으로 서술한 이 작품으로 출판된 그 해에 〈비엔나 바우에른펠트 문학상 Wiener Bauernfeld—Preis〉을 받았다. 9살 연상의 마리아 베르눌리 Maria Bernoulli(1868~1963)와 결혼하였는데 마리아는 바젤의 학자 집안 출신으로 사진 아틀리에를 경영하고 있었다. 그들은 보덴 호수 근방의 가이엔호펜에서 1912년까지 살았다.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브루노 Bruno(1905~), 하이너 Heiner(1909~), 마르틴 Martin(1911~1968)이 태어났다. 가이엔호펜에서의 창작기 동안 헷세는 여러 가지 신문과 잡지 등에 기고하기도 했는데 이 당시의 문학은 “주로 시적 사실주의의 특성을 지닌 우수적이고 풍자적인 산문이” 주축을 이루었다. 『복카치오』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등의 전기적 작품을 쓰기도 했다.
1906년
마울브론에서 지낸 고뇌에 가득 찼던 청춘 시절의 운명을 그린 장편 『수레바퀴 아래서 Unterm Rad』가 출판되어 큰 성공을 거둠.
1907년
빌헬름 2세의 친정에 반대하는 자유주의적 격주간지 『3월 Maerz』의 창간에 참여, 1912년까지 고옹 편집인으로 일함. 「유년 시대부터」 「대리석재 공장」 「마른 풀의 달』 「라틴어 학교 학생」 「가을의 도보여행」을 묶어 중단편집 『바닷가』와 단편집 『이편에서 Diesseits』를 출판하였다.
1908년
단편집 『이웃 삶들 Nachbarn』을 출판.
1909년
브르멘에서 「파우스트와 차라투스트라」에 대하여 강연.
1910년
음악가 소설 『게르트루트 Gertrud』 출판.
1911년
『도중에서 Unterwegs』란 시집을 발표. 이때 헷세는 외면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육체적인 고통과 신경 쇠약에 시달려 계속 의사의 치료를 받으며 여러 번 요양지에서 체제한 후 인도·싱가폴·수마트라·실론 등으로 여행함으로써 내면적인 압박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이 여행은 유럽으로부터의 도피, 동양에의 동경, 가정 생활에서의 갈등의 타개에서 비롯되었지만 기대에 못미쳐 실망을 안은 채 12월에 다시 유럽으로 돌아왔다.
1912년
스위스 베른 근교의 오스터문딩겐으로 가서 옛 친구인 화가 벨타 Albert Welti의 집으로 이사함. 단편집 『우회로 Umwege』 발표.
1913년
아시아 여행기 『인도에서 Aus Indien』을 출간했는데 이 작품은 인도 여행기라기보다는 대부분 말레이지아·싱가폴·수마트라의 이야기를 쓴 21편의 짧은 기행문으로 되어 있다.
1914년
프라그멘트로 남아 있는 장편 『꿈속의 집 Das Haus der Traume』 집필. 예술가 소설인 동시에 부부소설인 『로스할데 Rosshalde』를 출판했는데 이 소설에서 헷세는 “부인과 남편 사이의 긴장”을 “존재의 생성, 안정과 동요, 조화와 부조화 사이의 어쩔 수 없는 분열”로 묘사하여 자기 자신의 결혼 생활에 대한 파탄과 예술가 부부의 문제성을 제기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 친구여, 이 음조는 그만두오! O Freunde, nicht diese Toene!」를 필두로 1919년에 이르기까지 독일·스위스·오스트리아의 신문과 잡지에 수많은 정치 기사와 논문, 경고장과 공개 서한을 발표하여 극단적 국수주의자들과 일부의 신문들로부터 “조국의 배반자”로 낙인 찍히고 배척을 당하였다. 군 복무를 위해 자진 입대했으나 부적격자로 판정되어 베른의 독일 대사관에서전쟁포로 후생 사업소의 일을 맡았다. 작품을 쓸 만한 여유가 거의 없으므로 이 시기에 발표된 여러 작품들은 거의 전쟁이 나기 전에 씌어진 것들이다.
1915년
단편집 『길가에서 Am Weg』 시집 『고독자의 음악 Musick des Einsamen』, 장편 『크눌프 생애의 세 가지 이야기 Drei Geschichten aus dem Leben Knulps』가 출판되었다. 시를 쓰는 방랑자의 이야기인 『크눌프』에는 자연과 인간과 시의 우주적인 단일성이 초기의 모든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낭만적인 수법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반전적인 서신을 교환하여 우정을 맺게 된 프랑스의 로맹 롤랑이 내방하였다. 이들의 친교는 평생 지속되었다.
1916년
시집 『초봄 Vorfruehling』과 오래 전에 잃어버렸던 유년 시절의 고향으로 되돌아오는 젊은이의 이야기를 그린 단편 「청춘은 아름다워라 Schoen ist die Jugend」를 발표함. 전쟁 동안 헷세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 부인과 막내 아들의 발병 등으로 개인적인 위기를 겪으며 정신분석학에 심취하게 되었는데 융의 제자인 요셉 B. 랑 Joseph Bernhard Lang 박사로부터 정신 의학적인 치료를 받았다. 이 치료를 통해 헷세는 자기 자신의 갈등과 문제를 갈파하고 극복하기 시작하여 사상과 창작에 새로운 방향과 새로운 형성의 면모를 지니게 되었다.
1919년
장편 『데미안 Demian. Die Geschichte einer Jugend von Emil Sinclair』 출판. 에밀 싱클레어란느 익명으로 베를린에서 출판된 이 성장소설에서 헷세는 이전의 “낭만적인 작풍”을 지양하고 융적인 분석심리학에서 나온 주요 사상과 인식을 문학적으로 서술하고, 서로 불가분의 관계로서 하나의 단일성에 속하는 밝고 어두운 두개의 세계와 양극적인 단일성에 대한 상징적 요소를 시적으로 표현하였다. 이 작품으로 헷세는 〈폰타네 문학상〉을 받게 되지만 이 상이 초보자를 위한 것이므로 자신의 작품임을 밝히고 상을 되돌려주었다. 시대극 『귀향 Die Heimkehr』, 체험기와 단편 모음집인 『작은 정원 Kleiner Garten』, 『동화집 Maerchen』, 처음에는 무명으로 출판된 정치적 팜플렛 「차라투스트라의 복귀 Zarathustras Wiederkehr」 등의 작품을 발표하였고 볼테레크 Richard Woltereck와 함께 월간지 『생명의 외침 Vivos Voco』을 창간하였다. 5월에 아내를 요양소에 보내고 아이들은 친구와 친척에게 맡기고 테씬주의 몬타뇰라로 가서 그곳에서 여생을 보냄.
1920년
풍경기이며 여행기인 『방랑 Wanderung』과 「클라인과 바그너 Klein und Wagner」 「클링소르의 마지막 여름 Klingsors letzter Sommer」 「어린이의 영혼 Kinderseele」을 묶은 단편집 『클링소르의 마지막 여름』, 헷세 자신의 다채로운 그림과 스케치가 함께 들어 있는 시집 『화가의 시Gedichte des Malers』가 출판되었다.
1921년
도스토예프스키에 관한 두 편의 에세이를 실은 『혼돈 속으로의 조망 Blick ins Chaos』를 발표하여 많은 물의를 일으킴. 이전에 발표한 시를 선한 『시선집 Ausgewaehlte Gedichte』과 『테씬에서의 수채화 11편 Elf Aquarelle aus dem Tessin』을 출판하기도 했지만 우울증의 새로운 위기에 빠져들어 추리히 근방의 쿠스나흐트에서 융의 정신분석적 치료를 받았다.
1922년
어느 정도 우울증을 극복한 후 종교적인 성장소설인 『싯다르타 Siddhartha. Eine indische Dichtung』를 발표하였는데, 그중 제1부는 로맹 롤랑에게 2부는 반생을 일본에서 보내며 작가의 동양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외사촌 동생 군데르트 Wilhelm Gundert에게 헌납했다. 인도적 내지 중국적 지혜에 기반을 둔 이 작품에서 헷세는 우주의 전체성에 대한 예감과 모든 인생의 비밀스런 단일성에 대한 예감을 갖게 되며 마지막에는 현상계를 초월한 순수한 존재에 대한 초월적인 견해에 도달하여 “전체를 하나에서, 하나를 전체에서”라는 전일사상을 투시하게 된다.
1923년
첫 부인 베르눌리와 정식으로 이혼하고 스위스 국적을 취득함. 『싱클레어의 비망록 Sinclairs Notizbuch』 출판. 취리히 근방의 요양지 바덴으로 가서 관절염과 신경통을 치료하였는데 그 후로는 1952년까지 매년 말이면 이 요양소를 찾아갔다.
1924년
바젤에서 스위스 여류 작가인 리자 벵거 Lisa Wenger의 딸인 20살 연하의 어린 성악가 루트 벵거 Ruth Wenger와 두번째 결혼.
1925년
요양지 바덴에서의 자서전적 기록인 『요양객 Kurgast』를 출판했으며 루트 벵거에게 수채화와 함께 자필로 쓴 사랑의 동화 『픽토르의 변신 Piktors Verwandlungen』을 헌납하지만 두 사람은 잠시 동거 생활을 한 후 곧 헤어졌다. 토마스 만을 방문함.
1926년
기행과 자연 풍물에 대한 감상을 모은 『그림책 Bilderbuch』을 출판했으며 〈프러시아 예술 아카데미 Preussische Akademie der Kuenste』의 문학 분과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부인의 요청에 따라 공식적으로 이혼. 이 당시 경제적으로 몹시 곤란을 받던 헷세는 자필로 쓴 동화와 시를 애호가들에게 판매하는 동시에 여러 차례 남부 독일의 도시에서 자기 작품의 일부를 낭독하기도 했다. 이 강연 여행은 자서전적 작품 『뉘른베르크 여행 Die Nuernberger Reise』에 자세히 보고되어 있다. 자기 자신의 인생과 활동에 대한 절망과 그 시대의 정신적 출구 없음에 대한 지속적 감정 속에서 “후기 현대인들의 바이블”이 되어 있는 문제의 장편소설 『황야의 늑대 Der Steppenwolf』를 발표하였다. 또한 작가의 탄생 50주년을 기념하여 오늘날까지도 가장 훌륭한 전기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 후고 발 Hugo Bull의 『헤르만 헷세. 그이 생애와 작품 Hermann Hesse. Sein Leben und Werk』이 출판되었다. 이로 인해 강렬했던 생의 권태와 육체적 허탈 상태를 다소 극복하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오스트리아의 여류 예술사가 니논 돌빈 Ninon Dolbin(1895~1966)이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 헷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영리하고도 이해심 많은 삶의 반려자가 되었던 니논과 헷세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서신 교환을 하고 있었는데 이 해부터 동거 생활을 하였다.
1928년
1904~27년 사이에 집필한 수필을 묶은 『관찰 Betrachtungen』과 『황야의 늑대』에 대한 보충적인 시집 『위기 Krisis』 출판.
1929년
1915년 이후에 쓴 시와 새로운 시를 모은 『밤의 위안 Trost der Nacht』와 세계 문학을 읽기 위한 색인서인 『세계 문학 문고 Eine Biliothek der Weltliteratur』 발간.
1930년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Narziss und Goldmund』 출판. 1927~29년에 씌어진 이 작품에는 환상적인 중세기의 마리아 브론 수도원에서 엄격한 금욕적 정신인 나르치스와 육감적으로 생을 긍정하는 자연인 골드문트 사이의 우정이 그려져 있는데 비평가들 사이에서 헷세의 “가장 아름다운 책” 또는 “드디어 이루어진, 고통스러이 탄생된 조화의 가장 아름다운 증거”로 이해되고 있다.
1931년
니논과 공식적인 결혼. 이전에 발표된 『싯다르타』, 「어린이의 영혼」 「클라인과 바그너」 「클링소르의 마지막 여름」을 한데 엮은 『내면으로의 길 Weg nach Innen』을 출판하였다. 여름에 헷세는 카무치 별장을 떠나 몬타뇰라의 새집으로 이사했는데 이 헷세 별장 casa Hesse은 친구인 미술 애호가 보드머 Hans C. Bodmer가 제공하였다.
1932년
『동방순례 Die Morgenlandfahrt』를 출판.
1933년
아들 브루노와 하이너, 마르틴에게 헌납된 『작은 세계 Kleine Welt』 출판.
1934년
과거의 시를 선별 정리한 시선집 『생명의 나무에서 Vom Baum des Lebens』 출판.
1935년
1904~27년에 집필된 단편을 모은 『우화집 Fabulierbuch』 출판. 이 책에는 전설과 동화와 유희적으로 경박하게 구성된 수많은 단편들이 수록되었다.
1936년
전원시집 『전원에서의 시간들 Stunden im Garten』 발간. 〈켈러 문학상 Gottfried Keller – Preis〉 수상.
1937년
가까이 지내던 여러 사람들에 대한 개인적인 회상과 애도와 그리움을 서술한 『회고기 Gedenkblaetter』가 누이동생에게 헌납되었다. 『신시집 Neue Gedichte』과 시구로 씌여진 유년 시절의 회상기 『불구 소년 Der lahme Knabe』가 자비 출판되었다.
1939년
1945년까지의 2차 세계대전 동안 헷세의 작품은 독일에서 “원치 않는 문학”이 되어 나치 관청으로부터 인쇄를 위한 종이가 허락되지 않았다. 헷세의 출판업자 슈르캄프 Peter Suhrkamp와의 합의하에 스위스의 프레츠와 바스무트 Fretz & Wasmuth사가 단행본으로 된 『헷세 전집 Gesammelte Werke in Einzelausgaben』을 출판하게 되었다.
1942년
헷세의 시를 총망라한 최초의 전집 『시집 Gedichte』이 출판.
1943년
1931~42년에 씌어진 만년의 대작 『유리알 유희 Das Glasperlenspiel. Versuch einer Lebensbeschreibung des Magister Ludi Josef Knecht samt Knechts hinterlassenen Schriften』 출판. “창작하고 생각하는 인생의 총체이며, 드높은 보루에서부터 이제까지의 노정의 상황을 밝혀주는” 작품으로 헷세 문학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1945년
시선집 『꽃가지 Blutenzweig』와 장편소설의 프라그멘트인 『베르톨트 Bertold』, 새로 집필된 단편과 동화를 엮은 『꿈의 발자취 Traumfaehrte』가 출판되었다.
1946년
1914년 이후에 씌어진 전쟁과 정치에 관한 수상집 『전쟁과 평화 Krieg und Frieden』 출판. 전쟁이 끝나면서부터 헷세의 책들이 다시 슈르캄프 출판사에서 독일판으로 나오게 되었다. 전쟁 이후 헷세의 작가적 활동은 그리 활발하지 못하였지만 〈프랑크푸르트시의 괴테 문학상 Goethe Preis der Stadt Frankfurt am Main〉을 받은 데 이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작가로서의 명예를 먿었다.
1947년
베른 대학 철학부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고향인 칼브시의 명예 시민이 됨.
1950년
브라운슈바이크시의 〈라아베 문학상 Wilhelm Raabe-Preis〉 수상.
1951년『후기 산문집 Sete Prosa』과 『서간집 Briefe』 출판.
1952년
작가의 75회 탄생일을 기념하여 「헷세 전집 Gesammelte Dichtungen』이 6권으로 출간.
1954년
『헷세 – 롤랑 서신 교환집 Briefe: Hermann Hesse – Romain Rolland』 출간.
1955년
『불제 Beschwoerungen』가 니논에게 헌납됨. 침착하고도 원숙한 필치로 씌어진 이 산문집엔느 보고문과 회상기와 사색문이 섞여 있다. 프러시아의 〈프르 르 메르뜨 Pour le Merite〉훈장을 받고 〈독일 서적 협회의 평화상 Friedenspreis des Deutschen Buchhandels〉을 수상하였다.
1956년
바덴 – 뷔르템베르크의 독일 예술 촉진 위원회에서 〈헤르만 헷세상 Hermann Hesse – Preis〉을 창설.
1957년
『헷세 전집 Gesammelte Schriften』이 7권으로 증보됨.
1961년
옛날 시와 새로 쓴 시를 선별해서 엮은 시집 『단계 Stuefen』 발간.
1962년
몬타뇰라의 명예 시민이 됨.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집필에 여념이 없었던 헷세는 죽음이 찾아오기 1주일 전에 마지막 시 「꺾어진 가지 Knarren eines geknichkten Astes」를 집필하였고 마지막 순간까지 시집 교정을 보았다. 8월 9일 아침 뇌출혈로 인해 85세의 생애를 마쳤으며 이틀 후 몬타뇰라 근방의 성 아본디오 St. Abbondio 묘지에 안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