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그가 노숙자가 됐다
먼 친척 한 사람이 노숙자가 됐다고 한다. 대학 건축과를 졸업하고 평생 건설회사에 다니던 성실한 사람이었다. 퇴직을 하고 자기 방에서 우울하게 생활하더니 어느 날 집을 나갔다는 것이다. 누군가 그를 을지로역 앞에서 봤다고 했다. 형제들이 그를 찾으러 갔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다음날 사라졌다고 했다. 더 이상 그를 찾을 수 없었다. 영혼의 자유를 찾아 길을 나선 건 아니었을까.
캐나다 터론토시의 새벽 거리를 걷다가 길가에서 띄엄띄엄 자고있는 노숙자들을 봤었다. 슬리핑 백으로 얼굴을 가리고 자는 옆에는 지난밤에 읽다가 만 작은 포켓북이 보였다. 노숙자라기보다는 먼 인생길을 걷는 수행자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래전 일본의 우에노 공원에서였다. 공원의 구석에는 노숙자들이 묵는 구역이 있었다. 벤치 하나에 박스 하나씩 놓여 있었다. 그 박스에는 노숙자의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도구들이 들어 있는 게 보였다. 몇몇 노숙자들이 공원 풀밭에서 평화롭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 나는 우연히 그 노숙자 지역에 들어가 한 벤치에 앉았다. 거기도 누군가의 상자가 놓여 있었다. 잠시 후였다. 뒤에서 소리 없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이가 들어보이는 어떤 남자가 조용히 나를 살피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 벤치의 주인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는 내가 새로 유입되는 노숙자인지 아닌지를 유심히 관찰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내가 떠날 기색을 보이지 않자 그 일본인 노숙자는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고양이처럼 조용히 내 옆으로 접근해 왔다. 그리고는 소리 없이 자신의 상자를 드는 것이었다.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려는 행동이었다. 내가 얼른 일어나 그게 아니라고 손짓을 하면서 미안하다고 머리를 숙였다. 자기의 자리를 양보하는 그 노숙자의 조용한 행동에서 나는 진한 감동을 받았다. 그의 내면은 천사였다.
동경 시내는 그날 오후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그런 날은 동경 시청역 지하광장에 노숙자들이 모인다고 했다. 밤 열시경 그곳으로 가 보았다. 특이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백여명이 넘어 보이는 노숙자들이 가로 세로 줄을 맞춰 신문지를 깔고 누워 있었다. 누구 하나 떠드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잠을 자지 않는 노숙자는 희미한 형광불빛 아래서 묵묵히 포켓북을 읽고 있었다. 그 뒷쪽의 계단에서 몇몇 노숙자가 귓속 말 같이 작은 소리로 속삭이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런 노숙자 사회의 질서를 보면서 ‘이게 뭐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숙자 같은 허름한 복장을 하고 서울 탑골 공원의 뒷골목 노숙자 거리로 간 적이 있었다. ‘거리의 변호사’로 세상 구경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할까.
냉기 섞인 바람이 불던 이월 말이었다. 도로와 인도의 경계석에 다른 노숙자들 사이에 끼어 앉아 있었다. 지나가던 노숙자가 춥다면서 내 손에 핫팩을 쥐어주었다. 털실로 짠 목도리를 주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기모바지를 주고 또 어떤 사람은 의료봉사 나온 사람한테 약을 받았다면서 소화제를 건네주기도 했다. 의의로 그곳에서 사람의 온기를 느꼈다. 나보다 조금은 어려보이는 여성 노숙자가 앞에 갑자기 나타났다. 그녀가 활짝 웃으면서 “나랑 친구할래?”하면서 말을 건넸다. 나는 그냥 미소를 지으면서 가만히 있었다. 한참 나를 보던 그 여성 노숙자가 “얘 약간 이상하게 됐나 봐”하면서 다른 곳으로 갔다.
노숙자들은 이 사회에서 법의 보호 밖에 있는 투명 인간인것 같았다. 버려진 강아지를 보면 사람들이 동정해도 노숙자에게는 하루 종일 말 한마디 붙이는 사람이 없다. 노숙자들은 정말 사회의 쓰레기 같은 존재일까. 그들 중에는 사회의 보석이 된 존재들도 있다. 가수 송창식씨도 윤항기씨도 노숙생활내기 걸인 노릇을 했다고 고백하는 걸 들었다. 폐지를 주으면서 살다가 고시에 합격해 검사가 된 사람도 봤다. 일자리를 잃고 돈이 없어 가족 보기가 민망해서 거리로 나간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흙그릇같은 투박한 겉모습 안에 금같이 귀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양극화가 심화되는 사회에서 그들을 인간으로 대하는 시선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끼 밥을 주고 끝나는 게 아니라 희망을 만들어 그들에게 배달해 주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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