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성을 위한 ━━/역사와인물 2606

헌애왕후(천추태후)

歷史 Essay 1454 ☞ 헌애왕후(천추태후) 6대 성종(成宗)의 동생이며 경종(景宗)의 왕비였던 헌애왕후(獻哀王后 964-1029)는 997년 아들 목종(穆宗)이 왕위에 오르자 섭정(攝政)을 한다. 목종의 나이 18세로 성년이 되었으나 정권욕이 강했던 그녀는 천추전(千秋殿)에 거주하며 천추태후(千秋太后)가 되어 섭정을 자처한 것이다. 그녀는 김치양(金致陽)과 간통하여 아들을 낳는데 그 아들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려 노력했으나 목종과 중신들은 안종 욱과 헌정왕후 소생인 대량원군(大良院君)을 정통으로 인정해 현종으로 옹립한다. 그 대량원군은 이모인 헌애왕후의 강요로 삼각산 신혈사(神穴寺)에 머물렀는데 왕후의 몇 번에 걸친 암살 시도를 넘기고 1009년 강조(康兆)의 정변(政變) 때 추대되어 8대 현종이..

제3비 헌애왕후 황보씨

歷史 Essay 1453 ☞ 제3비 헌애왕후 황보씨 제3비 헌애왕후(獻哀王后 964-1029) 황보씨는 태조와 신정왕후 황보씨 소생인 대종 왕욱의 딸이다. 대종 왕욱은 6대 성종의 아버지이므로 그녀는 성종의 친동생이다. 어머니는 태조와 정덕왕후 유씨 소생인 선의왕후인데 그녀 역시 부모의 성인 왕씨 유씨를 따르지 않고 할머니의 성을 따라 황보씨가 되었다. 경종은 헌애왕후의 동생 헌정왕후도 왕비로 맞아 4명의 왕비를 두었지만 헌애왕후만 아들을 낳았다. 친오빠인 성종의 치세기에는 잠잠히 있다가 자기 아들이 나중에 7대 목종이 되고 왕후는 천추태후가 되어 섭정을 하면서 고려를 호령하다가 권좌에서 밀려나 66세에 죽는다.

제2비 헌의왕후 유씨

歷史 Essay 1452 ☞ 제2비 헌의왕후 유씨 태조와 제3비 신명순왕후 유(劉)씨와의 5남 중 둘째 셋째 아들이 3대 정종 4대 광종이 되었는데 그 바로 아래 동생인 문원대왕(文元大王) 정(貞)은 태조의 제5비 정덕왕후 유(柳)씨 소생인 문혜왕후와 결혼했다. 그 둘 사이에서 낳은 딸이 광종의 아들인 경종의 제2비인 헌의왕후가 되었으니 경종은 친사촌과 결혼한 것이다. 그녀의 유(劉)씨 성은 어머니가 아니라 할머니의 성을 따른 것이다. 순수 혈통으로 왕위를 잇게 하려는 태조의 정책에 따라 광종도 족내혼을 했는데 그 아들도 족내혼을 시킨 것이다. 헌의왕후도 출생 사망 연도 기록이 없고 자식도 낳지 못 했는데 그래서 경종은 두 왕비를 더 얻는다.

경종(景宗)의 제1비 헌숙왕후 김씨

歷史 Essay 1451 ☞ 제1비 헌숙왕후 김씨 경종(景宗)의 1비 헌숙왕후(獻肅王后)는 신라 경순왕(敬順王) 김부(金傅)의 딸이니 경주 김씨이다. 935년 태조가 자신의 딸이며 광종(光宗)의 친동생인 낙랑 공주를 경순왕(?-978)에게 시집보냈는데 그들 사이 소생이니 경종과는 고종 사촌이 된다. 경종은 즉위하자마자 975년 10월 장인 경순왕에게 공신 칭호를 내리고 관작을 높이고 식읍을 1만호로 늘려주는데 이는 신라왕족과 고모인 낙랑공주에 대한 특별한 배려였을 것이다. 그리고 경주 호족들에게는 광종의 공포 정치에 피해가 없도록 든든한 지원군을 마련해주기 위함이었다. 출생 사망 연도 기록도 없고 자식도 없었지만 제1왕후로서 죽은 후 경종의 영릉에 합장되었다.

경종의 가족

歷史 Essay 1450 ☞ 경종의 가족 4대 광종(光宗)과 태조의 딸 대목황후 황보씨(大穆王后 皇甫氏)를 부모로 이복 남매간의 장남으로 왕위에 오른 5대 경종(景宗 955/975/981)은 네 명의 부인을 두었다. 제1비는 신라 경순왕이 태조의 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하사받아 낳은 딸 헌숙왕후 김씨(獻肅王后 金氏 951-?)였고 제2비는 왕실 외가 종친인 헌의왕후 유씨(獻懿王后 劉氏)였으며 제3비는 나중에 목종의 어머니로 천추태후》(千秋太后)가 되는 헌애왕후 황보씨(獻哀王后 皇甫氏 964-1029)이고 제4비는 그녀의 동생인 헌정왕후 황보씨((獻貞王后 皇甫氏 ?-992)였다. 이 중 제3비인 헌애왕후가 낳은 아들이 부왕이 죽었을 때는 너무 어렸으나 6대 성종(成宗 960/981/997)이 아들 없이 ..

경종 성종 목종

歷史 Essay 1449 ☞ 경종 성종 목종 5대 경종(景宗955/975/981)은 4대 광종(光宗925/949/975)과 태조의 딸 대목황후 황보씨(大穆皇后 皇甫氏)의 장남이다, 21세에 왕위에 오른 그는 대사면령으로 광종 치하에서 억압받던 호족들을 달래는 한편 토지제도를 정비하고 발해 유민들을 대거 영입하고 북방에 성을 쌓아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그러나 980년 최지몽(崔知夢)이 고발한 왕승(王承)의 역모사건을 처리한 뒤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결국 981년 6월 자리에 누운 지 한달 만에 사촌동생이며 왕후의 오라버니 개령군(開寧君)에게 선위하고 죽으니 그가 6대 성종(成宗960/981/997)이 되고 성종도 아들이 없자 경종과 헌애왕후(獻貞王后) 사이의 아들이 7대 목종(穆宗980/997/1..

경순왕의 후예들

歷史 Essay 1448 ☞ 경순왕의 후예들 태조 왕건(王建)이 죽은 지 35년이나 지난 경종(景宗) 3년 978년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 김부(金傅)가 죽었지만 고려 왕실과의 혼인 정책으로 천년 신라의 입김은 식지 않았다. 신라가 마지막 화백회의(和白會議)를 마치자 경순왕의 장자인 김일(金鎰)은 금강산으로 들어가 마의를 입고 은거했기 때문에 마의태자(麻衣太子)라 불렸지만 그 아들은 신라 부흥의 꿈을 살리려 전북 부안(扶安)에 들어가 뿌리를 내리고 창씨를 했으니 부안 김씨(扶安金氏))가 되었다.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김은열(金殷說)의 후예가 안동김씨 안산김씨 서흥김씨로 분파되었는데 서흥김씨의 후손인 김치양(金致陽)도 역시 신라부흥의 꿈에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예언가 최지몽

歷史 Essay 1447 ☞ 예언가 최지몽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소문난 영암 출신 최지몽(崔知夢 907-987)은 18세 때 태조(太祖)에게 불려가 그의 꿈을 해몽하여 삼한통일을 이룰 것을 예언하면서 발탁된다. 태조는 기뻐 知夢이라 이름지어주고 늘 옆에 둔다. 혜종(惠宗) 때도 각종 모반 및 음모로부터 왕을 보호했고 970년 광종(光宗) 때는 무례하다는 죄로 유배를 갔었지만 980년 경종(景宗)이 다시 불렀다. 경종이 전시과(田柴科)를 실시해 관리들의 토지를 축소하자 왕승(王承)이 주도하여 모반 음모를 꾸몄는데 최지몽의 예지력으로 사전 발각되어 일망타진당했다. 유난히 장수하여 다음 왕인 성종(成宗) 때까지 벼슬에 있다가 은퇴 4년만인 987년 81세로 죽는다.

복수법

歷史 Essay 1446 ☞ 복수법 왕선(王詵)은 여린 왕을 부추겨 광종 대에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에게 직접 복수 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이른바 복수법(復讐法)을 제정하게 한다. 그러자 하급관료나 노비들까지 상관을 모함하고 참소하여 다시 피비린내 나는 유혈극이 시작된다. 심지어 점점 정권을 장악하고 가던 왕선은 복수라는 미명으로 태조(太祖)와 천안부원군 임씨(天安府院君 林氏) 소생의 효성태자(孝成太子)와 숙목부인(肅穆夫人) 소생의 원녕태자(元寧太子)까지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그러자 정신이 번쩍 난 경종(景宗925/949/975)이 당장 복수법을 금지시키고 왕선을 귀양보낸다. 그로서 정치보복은 종말을 고했지만 1년 동안 관료들 심지어 왕족들까지 수없는 사람이 희생되었다

경종의 실정

歷史 Essay 1445 ☞ 경종의 실정 경종(景宗)은 즉위하면서 호족 숙청으로 유명한 아버지 광종(光宗)의 치세를 청산한다. 광종의 무자비한 숙청 때 태자인 그 자신도 죽을 뻔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혜종(惠宗912/943/945)의 아들 홍화군(興化君)과 정종(定宗923/945/949)의 아들 경춘군(慶春院君)은 역모에 휘말려 죽었다. 975년 즉위시 21세였던 경종은 부왕 때 귀양 갔던 사람들에게 대사면령(大赦免令)을 내려 모두 풀어주었다. 그러자 전대에 숨죽이며 살았던 훈구파(勳舊派)들이 풋내기 왕의 감상적인 개혁을 이용해 일대 반격을 시작하니 여린 성격의 경종은 실정의 구렁텅이로 들어가게 된다. 오랫동안 억눌려 지내던 왕족 왕선(王詵)을 재상으로 임명하면서 사태는 험악해진다.

공포정치 청산

歷史 Essay 1444 ☞ 공포정치 청산 부왕 광종(光宗 925/949/975)의 공포정치가 종결될 무렵 끝없는 참소로 인해 살아남은 호족 공신(豪族 功臣)은 겨우 40여명이었고 수백명의 관료들이 조정에서 밀려나 있었다. 경종(景宗 955/975/981)은 즉위하자마자 대사면령(大赦免令)을 내려 귀양 중에 있는 신하들을 불러들였고 관작을 빼앗긴 사람들을 복작시켰다. 또한 광종대에 설치했던 감옥을 모두 헐고 신하들을 참소한 문서들을 모두 불살라 버렸다. 960년 광종 11년 이후 15년간 지속되던 공포 정치가 막을 내린 것이다. 경종은 공포정치의 종결을 알리는 의미로 왕선(王詵)을 집정으로 앉혀 잔재 청산 정책을 실시하는데 그로 인해 또 다른 소용돌이가 시작된다.

불안한 태자 시절

歷史 Essay 1443 ☞ 불안한 태자 시절 경종(景宗)이 태자로 책봉되던 때는 광종(光宗)의 공포 정치에 의해 많은 호족들이 희생된 상태였다. 960년 호족 숙청 작업이 시작되고 965년에는 박수경(朴守卿)의 세 아들을 비롯한 수많은 관료들이 죽었다. 광종이 이렇게 숙청 작업을 하자 호족 중에는 왕족을 등에 업고 왕을 교체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 때문에 2대 혜종(惠宗)의 아들 흥화군(興化君)과 3대 정종(定宗)의 아들 경춘군(慶春院君)이 역모에 휘말려 죽임을 당했다. 당연히 당시 10대였던 태자를 옹립하려는 세력도 있었는지 광종은 아들 주(伷)까지도 죽이려 들었다. 결국 경종(景宗955/975/981)은 동생이 어렸을 때 죽어 외아들이었기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셈이다.

'벨 연구소' 혁신의 주역 김종훈

'벨 연구소' 혁신의 주역 김종훈 세계 최강이라 불리는 미국은 비단 국방력만 강한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분야에서도 세계 최고로 불립니다. 이런 미국에게 자존심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곳이 있는데 바로 '벨 연구소' 입니다. 이 연구소는 전화기를 발명한 '그레이엄 벨'의 이름을 따 1925년 설립된 연구소로 이곳에는 미국 중앙연구소 뿐 아니라 인도, 한국, 아일랜드 등 8개 지역에 연구소를 두고 1만명이 넘는 과학자와 2만6천명이 넘는 직원이 근무하는 초대형 연구기관입니다. 전기통신분야와 기초과학기술을 연구하는 민간기관으로 지금까지 13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명실상부 전세계 최고의 연구소입니다. 그런 연구소에서 지난 2005년 전세계 IT업계를 발칵 뒤집어버린 사건으로 사상 최연소이자 사상 최초의 외국..

제 5대 경종(景宗)

歷史 Essay 1442 ☞ 제 5대 경종(景宗) 고려의 4대왕으로 왕건의 아들 중 마지막 왕이었던 광종이 치세 26년만인 975년 5월 나이 51세에 지병으로 죽자 그의 아들 주가 21세로 왕위에 오르니 고려의 5대 경종(景宗)이다. 경종은 955년 9월 광종과 대목왕후 황보씨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주(伷)였다. 광종 16년인 965년 11세에 태자가 되어 21세에 왕위에 오르니 왕건의 손자 중 최초로 왕이 되지만 태자 시절 부왕 광종의 숙청 바람에 휩싸여 죽을 뻔한 일이 있어서 내내 숨죽이고 살아온 바람에 총명하긴 했으나 기개가 약했다. 결국 별 업적도 없이 재위 6년 2개월만인 981년 7월 27세에 요절한다.

광종의 죽음

歷史 Essay 1441 ☞ 광종의 죽음 광종(光宗)은 말년까지도 외가를 등에 업은 태자 주(伷)를 끊임없이 의심하며 호족 왕족에 대한 숙청을 계속한다. 그러나 965년 외교의 달인 서희(徐熙)의 아버지 서필(徐弼)의 죽음 969년 6대 성종(成宗)의 아버지 왕욱(王旭)의 973년 왕사(王師) 균여(均如)의 죽음 등을 겪으며 불교를 통한 참회(懺悔)의 길을 걷는다. 궁중에서 짐승의 도살(屠殺)을 금하고 수시로 공덕제(功德祭)를 지내고 귀법사(歸法寺)에서 무차수륙회(無遮水陸會)를 열었으며 1년에 4차례나 방생(放生)을 하는 등 많은 사람들을 죽인 데 대한 참회를 한 것이다. 25세에 왕위에 올라 많은 업적과 함께 원성을 들었던 광종은 재위 26년만인 975년 5월 지병으로 51세에 죽는다. 차기는 태자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