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이한규목사 2737

나를 믿어 주시는 하나님

나를 믿어 주시는 하나님 명백한 죄를 지었으면 변명하지 말라. 그때는 변명할수록 궤변론자가 된다. 하나님은 변명을 아주 싫어하신다. 인간 판사도 변명을 싫어한다. 그래서 변호사가 필요하다. 변호사의 변호는 참고해도 죄인의 자기변호는 신뢰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 궤변을 늘어놓으면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하나님 앞에서는 오직 회개해야 한다. 사람에게는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선택권과 자유의지가 있다. 내 죄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 죄를 짓고 나서 “돈이 없어서...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서...”라고 죄의 책임을 남 탓이나 환경 탓으로 돌리지 말라. 죄를 변명하는 것은 죄를 저지르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될 수 있다. 죄를 지었을 때는 빨리 회개하는 것이 상책이다. 회개..

원망과 불평을 삼가라

원망과 불평을 삼가라 어떤 사람은 자신이 코를 고는 것을 모르고 남에게만 코를 곤다고 한다. 그처럼 사람은 자기 수면에 깊이 빠져 자신의 모습은 못 보고 남만 정죄할 때가 많다. 늘 자신을 먼저 살피며 정죄하는 말보다는 칭찬하는 말을 앞세우라.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는가? 비판과 정죄가 난무하던 세상에 구원과 화해를 주시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화해의 말을 많이 하고 비판과 정죄를 앞세우는 율법적인 태도는 힘써 삼가라. 율법주의자들은 병자를 보면 무슨 죄 때문에 그 병이 생겼는지부터 따졌다. 그러나 예수님은 병자를 찾아오셔서 그의 마음을 만져 주시고 치유해 주셨다. 예수님은 굶주린 사람을 보면 그의 게으름을 탓하기 전에 먼저 먹여 주셨고 길 잃은 양들을 보면 그의 부주의를 꾸짖기 전에 그의 두려움을 ..

회복의 은혜를 입는 길

회복의 은혜를 입는 길1. 하나님께 돌아오라 어느 날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성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를 예레미야에게 보이셨다. 그중 한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가 있었고 다른 광주리에는 나빠서 먹을 수 없는 극히 나쁜 무화과가 있었다. 그 환상에서 좋은 무화과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하나님은 좋은 무화과가 바벨론 땅으로 잡혀간 유다 포로들이라고 하시면서 그들을 잘 돌보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5절). 왜 하나님이 그들을 좋은 무화과처럼 잘 돌보시는가? 그들이 포로로 끌려가면서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에서 죄 가운데 지내는 사람보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고난을 당한 후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을 더욱 복되게 여기신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현재 하..

영적인 밸런스를 갖추라

영적인 밸런스를 갖추라 할례를 선민의 징표 및 구원의 징표로 생각했던 유대인들에게 로마서 2장에서 ‘육신의 할례’가 아닌 ‘마음의 할례’가 중요하고 표면보다 이면이 중요하다는 바울의 선언은 충격적인 선언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자연히 “유대인의 나은 점이 무엇이고 할례의 유익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1절). 그 질문에 대해 사도 바울은 “범사에 많으니”라고 했다(2절). 마음의 할례가 중요하지만 육신의 할례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라는 뜻이다. 내용이 중요하지만 형식도 필요하다. 참된 신앙이란 형식을 무조건 타파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형식이..

형식주의에 빠지지 말라

형식주의에 빠지지 말라 사도 바울은 자신의 변화를 간증하면서 할례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5-6).” 그 정도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할례’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방인들이 유대인으로 귀화하려면 먼저 할례를 받아야 했다. 할례는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뿌리가 되는 의식이었고 선민과 구원의 징표였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할례에 대한 맹신은 잘못이라고 질타하며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지만 율법을 범하면 할례 받은 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무할례가 된다고 했다(25절). 즉 할례라는 외적인 의식..

참된 자유인이 되라

참된 자유인이 되라 사도 바울은 복음을 영접하기 전에 철저한 유대교인이었기에 율법주의의 폐해를 잘 알고 있었다. 유대 율법주의자에게는 어떤 잘못이 있는가? 첫째, 율법을 자랑하는 것이다(17절). 유대인으로 규정되게 하는 2대 요소는 ‘할례’와 ‘율법’이다. 그들이 할례와 율법을 중시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할례 받고 율법을 받은 사실로 인해 입술로는 하나님을 자랑하면서 속으로는 인간적인 자랑과 교만에 빠진 것이 문제였다. 둘째, 선생처럼 가르치려는 것이다.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선을 분별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한 것을 추구하며 살기보다는 자기가 아는 율법적인 지식을 가르치는 것만 좋아했다. 즉 그들은 이방인들을 ‘맹인, 어두움에 있는 자, 어리석은..

은혜를 오용하지 말라

은혜를 오용하지 말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율법이 있기에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지만 사실상 ‘율법을 듣는 자’가 아닌 ‘율법을 행하는 자’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12-13절). 그러나 실제로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경우는 없다. 어느 누구도 율법을 완벽하게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율법을 완벽하게 지킴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경우는 사실상 없는데 왜 성경에서는 특정한 사람에게 의인이란 표현을 사용했는가? 그들이 완벽하게 율법대로 살아서가 아니다. 성경적인 의인은 ‘행동의 완전함’을 가진 의인을 뜻하기보다는 ‘동기의 순전함’을 가진 의인을 뜻한다. 완벽하게 행동은 못해도 그 마음의 동기가 하나님 보시기..

죽었던 꿈을 부활시키라

죽었던 꿈을 부활시키라 사도행전 1장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40일 후에 예루살렘의 감람산에서 승천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승천 전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 지역의 예수님의 지시하신 산에서 주신 대 계명이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선교의 계명이다. 선교를 잘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1. 부활의 믿음 예수님의 부활은 고난과 죽음이 끝이 아님을 말해 준다. 어둠 때문에 빛이 더 빛나고 고난 때문에 은혜가 더 빛나고 죽음 때문에 부활이 더 빛난다. 요한복음 20장을 보면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붙들려고 하자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나를 붙들지 말라.” 그 장면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육체적인 터치를 너무 추구할 필요가 없다는 교훈을 준다. 순진한 영혼을 사로잡으려고 이단 교주가 남발하는 거짓된 ..

마음의 창을 닦으라

마음의 창을 닦으라 로마서 1장 하반부에서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비참한 모습을 묘사하며 모든 사람이 다 죄인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2장에 들어서면서 그런 죄인이 남을 판단하는 모습은 결코 복된 모습이 아니라고 했다. 판단은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행동으로써 하나님이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 그 말씀은 남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이고 더 나아가 부족한 사람들끼리 서로 격려하고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가만히 앉아서 판단하기보다는 어려운 이웃을 살피며 힘써 선행을 베풀라. 십계명의 제10계명은 탐욕을 버리라는 계명이다. 어떻게 탐욕을 버리는가? 탐욕과 맞서 싸우려고 하면 탐욕이 더 찾아올 때가 많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법이다. 선한 생각이 악한 생각을 이기지 못할 때가 많다. ..

덜 판단하고 더 행동하라

덜 판단하고 더 행동하라 하나님은 얼마나 잘 판단하느냐보다 얼마나 잘 행하느냐를 보고 복을 내리거나 심판을 내리신다(6-8절). 행동하는 믿음이 필요하다. 좋은 일을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복된 삶이 아니다. 술을 먹으면서 “목사님! 제가 술을 끊도록 기도해주세요.”라고 하기보다 “목사님! 제가 술을 끊었어요. 다시 안 하도록 기도해주세요.”라고 하는 것이 좋다. 생각만 하지 말고 행동하면서 생각하고 기도만 하지 말고 행동하면서 기도하라. 소유와 능력과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 선한 일을 많이 하라. 선을 행할 때는 조용히 하라. 선행이 자랑이 되면 복은 사라진다. 바리새인의 잘못은 선행을 한 것에 있지 않고 선행을 자랑한 것에 있었다. 복을 오래 지속시키려면 자랑하지 말라. 암탉이 알을 낳고 가만히 있으면 ..

쉽게 판단하지 말라

쉽게 판단하지 말라 사람은 다 비슷한 죄인이기에 남을 쉽게 판단하는 것은 자기를 정죄하는 것과 같다(1절). 판단, 핑계, 정죄와 같은 단어들은 사람을 원래보다 형편없게 만드는 단어들이다. 하나님은 형편없는 사람도 쓰시려고 하는데 사람은 멀쩡한 사람마저 형편없게 만들 때가 많다. 그처럼 자신의 기준과 잣대로 남을 쉽게 판단하지 말라. 남을 판단하는 눈으로 늘 자신부터 먼저 살피고 말할 때는 듣는 사람에게 덕이 되고 좋게 말하는 습관을 들이라. 어떤 사모는 이름이 약간 촌스러웠다. 그래도 사모를 좋아하는 성도는 그 이름이 순박하게 느껴져 부를수록 좋다고 했다. 좋은 면을 보고 좋게 말하려는 습관을 들이라. 왜 교회가 어려워지는가? 대개 말 때문이다. 특히 조심해야 할 말이 있다. 자랑하는 말이나 판단하는 ..

하나님은 포기가 없으시다

하나님은 포기가 없으시다 모든 죄는 사람이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도 그가 마음대로 하게 하심으로 생긴 것이다(28절). 결국 하나님을 버린 인생에 주어지는 가장 무서운 심판 중 하나가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버릴 때 나타나는 죄의 목록이 본문 29-31절에 21개가 열거되어 있다. 그 죄들은 5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자기 안의 원초적인 죄다.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자기 안의 원초적인 죄다. 둘째, 남을 향한 심리적인 죄다.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이 죄에 속한다. 셋째, 입술의 말로 짓는 죄다. 수군수군하는 자와 비방하는 자가 이 죄를 저지른다. 넷째, 자기를 스스로 높이는 죄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 능욕하는 자, 교만한 자, 자랑하는 자..

참된 목자

참된 목자1. 양떼를 살리고 모으는 목자 거짓 목자는 양떼를 멸하고 흩어지게 하지만 참된 목자는 양떼를 살리고 모은다(1절). 양떼를 살리려면 목자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양떼와 마음으로 함께해야 하고 반대로 양떼도 목자와 마음으로 함께해야 한다. 서로가 순교 마인드를 가지고 서로를 살려 주려고 할 때 행복한 관계가 이루어진다. 전략적인 외면 상황 외에는 나의 삶의 목적을 많은 사람의 기를 살려 주는 데 두라. 소유로 남의 기를 꺾으려고 하지 말고 목자 마인드로 남의 마음을 얻으려고 하라. 또한 잃어버리고 소외된 의인을 잘 찾아서 그와 함께하라. 잃어버린 순결한 의인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라. 믿음과 진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잃어버린 사람을 찾는 것에 있다. 그래서 진리를 발견하고 진리에 가까워지려면 사람..

늘 하나님과 동행하라

늘 하나님과 동행하라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있다. “내가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이다. 사람은 저절로 생긴 존재가 아니다. 부모는 나를 낳았지만 나를 만들지는 않았다. 부모는 아들을 낳을지 딸을 낳을지도 모른다. 자기 존재의 근원을 모르면 놀라운 성취와 발견을 해도 인생의 방황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과학자가 많은 논문을 통해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진화되어 왔다는 학설을 발표하지만 배우지 못한 시골 할머니는 간단하게 말한다.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셨어.” 누가 더 유식한 것인가? 시골 할머니가 더 유식한 것이다. 만물을 깊이 묵상하면 하나님의 존재가 느껴진다. 물건을 보면 그 물건을 만든 사람이 있음도 알 수 있고 그 물건을 만든 사람의 의도도 짐작된다. 그처럼 만물을..

믿음의 말을 하라

믿음의 말을 하라 어떤 나라도 그 나라의 종교 개념 이상의 나라를 만들 수 없고 어떤 종교도 그 종교의 신 개념 이상의 종교를 만들 수 없다. 신 개념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에 대한 개념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기초 지식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내게 어떤 분인가?”에 대한 지식은 믿음생활의 가장 중요한 토대다. 다윗은 그 지식이 풍성했기에 견고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하나님을 ‘나를 아시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다. 오늘날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인한 지식의 확대와 발전이 놀랍다. 그래도 하나님의 무한한 지식에 비하면 인간의 지식은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의 지식은 하나님의 광대한 지식의 극히 일부분을 발견해 사용하는 것이고 인간의 지식 발전은 하나님의 무한한 지식을 조금씩 더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