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저승행 터미널 대합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나이 팔십 가까운 실버타운의 한 부인이 한탄했다.
“내가 셔틀버스로 가는데, 삼십초도 늦지 않았는데 그냥 가버리는 거예요.”
그 부인은 분노하고 있었다. 눈에는 원망과 서글픔의 빛이 가득 차 있었다. 그 부인의 부부는 미국에서 오십년 넘게 이민 생활을 하다가 한국의 실버타운으로 역이민을 온 부부다. 남편은 육이오전쟁 때 포병 중위로 참전했다고 하니까 나이가 아흔살이 넘은 노인이었다. 그 부인이 말한 내용은 대충 이랬다. 실버타운의 노인들은 매일 아침 셔틀버스를 타고 바닷가로 가서 파크골프를 치는 게 중요한 일과다. 그 부인은 버스를 탔는데 두고 온 게 있어서 다급하게 방으로 되돌아 갔다가 왔는데 셔틀버스가 가버렸다는 것이다. 차에 타고 있던 남편은 아내가 오지 않자 하는 수 없이 버스에서 내렸다는 것이다. 외진 바닷가에서 바로 택시를 부를 수도 없고 구십대 남편과 팔십대 부인은 자기 차도 없었다. 이상한 건 매일 함께 파크골프를 치는 모임의 회장격인 노인이 그 노부부를 놔두고 그냥 가라고 셔틀버스기사에게 명령을 한 점이었다. 회원인 다른 노인들중 그걸 만류한 사람이 없이 모두 암묵적으로 동조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온 그 노인 부부는 노인사회에서 지독한 ‘왕따’를 당한 것이다. 그건 그 단체를 나가달라는 노골적인 싸인일 수도 있었다. 실버타운 직원에게 그 말을 전해주었다. 직원은 그 노부부의 편이 아닌 것 같았다. 이유야 어떻든 구십이 넘은 노인이 고립된 모습이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는 그 노인과 바닷가 레스트랑으로 가서 함께 점심을 함께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매일 함께 운동을 하고 공동식당에서 밥도 먹고 온천탕에서 만나는 분들이 그렇게 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네요. 슬프지 않으셨어요?”
위로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말했다.
“전혀 슬프지 않아요. 실버타운 안의 노인들을 보면 천차만별인 것 같아요. 질도 차이가 나는 것 같아요. 따질 것도 없고 다툴 것도 없어요.”
노인은 ‘나는 너희들과 달라’하는 개결한 자존심으로 겨우 버티고 있는 느낌이었다.
“셔틀버스의 같은 회원들에게 집사람이 오지 않았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사정을 하시지 그랬어요.”
“기다려달라고 하면 내가 지는 거예요. 내가 차에서 말없이 내리는 게 이기는 겁니다. 차에서 내려서 있으니까 버스보다 더 좋은 지나가던 승용차가 우리를 태워줬어요. 우리를 버리고 셔틀버스를 타고 갔던 파크골프 회원들이 우리 부부를 보고 눈치를 살피던데요. 화를 내는 것 보다 그렇게 한 쪽이 우리 부부가 이긴 거 아닌가요?”
“그래도 외로운 노년에 이웃과 정을 나누며 관계를 맺어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보니까 이 실버타운은 같은 마을의 이웃이 아니라 저승으로 가는 사람들이 잠시 앉아 기다리는 대합실이예요. 서로 서로가 순간적으로 무심히 스쳐 가는 그런 관계죠. 같이 골프를 칠 뿐 회원들과 개인적으로 차 한잔 같이 나누며 얘기 한 적이 없어요. 실버타운의 옆집하고도 마찬가지구요. 일요일이면 교회에 가는데 거기서도 실버타운 구역장이라는 사람하고도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없어요.”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노인이 바람 부는 어두운 들판에 홀로 서서 버티는 메마르고 비틀린 고목 같은 느낌이 들었다. 노인의 내면에도 찬바람이 불고 고드름이 가득 붙어 있는 것 같았다. 나이 구십이 넘는 노인은 애써 상황을 부인하면서 버티는 것 같았다. 미국에서의 육십년을 그런 잡초같은 생명력으로 버텨왔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거동을 못하시면 요양원에 가실텐데 아직 건강이 남았을 때 행복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은 황혼에서 밤이 오기 전 하늘에 마지막 노을이 남은 약간의 틈이 아닐까요?”
“난 지금 하루하루 행복해요. 며칠 전 한국의 고등학교 동창회에 전화를 걸어봤는데 내 동기가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어요. 내가 제일 오래 산 거죠. 한국으로 오기전 미국 실버타운에 있는 사람들에게 연락해 봤는데 옆에 있던 다섯명이 다 죽었더라구요. 의사가 내 치아는 아직도 육십대라고 했어요. 나는 돈도 더 저축하고 백살이 넘어까지 살 거예요.”
그 노인과 헤어지고 돌아오면서 생각해 봤다. 아무도 없는 저승 대합실에 혼자 남아 있으면 행복할까. 잠시 스쳐가는 인연이라도 미소를 던지고 말을 하고 정을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나이가 들면 한 발은 저세상에 딛고 내세를 믿어야 떠나는 발걸음이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감성을 위한 ━━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노인들의 자기소개서 (1) | 2023.08.29 |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저는 3류작가 입니다 (0) | 2023.08.28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지리산 수필가 (2) | 2023.08.23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이야기 (2) | 2023.08.22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살면서 가장 아름다운 자리 (0) | 2023.08.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