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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깨어있는 시민의 의무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깨어있는 시민의 의무 수감 중인 죄수로부터 국가 살인을 얘기 들었다. 그 죄수는 자기의 일처럼 결사적이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사실 제가 변호사님을 보고 싶었던 건 석방되고 싶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죽을 때까지 감옥에 살라고 해도 그럴 수 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잃을 것도 무서운 것도 없습니다. 전 어떻게든 그 사건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요. 전 배운것도 없고 말재주도 없어요. 알리려고 나름대로 인질 난동을 부리고 기자를 불러오라고 해도 안됐습니다. 꼭 해주십시오.”그는 눈물까지 흘렸다.“죽을 때까지 감옥에 살아도 된다고 말하는 의미가 뭐죠?”나는 그의 속을 알고 싶었다.“저는 어려서는 거지고 아이 때부터 도둑질을 하고 평생 감옥에서 비참하게 살다가 죽는 표본이..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죄수가 전하는 사회정의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죄수가 전하는 사회정의 삼십년 전 아직 겨울 냉기가 남아있는 바람이 불던 봄날이었다. 곤지암 기도원에서 사흘을 묵으면서 앞으로의 삶을 생각했었다. 돌아오는 날 그곳으로 나를 찾아온 목사가 있었다. 교도소를 돌아다니면서 전도하는 목사였다. 내가 그 목사가 운전하는 찝차를 얻어 타고 산길을 내려올 때였다. 핸들을 잡고 있던 목사가 입을 열었다.“청송교도소에 한 죄수가 있는데 지난 십 오년 동안 한평짜리 감방에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받고 있다고 들었어요. 자살하거나 미치지 않은 게 이상하답니다.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게 철창을 막아버렸답니다. 그리고 두꺼운 아크릴 판으로 안쪽 문도 봉쇄해서 바깥의 공기라고는 변기 밑에 뚫려있는 작은 통풍구를 통해 들어오는 게 전부랍니다. 이십사..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이민자의 슬픔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이민자의 슬픔 실버타운에서 만났던 노부부가 바닷가 나의 집으로 찾아왔다. 오십년의 이민 생활을 청산하고 연어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오듯이 고국으로 온 것이다. 젊은 날 미국영화를 많이 본 부인은 화면속 같이 파티에 가야 하는 줄 알고 파티복을 가방에 넣고 이민을 갔다가 공장에서 죽도록 노동만 했다고 했다. 한평생이 다 저물고 부인은 검은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얘기중 부인의 이런 말이 있었다.“이민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했을 때 저의 마음 한구석에는 아들이 가지 말라고 잡아줄 걸 기대했어요. 그런데 마지막까지 아들이 그런 말을 하지 않더라구요. 다 큰 아들은 엄마가 더이상 필요없었어요.”험하고 고된 이민 생활을 하면서 목숨을 걸고 자식을 키..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강도에게 성질을 냈었다.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강도에게 성질을 냈었다. 오래전 오류동 도로변에 있는 영등포교도소에서였다. 메마른 금속음이 들리는 녹슨 철문을 통과 해서 들어가면 우중충한 장방형의 낡은 건물들이 들어차 있었다. 입구 광장의 왼쪽 끝에 축사 같은 길다란 건물이 스산한 느낌을 풍기면서 웅크리고 있었다. 늙은 교도관 한명이 담당하는 변호인 접견실이었다. 나는 흉악범인 강도와 마주 앉아 있었다. 당시는 씨씨티브이도 없었고 갑작스런 흉악범의 공격에서 나를 지켜줄 철창이나 칸막이도 없었다. 교도관도 둘을 놔두고 어딘가 가버렸다. 흉악범인 그가 나를 보자마자 당당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공소사실중 강도죄는 부인하려고 하는데 변호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전과가 많은 그는 재판에는 이력이 난 듯 했다. 그는 변호사를..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외국의 감옥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외국의 감옥 오래전 파리공항에서 서울로 오기 위해 비행기를 기다릴 때였다. 서글서글해 보이는 인상의 한국 여성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버버리코트 한 벌 입고 가 주시지 않을래요?”그런 방법으로 밀수를 하는 것 같았다. 작은 이익을 미끼로 아니면 사정을 들어주는 셈 치고 그 말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혹시나 옷의 깊은 곳에 마약이라도 감추어져 있다면 어떨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범죄의 도구가 되고 큰 낭패를 볼 것이다.실제로 그런 사건을 모티브로 영화가 만들어진 걸 본 적이 있다. 한 여성이 마약 운반죄로 외국 경찰에 체포됐다. 그녀가 들어간 감옥은 지옥이었다. 현지 영사관은 그녀를 외면했다. 가족은 실종된 그녀의 행방을 몰라 애를 태웠다. 외국에..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벗꽃 잎 같이 진 친구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벗꽃 잎 같이 진 친구 털털거리는 낡은 버스는 스산한 겨울 풍경을 담고 굽이굽이 휘어지는 산길을 달렸다. 차창으로 햇빛에 반사되는 얼어붙은 강이 보였고 서걱대는 마른 갈대가 지나가기도 했다. 장과 내가 버스에서 내렸을 때 주변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했다. 마을 입구의 작은 가게의 알전구만이 주변의 어둠을 조금씩 녹이고 있었다. 장과 나는 가게에 들어가 양초를 사서 헌 신문지로 똘똘 말았다. 거기에 불을 붙이면 산길을 밝힐 간이횃불이 됐다. 우리는 산 짐승 소리가 멀리 들리는 눈 덮인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장과 나는 장학재단에서 일 년간 고시공부를 할 수 있는 생활비를 지원받고 그해 겨울을 지낼 절로 올라가는 길이었다.“야, 어째 기분이 으스스하다.”내가 무..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조용한 기적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조용한 기적 식물인간이 된 노인의 병실로 문안을 간 적이 있었다. 그 노인은 의사고 믿음이 깊은 분이었다. 진료하고 기도하고 가족을 사랑하는 게 생활의 전부였다. 침대 옆에 있던 그 노인의 늙은 부인이 이런 말을 했다.“이 양반이 진료를 하다가 갑자기 쓰러졌어요. 응급실로 갔는데 뇌촬영을 한 의사들이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어요. 원인 모르게 소뇌에서 갑자기 피가 박카스병 하나 정도 나왔대요. 특히 소뇌 쪽은 수술이 어렵다고 하더라구요. 그래도 바로 수술을 해서 생명은 건졌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십삼년간 식물인간으로 있으면서 나이 팔십을 맞이했네요.”그는 그런 상태에서 육십대 칠십대를 지나 팔십대가 됐다.움직이지 못하는 몸속에서 그는 깊은 수면에 빠져있을까 아니면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앞이 안 보이는 사람들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앞이 안 보이는 사람들 탤런트 송승환 씨가 눈이 안 좋다는 기사를 봤다. 시력을 많이 잃었는데도 여전히 무대에 서고 방송일을 계속하고 있다. 주변의 우려에 대해 그는 “안 보여도 형체는 알아볼 수 있다 안 보이면 안 보이는 대로 한다. 안보이면 열심히 들으면서 하면 된다”고 했다. 대단한 집념이 엿보인다. 성실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게 그에 대한 평가였다.나도 눈이 상해 보니까 그의 마음을 알 것 같다. 나도 한 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녹내장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시야가 극도로 좁아져서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 다른 쪽 눈이 남아있다. 이제는 그 눈도 노안이고 시력이 좋지 않다. 젊은 시절 정말 건강하고 좋던 눈이었다. 나이먹은 교수들이 돋보기를 꼈다..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감옥은 좋은 독서실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감옥은 좋은 독서실         오래전 교도소 보안과를 들렸을 때였다. 벽에는 감방 안을 비추는 모니터 화면들이 걸려 있었다. 감방의 천정에 카메라가 달려있는 것 같았다. 덩치가 우람한 조폭 출신이 감방 구석에서 바위같이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의 시간은 엄청나게 늘어지고 길 것 같았다. 시간의 양과 질은 사람에 따라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았다.그 무렵 지방지를 발행하는 한 언론인이 구속이 됐었다. 그는 감옥에 들어갈 때 아예 그가 선별한 칠십권의 책을 그 안에서 독파할 계획을 세웠다고 했다. 그는 감방에 들어가서부터 바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집중한 채 책을 읽느라고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고 했다. 그가 육십권쯤 읽었을 때..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미녀 탈랜트의 숨겨진 사랑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미녀 탈랜트의 숨겨진 사랑   오래전 드라마에서 주인공이었던 여성 탈랜트의 얼굴이 나오고 있었다. 우수가 낀 듯 잘생긴 얼굴이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간간이 단역으로 나오는 것 같다. 그녀의 얼굴에서 기억의 아스라한 저편에 있던 한 남자의 희미한 형체가 떠올라 내게로 다가오는 것 같다.그러니까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었던 가을 어느 날이었다. 나는 구치소에서 그를 만났다. 휠체어를 타고 접견실로 나온 그는 어깨 위로 온통 인공혈관을 걸치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피를 걸러줘야 한다고 했다.“예리한 면도날로 온몸을 얇게 써는 것 같이 아파요”그는 내게 고통을 호소했다. 판사가 그를 직접 봤다면 구속영장에 서명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내가 들은 그의 지나온 삶은 대충 이랬다.그는 음대 기..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두 건달의 독백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두 건달의 독백       변호사를 하면서 이름이 알려진 내 나이 또래의 조직폭력의 두목급들을 여러 명 만났다. 그들의 과거 얘기를 들어보면 요즈음 중고등학교 일진 아이들과 비슷한 면이 있다. 어려서부터 싸움선수들인 것 같았다. 서방파 두목으로 전설적인 이름을 날리던 김태촌씨는 어린 소년 시절부터 싸움을 잘하기 위해 열심히 샌드백을 두드리고 깡을 키우기 위해 스스로 극기 훈련을 했다고 했다. 우리 세대도 어려서부터 주먹을 쓰는 친구도 있었고 공부를하는 친구도 있었다. 인생의 방향이라고 할까. 드라마 모래시계에 나오는 조폭 두목의 모델로 알려진 사람도 서방파의 김태촌과 어깨를 겨루면서 자랐다고 했다. 그는 사업으로도 성공을 했다. 어느 날 그가 내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명품이 갑옷인가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명품이 갑옷인가      이천십사년 이월 삼일의 일기내용이다. 그날 점심무렵 나는 광화문 네거리 옛 동아일보 사옥 앞에 서 있었다. 냉기 서린 칼바람이 기온을 영하의 날씨로 끌어내렸다.허름한 졈퍼에 낡은 털모자와 등산화를 신은 나는 갑자기 오줌이 마려웠다. 나는 이정훈 기자와의 약속 장소인 옛날 동아일보 사옥으로 들어갔다. 신문사가 옆으로 옮기고 옛 사옥이 까페로 변해 있었다. 나는 급한 김에 서 있는 웨이터에게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었다. 웨이터가 슬쩍 나를 훑어보더니 말했다.“지금 저희 화장실은 수리 중이라 사용을 못합니다. 요 아해 지하철역 화장실을 사용하시죠.”이상했다. 까페 안에는 사람들이 스테이크도 먹고 음료수도 마시고 있었다. 내 복장을 보고 손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나는 될 것이라는 믿음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나는 될 것이라는 믿음            중학교 입시를 치르고 났을 때였다.초등학교 육학년 일 년 동안 옆에서 지켜보던 선생님이 나를 조용히 부르더니 이런 말을 해 주었다.“너는 앞으로 무엇을 하든 될 거다”가볍게 칭찬하는 말이 아닌 것 같았다. 그 말을 하는 선생님의 얼굴 표정은 판결을 선고하는 법관같이 진지해 보였다.그 말씀이 나의 영혼에 씨가 되어 떨어져 내렸다. 그 씨가 내 마음 밭에서 싹이 되어 나오면서 나의 용기와 믿음이 되었다.고등학교 시절 사법고시제도가 있다는 걸 알았다. 한 해에 다섯 명을 뽑은 적도 있고 보통은 삼십명 정도가 합격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어려운 시험이라고 했다. 산이 있기 때문에 그 산을 오른다는 말이 있듯이 나는 그 시험에 도전하고 싶은 치기..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오랜 꿈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오랜 꿈          어두움이 옅어지면서 수평선 위로 푸른 새벽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다. 창밖으로 해안로의 노란 가로등 불빛들이 명멸하고 있다. 동해항의 긴 방파제 위의 작은 등대에서 신비로운 녹색 빛이 반짝이고 있다. 책상 위의 시계가 아침 다섯시를 가리키고 있다. 며칠전 바닷가 집으로 이사를 왔다. 노년의 ‘마지막 거처’라고 생각하고 정한 자리다.젊은 날부터 품었던 오랜 꿈이 있었다. 동해안의 바닷가를 따라 한없이 길을 걷는 나그네가 되어 보는 것이었다. 밤이 되면 어둠 속에 스며드는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버려진 폐선 옆 모래밭에서 자고 싶었다. 마당 줄에 매달린 오징어와 방석만한 가오리가 바람에 흔들리는 갯마을을 기웃거리며 걷고 싶었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의 작은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그들은 각자 소설이 됐다.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그들은 각자 소설이 됐다.        천구백 칠십칠년 일월의 어느 날이었다. 하얗게 눈이 덮인 가야산 원당암의 새벽하늘은 아직 어두웠다. 둔탁하고 묵직한 목탁 소리가 몇 번을 울렸다. 아침 공양을 하라는 소리였다. 나는 청계천시장에서 산 얇은 싸구려 이불을 덮고 방 안에 가득 찬 냉기를 견디고 있었다. 방안이나 밖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지난 저녁 장작 세 가치를 땐 온돌방은 식어 있었다. 간신히 일어나 암자 뒷 쪽에 달아맨 창고같은 어둠침침한 방으로 갔다. 베니어를 잘라 만든 길 다란 사각의 상 위에 음식이 담긴 몇 개의 양재기가 놓여 있었다. 그 안에는 밀쌀을 삶은 밥, 된장을 약간 푼 멀건 시래기국, 살얼음이 낀 소금만 뿌린 하얀 김치가 담겨있었다. 초라한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