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기독교자료

사두개파의 역사.

Joyfule 2023. 12. 12. 14:54


 

 

 

    사두개파의 역사.

 

사두가이파는 복음서에 등장하는 주요파벌으로, 동시대의 주요 종파로 바리사이파와 에세네파가 있었다. 사두가이파는 제사장 및 왕족, 그리고 그 후손으로 구성된 사회 경제적 상위 계층이었다. <사두가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사독이라는 이름이다. 사독은 제1신전의 첫 대제사장이며, <정의롭다>라는 뜻과 관련 있다. 사두가이파는 기원전 2세기부터 활동하기 시작하여,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신전 파괴 후 사라졌다.

1. 제2신전 시대(기원전 516 년 - 기원후 70 년)

제2신전 시대는, 예루살렘 신전의 두번째 완성(기원전 516 년)부터 시작하여,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 신전이 파괴된 기원후 70년까지를 일컫는다. 제2신전시대에 예루살렘의 통치 권력은 수 차례 바뀐다.

페르시아의 예루살렘 통치(기원전 539 – 기원전 334/333)가 종료되고, 헬레니즘 시대가 도래한다. 헬레니즘(기원전 334/333 - 기원전 63 년)의 이스라엘에서는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이 점차 깊어졌다. 알렉산더 대왕 사후(기원전 323년), 알렉산더의 제국은 넷으로 분열되었다. 그중 하나인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조가 유대를 통치한 후, 통치권은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에게 넘어간다(기원전 200 – 기원전 167). 셀레우코스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예루살렘 신전을 모독하고, 유대인에게 율법을 지키지 말 것을 강요했다. 그러자 마타디아스와 그의 아들 유다 마카베오가 반란을 일으키고, 셀레우코스의 통치는 20년 후 종료되어, 마타디아스의 아들들(=하스몬가)는 기원전 63년까지 통치한다.

로마 장군 폼페이가 기원전 63년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유대 따에서 로마 시대가 열린다. 로마는 기원후 7세기까지 유대를 통치한다. 헤롯과 그의 손자 헤롯 아그리파 1세 통치하던 시기에는, 유대인과 로마가 가장 강하게 연결된다. 로마는 기원후 6년 퀴리누스가 인구조사를 하면서, 로마 행정가에게 통치권을 이전한다. 1차 유대-로마 전쟁이 기원후 66년에 일어났다. 로마는 예루살렘을 재점령하여 신전을 파괴하고, 기원후 70년 제2신전 시대가 종료되었다.

2. 신전 영향력의 쇠퇴

예루살렘 신전이 기원전 516년(페르시아 시대) 재건되었다. 그러나 페르시아는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권력을 유대 땅에 허락하지 않았다. 따라서 예루살렘 신전이 유대에서 종교적 중심을 넘어 사회적 중심이 되고, 제사장들은 신전 외부에서 공식 지도자들이 된다.

헬레니즘 시대에(기원전 334/333 - 기원전 63 년) 유대교의 중심은 신전에서 멀어지고, 서기관 계급과 평민 지식인들이 기원전 3세기에 유대에서 출현했다. 대제사장들(사두가이파)의 부패는 대중들에게서 점점 더 유명세를 탔다. 유대 사회는 제2신전의 적법성과 사두개파의 지도력을 자유롭게 의심했다. 파벌은 마카베오 통치 시대(하스몬 왕조) 동안 형성되었다. 과격 집단이 신전의 권력에 대해 종종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신전은 여전히 공식적으로 정치적 지도력의 중심이었다.

3. 사두가이파 사람의 역할

사두가이파는 예루살렘 신전을 관리했다. 율법에서 지시하는 것처럼, 제사장의 책임은 제사장의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강화했다. 제사장들은 신전에서 가장 중요한 희생제를 수행했다. 그들은 또한 예루살렘 순례 축제(1년에 3차례)에서 희생제를 주관했다. 그러나 사두가이파와 제사장이 완전히 동의어는 아니다. 제사장 중에 바리사이파도 있었고, 소속 없는 구성원도 있었다.

사두가이파 사람은 정치적 역할도 했다. (1) 국내 행정을 관리했다. (2) 외교적으로 국가를 대표했다. (3) 산헤드린에 참여했다. (4) 국내 국외 유대인에게 세금을 거두었다. (5) 군대를 갖추고 이끌었다. (6) 로마와의 관계를 조정했다. (7) 국내 불만을 중재했다.

 

4, 분파주의

제2신전시대의 유대 공동체는 분파주의로 종종 혼란스러웠다.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는 바리사이파와 에세네파의 갈등을 설명한다. 사두가이파는 예수 운동과 현저하게 구별된다. 이 집단들의 사회적 지위, 믿음, 신성한 본문이 서로 달랐다. 사두가이파의 속성은 신약성서, 사해문서, 미시나, 탈무드 등에서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사두가이파는 귀족적이며 부유하며 전통적인 엘리트를 대표했다.

사해문서는 사두가이파를 종종 므낫세로 언급한다. 사해 문서 가운데 하나를 인용한다.(여기에서 므낫세는 야곱의 12 아들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다. 남유다 왕국에서 히스기야를 이어 왕이 된 사람이다.)

인용을 보면, 사두가이파가 이스라엘의 통치 계층임을 확증하며, 그들의 귀족적 지위를 확증한다. 더욱이 에세네파는 사두가이파의 불경건이 이스라엘의 멸망과 예루살렘의 공성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사해문서는 사두가이파가 유대를 통치하면서,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깨뜨렸다고 낙인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