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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사랑 - 막스뮐러 5

Joyfule 2010. 8. 14. 09:21
 
   독일인의 사랑 -  막스뮐러 5 
셋째 회상   
어린 시절의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은 오래 가지 않는다.   
따뜻한 눈물 같은 비를 잠깐 흘리고 나면 곧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렇듯 나는 얼마 안 가 다시 그 성에 갔고, 
후작 부인은 내게 키스를 하도록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 나서 부인은 자신의 자식들, 어린 공자와 공녀들을 데려왔고, 
우리는 오랫동안 사귄 친구들처럼 어울려 놀았다.
학교가 파하고 돌아와 - 그때 벌써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 
그 성에 놀러 갈 수 있었던 그때는 참으로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거기에는 마음속으로 갈망하던 모든 것이 있었다.   
어머니가 상점 진열장을 가리키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한 주일 내내 먹고 살 돈을 내야 살 수 있다고 설명해 주셨던 
값비싼 장난감들이 그 성에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리고 후작 부인에게 청하면 그것들을 집으로 가져와 
어머니께 보일 수도 있었고, 때로는 내가 아주 가질 수도 있었다.   
또 책방에서 아버지와 함께 본 예쁜 그림책들, 
그렇지만 아주 착한 아이들만 가질 수 있다고 했던 
그림책들도 나는 그 성에서 종종 뒤져 보며 몇 시간이고 들여다 볼 수도 있었다.   
어린 공자들에게 속한 것이면 무엇이든 나도 가질 수 있었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믿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가져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장난감들을 다른 아이들에게 선사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나는 문자의 의미 그대로 한 사람의 어린 공산주의자였다.
다만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팔에 휘감으면 꼭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금빛 나는 뱀팔찌를 
후작 부인이 우리에게 갖고 놀라고 주셨다.   
집에 돌아올 때 나는 그것을 팔에다 감고 있었다.
그렇게 어머니를 깜짝 놀라게 해 드릴 속셈이었다.   
그런데 길가에서 한 부인을 만났다.   
부인은 내가 가진 금빛 나는 뱀을 보고는 구경 좀 하자고 청하더니, 
그런 금으로 된 뱀을 가질 수 있다면 
남편을 감옥에서 풀려 나오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연히 나는 한 순간도 생각하지 않고 
황금 뱀팔찌를 그 여인에게 던져 주고 집으로 뛰쳐와 버렸다.   
그 이튿날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그 불쌍한 여자가 성으로 끌려와 울고 있고, 
사람들은 그 여자가 나한테서 팔찌를 훔쳤다고들 떠들었다.   
그 소리를 듣자 나는 너무도 화가 나서 그 팔찌는 내가 그 여자에게 선사한 것이며, 
나는 그것을 다시는 갖고 싶지 않다고 진지하게 열을 내어 설명했다.   
다음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그 일이 있고 난 뒤부터는 내가 집으로 가져오는 물건을 
일일이 후작부인에게 보였던 것만은 기억하고 있다.
그렇지만, 내게 있어서 <내 것>과 <남의 것>이라는 개념이 
완전히 개발되기까지는 그러고도 한참이 걸렸다.   
나는 빨간 색과 파란 색을 구별하는 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마찬가지로 내 것과 남의 것의 구별은 한동안 애매하게 혼동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 일로 친구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맨 마지막 사건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어머니가 내게 사과를 사오라고 돈을 주셨을 때의 일이었다.
어머니는 1그로셴짜리 은화를 주셨다.   
그런데 사과 값은 6페니히밖에 되지 않았다.   
가게 주인 여자한테 1그로셴짜리 은화를 내주자, 
여인은 내가 보기에 아주 우울한 표정으로 
오늘은 하루 종일 아무것도 팔지 못했기 때문에 거스름돈이 한푼도 없노라 말했다.  
그리고는 1그로셴어치를 모두 사가길 원하는 것이었다.   
그때 6페니히짜리 동전이 내 주머니에 있다는 생각이 얼핏 떠올랐다.   
그것이면 지금의 곤란한 문제가 풀 거라는 생각에 기뻐하면서 
그것을 부인에게 내주며 말했었다.
이제 이걸로 나한테 6페니히를 거슬러 줄 수 있잖아요?
하지만 그녀는 내 뜻을 영 알아채지 못하고는 1그로셴짜리 은화를 내게
되돌려 주고 6페니히짜리 동전을 받아 넣었던 것이다.
내가 거의 매일처럼 어린 공자들과 놀기 위해, 
그리고 얼마 후에는 같이 프랑스 어를 배우기 위해 성으로 올라갔던 그 시절, 
나의 기억 속에 파고든 또 하나의 모습이 있다.   
그것은 후작의 딸로서 백작의 지위를 가진 마리아라는 소녀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출산 직후 세상을 떠나, 후작은 재혼을 했던 것이다.
내가 그녀를 언제 처음 보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녀는 숱한 기억의 어둠으로부터 아주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처음에는 투명한 그림자처럼 아련한 모습이던 것이 
점점 윤곽이 잡히며 나를 향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는 폭풍우 치는 밤 홀연히 구름 베일을 벗고 
얼굴을 드러내 달과 같이 마침내 내 영혼 앞에 우뚝 서 있는 것이다.
당시 그녀는 늘 병에 시달렸으며 말이 없었다.   
내가 볼 때마다 늘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침대에 누인 채 두 명의 장정이 우리들 방으로 옮겨 왔고, 
그녀가 피곤해지면 다시 옮겨 가곤 했다.   
그렇게 그녀는 온통 새하얀 차림으로 누워서 두 손은 대개 앞으로 모아 쥐고 있었다.
얼굴은 말할 수 없이 창백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온화하고 아름다왔고, 눈은 바닥을 헤아릴 수 없이 그윽했다.   
그래서 나는 곧잘 생각에 잠겨 앞에 서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 여자도 낯선 타인에 속할까? 하고 자문해 보곤 했다.   
그럴 때 그녀는 종종 내 머리에 손을 얹곤 했다.   
그러면 마치 무엇인가 내 온몸을 통해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나는 도망칠 수도 뭐라고 입을 땔 수도 없이 꼼짝없이 사로잡혀
그녀의 그윽하고 바닥을 헤아릴 수 없는 눈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녀는 우리와 별로 얘기를 나누지도 않았지만 우리가 노는 모습을 열심히 주시했다.   
그리고 우리가 날뛰며 소란을 피울 때에도, 한마디 불평없이, 
다만 두 손을 그 새하얀 이마에 얹고 자는 듯 눈을 감았다.
하지만, 어떤 날에는 한결 기분이 좋아졌노라고 말하며 
침대 위에 똑바로 앉아 있는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그녀의 얼굴에 새벽 노을 같은 홍조가 떠올랐고, 
우리와 어울려 얘기도 하고, 진기한 이야기들을 들려 주기도 했다.
그 당시 그녀가 몇 살이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토록 무기력해서인지 어린애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진지하고 조용한 태도로 미루어 볼 때 이미 어린애가 아닐 수도 있었다.   
그녀에 관해 말할 때면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소리를 죽여 말하곤 했다.   
그들은 그녀를 천사라고 불렀다.
그녀와 연관시켜 착한 것이니 
사랑스러운 것이니 하는 말 외에 딴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곧잘 나는 그렇게 기운 없이 말없이 누워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저 여인은 평생 동안 걸을 수 없겠구나, 
아무런 일도 할 수 없고 기쁨도 없겠구나, 
언젠가 영원한 안식처로 아주 갈 때까지 침대에 실린 채
사람들의 손을 빌어 이리저리 옮겨 다녀야 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천사의 품에 포근히 안겨 있어도 좋을 그녀가 왜 굳이 이 세상에 보내졌까, 
수많은 성화들에 그려져 있듯이 천사의 부드러운 날개에 실려
공중을 날 수도 있을 텐데, 하고 스스로에게 묻곤했다.
그럴 때면 나는 그녀의 고통의 일부를 떼어 받아야 할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녀가 홀로 고통을 겪지 않고, 우리 모두가 그녀와 고통을 나누기 위하여.   
그렇지만 그런 말들을 그녀에게 할 수는 없었다.
하기는 나도 사실 그 모든 것을 잘 모르고 있었으니까.   
나는 다만 무엇인가를 느끼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그녀의 목을 얼싸안아야겠다는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아무도 그래서는 안 되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아픔만을 주었을 테니까.   
그러나 그녀가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그녀를 위해 
마음 밑바닥으로부터 기도를 올릴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어느 따뜻한 봄날이었다.   
그날도 그녀는 우리들 방으로 옮겨졌다.
그녀는 아주 창백한 모습이었지만 눈만은 어느 때보다도 그윽하고 반짝였다.
그녀는 침대에 앉아 우리를 자기 곁으로 불렀다.
오늘이 내 생일이야 라고 그녀는 입을 떼었다.    
새벽에 견신례에 다녀왔단다.   
이제 하나님께서 나를 곧 당신 곁으로 불러들일 수도 있을거야.
그녀는 미소를 머금고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물론 나는 너희들 곁에 오래 머물고 싶지만, 
언제이고 내가 너희를 떠나더라도 나를 완전히 잊어버리지 않기를 바라.   
그래서 너희들 모두에게 반지를 하나씩 가져왔어.   
지금은 이것을 너희들 검지손가락에 끼워 두렴.   
그리고 너희들이 자라면 그 반지를 차례로 옮겨 끼는 거야.
나중에는 새끼 손가락에 밖에는 맞지 않게 되겠지만 -.   
그렇지만 평생동안 이 반지를 끼는 거야, 응?
이 말을 하고 나서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에 끼고 있던 다섯 개의 반지를 차례로 뽑았다.   
그러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처연하면서도 다정해 보였기 때문에 
나는 울지 않으려고 두 눈을 감아 버렸다.  
그녀는 첫 번째 반지를 맨 위에 남동생에게 주고는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 나서 둘째와 셋째 반지를 두 공녀에게, 
또 네 번째 반지는 막내동이 공자에게 주며, 반지를 줄 때마다 각각 키스를 했다.
나는 옆에 서서 꼼짝 않고 그녀의 새하얀 손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직 그녀의 손가락엔 반지가 하나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기진한 듯 몸을 기대었다.   
그때 나의 눈과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어린애의 눈은 입보다 훨씬 큰 웅변을 말하는 법, 
그래서 그녀는 내 마음 속의 소리를 들었던 모양이다.   
마지막 반지라면 나는 차라리 받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한낱 타인이라는 것, 
나는 그녀에게 속해 있지 않으며, 
그녀가 자신의 형제나 자매보다는 나를 덜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자 가슴속 한 줄기 혈관이 터지는 듯한, 
아니면 신경이 한 올 잘려 나가는 듯한 고통이 덮쳐 왔다.   
이 괴로움을 감추기 위해 어디에다 시선을 두어야 할지 
나는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몸을 일으켜 앉더니 
내 이마에 손을 얹고 내 눈 속을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그녀는 내 머릿 속의 생각을 속속들이 읽는 것만 같았다.
그러더니 천천히 손가락에서 마지막 반지를 뽑아 내게 주며 말했다.
이건 너희를 떠날 때 내가 갖고 가려던 것이야.   
그렇지만 이건 네가 끼는 것이 더 낫겠어.   
그래서 내가 세상에 없을 때 나를 생각해 주는 편이.   
그 반지에 새겨진 말을 읽어 보렴.   <신의 뜻대로>라고 쓰여 있어.   
너는 거친 마음과 동시에 온순한 마음을 갖고 있는 아이야.
살아가면서 그 마음을 온순하게 다스리도록 하렴. 냉혹하게 만들지는 말고.
그러면서 그녀는 남동생에게처럼 내게 키스를 하고 반지를 주었다.
그때 내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지금으로서는 실로 알수가없다.   
그 당시 나는 벌써 소년으로 자라 있었다.   
따라서 괴로워 하는 천사의 포근한 아름다움은 
이미 내 어린 가슴에 매력으로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소년답게 그녀를 한껏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들은 청년기와 장년기에서는 이미 사라진 순수함과 진심,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법이다.   
그러면서도 당시 나는 그녀가 사랑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될 
타인에 속한다고 믿고 있었다.  
다만 그녀가 내게 했던 진지한 말들은 건성으로 듣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영혼이 가까워질 수 있는 한 가장 가까이, 
그녀의 영혼이 내 영혼에 접근했음을 느끼고 있었다.
온갖 쓰라린 고통이 내 가슴으로부터 씻은 듯 사라졌다.   
이미 나는 혼자가 아니며, 타인이나 제외된 자가 아니었다.   
나는 그녀 곁에, 그녀와 더불어, 그녀의 마음속에 있음을 느꼈다.   
뒤이어 나는, 내게 반지를 준 것은 그녀에게 있어 일종의 희생이라는 것, 
그녀는 그것을 무덤에까지 갖고 가고 싶어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내 마음속에는 하나의 감정이 솟구쳐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다.   
나는 주저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반지를 내게 선사하고 싶으면 그냥 네가 갖고 있어.   
너의 것은 곧 내 것이니까.
그녀는 한동안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생각에 잠겨 나를 유심히 보았다.
그리고는 반지를 받아 자기의 손가락에 끼고는, 
다시 한 번 나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너는 내가 하는 말을 모르고 있어.   이해하는 것을 배우도록 하렴.
그럼 너는 행복해질 거야.  또 많은 다른 이들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