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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루터의 면죄부 논쟁 2 .

Joyfule 2006. 7. 7. 00:29


 마틴 루터 - 1  
Ⅲ. 루터의 면죄부 논쟁 2 .
1521년 4월 17일 루터는 보름즈(Worms)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앞에 서서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밝히게 되었다. 
새로 황제가 된 찰스 5세(그는 스페인의 국왕이기도 함)는 
교황과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지만 신앙적으로는 독실한 카톨릭이었다. 
황제를 위시하여 선제후, 영주, 주교, 대도시의 대표자들과 질문을 받게 되었다. 
하나는 그가 쓴 책의 저작권을 인정할 것인가였고 
또 다른 하나는 그 중에 지금이라도 뉘우칠 부분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루터는 자기 앞에 놓여진 책들을 보고 
"이 책들은 모두 다 내 것이고 나는 이것 외에도 쓴 책이 더 있습니다"고 
용기를 내어 단호하게 말했으나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부탁드립니다. 저에게 시간을 주십시오"라고 응답했다. 
루터는 간신히 하루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루터에게는 자신의 저술 중 자신의 생을 위태롭게 하는 내용을 번복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다음날 루터는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다
"황제 폐이브 여러 높으신 분들이 간단한 답을 요구하시니 
번잡한 이유없이 간단히 말씀드립니다. 
저는 성경과 명백한 이성에 의해 납득되지 않는 한 
저는 교황이나 종교회의들의 권위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서로 모순되는 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아무 것도 철회할 수 없으며 또 철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을 거스르는 일은 옳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여기에 내가 서 있나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성경과 이성에 의해서 누구나 알 수 있는 보편타당한 근거 없이 
설사 목숨이 위태하게 될지라도 결코 그의 주장을 할 수 없다는 
루터의 확신에 찬 믿음을 보라! 
참으로 그는 말씀만의 신앙을 부르짖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의 사람의 용기와 확신은 배울 가치가 있지 않는가! 
그러나 황제는 1521년 5월 26일 교황과 마찬가지로 루터를 파문했다 
"마틴 루터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정원에 받아들이지도 말고 
그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지 말 것이며, 그를 숨기지 말고, 
은밀하게 공공연하게 말로나 행위로써 그에게 도움을 베풀거나 
추종하거나 지지하거나 혹은 원조하지 말 것이다. 
그를 잡을 수있는 곳에서는,그를 붙잡아 제어하고 
생포하여 단단히 결박한 다음 우리에게 압송해야 한다." 
파문을 받은 루터는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요새인 
바르트부르그(Wartburg)성을 은신처로 삼아 피신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신약 성경 전체를 헬라어에서 독일어로 번역하는데 성공했고 
곧 이어 구약 번역도 시작되었다. 
경이롭게도 총 12년이나 걸려 1534년 9월 최초의 완역본인 
비텐베르그 성경이 출판되었다. 
그에게도 매우 특별한 날이 있었으니 루터는 1525년 6월 13일 
카타리나 폰 보라 수녀와 결혼하게 됐다. 
수도원의 해체로 말미암아 수녀들이 결흔을 시작했으나 
보라수녀는 루터 외에는 도무지 결혼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인문주의자들이 빈정대는 말, 곧 종교개혁은 
한 수도사와 한 수녀의 연합으로 끝났다는 것은 전혀 근거없는 말은 아니었다. 
루터는 보라를 깊이 사랑하여 
"나는 나의 카티(Katie)를 프랑스 베니스하고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카티, 당신은 당신 사랑하는 정직한 남자와 결혼했소
 당신은 황후요"라고 고백했다. 
루터는 1546년 2월 18일에 63세의 나이로 아이스벤에서 사망하여 
유해는 비텐베르그 성 교회(the Castle Church)에 안치되었다. 
그의 말년은 그의 개혁초기와 같이 매일 매일 분주하였다. 
끊임없는 편지답장,계속되는 강의와 설교, 교회지도 등이 그를 여전히 바쁘게 했다. 
게다가 만성적 귓병, 담석증과 같은 질병도 계속적으고 그를 괴롭혔다. 
또한 그가 진정 원치 않았던 개신교회의 분열과 다툼도 
그의 마음을 몸시 아프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초지일관 성경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그가 젊었을 때부터 가졌던 신앙의 자세로 무지한 농민과 욕심많은 정치가들, 
자신과 의견이 다른 형제들을 지도했다. 
그는 만스펠트 백작 영지의 분쟁을 종식시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가 태어나고 세례받은 아이스레벤에서 최후의 날을 맞이했다. 
그의 동역자가 임종 직전 
"선생님, 선생님께서 평생에 가르치신 교리와 믿음의 주이신 그리스도 위에 
굳건히 서서 돌아가시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루터는 육신이 연약한 중에도 온 힘을 다해 큰소기로 "오! 아멘"하고 말하였다. 
새벽 3시가 되어 종교개혁의 불꽃이었던 루터는 장엄히 운명하였다. 
그의 수제자이자 후계자인 멜랑히톤은 루터의 죽음을 표현하기
"아! 마부는 갔다. 이스라엘의 마차가 사라졌다"는 말을 하였다. 
참으로 루터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붙잡고 선한 싸움을 싸운 
하나님의 위대한 용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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