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 평안
밀양이라는 영화에 등장하는 살인자가 피해자에게 용서받음도 없이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고 평안으로 그윽하여 뻔뻔하고 파렴치한 것을 보며 영화에서나 있음직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이것이 오늘날 많은 교인들과 목사들의 자화상인지 모른다.
자신의 탐욕과 악함으로 상처를 입히고 피해를 준 사람에게 용서를 구함도 없이 하나님이 죄를 다 사하셨다고 스스로를 자위하며 사는 이들이 교인들 중에 유난히 많다. 그러나 이런 자작평안은 일시적으로 그의 죄책감을 무마시키고 거짓 안위를 안겨줄지 모르나 그의 양심을 마비시키며 그 영혼을 좀먹는다.
우리는 말과 행동으로 다른 이에게 범죄한 것은 쉽게 잊거나 합리화해버리고 넘어간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용서했다고 유유자약하며 산다. 그러나 우리가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간 것을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시고 반드시 짚고 넘어가실 것이다. 우리에게 상처받은 영혼이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하며 망각의 세계에 묻어둔 우리 죄가 우리를 고소하며 정죄한다. 이 은밀한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을 때 우리는 점점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괴물로 변해간다.
- 고려신학대학원 박영돈 교수 -
"우리가 살아야 할 의미는 하늘이 아니라 두 발을 딛고 서있는 땅에 있다는 걸 '밀양'을 통해 말하고 싶었다"
- 이창동 감독의 칸느 기자회견에서 -
“사람 죽여 놓고 미안하다면 다인가”
“도대체 누가 누구를 용서한다는 것인가?”
- 영화 <밀양> 대사 중 -
영화 밀양, 그리고 기독교
2007년 <밀양>이라는 영화는 한국 교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기독교를 폄하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하기도 하고, 또 교회 내의 일부에서는 우리가 보고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통해서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신앙에 대해 얼마나 큰 부분을 잘못 알고 있는지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영화를 못 보신 분들을 위해 잠깐 내용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인 여배우 전도연(신애)의 아들이 유괴를 당해 죽게 됩니다. 남편도 잃어버린 주인공은 이제 아들을 잃는 고통까지 겪습니다. 인생의 모든 시름 속에 빠져 있을 때쯤 우연히 교회의 한 집회에 참석하게 되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새 생명을 얻고 모든 아픔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주인공은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찾아가 용서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주위에서 만류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굳이 원수와도 같은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로 찾아갑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알고 마음의 평안을 찾 되었는데, 그런 당신에게도 하나님을 소개하고 싶다는 주인공의 말에 그 살인범의 하나님께서 이미 자기 죄를 용서하셔서 평안을 찾았다는 말을 듣고 주인공은 큰 충격을 받고 신앙에 대한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제 우리의 믿음에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메시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제 교회가 하나님과 나의 관계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성도들끼리, 또 세상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를 가르쳐야 합니다. 사람은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 이기적입니다. 무례합니다. 천박합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다(고전 13:5)고 바울은 분명히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라는 것은 막돼먹은 사람처럼 자기 멋대로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교회가 그런 바른 삶을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온 정성을 쏟는다고 했지만,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신앙을 비아냥거렸고, 얕잡아 보는 것입니다. 돌아보면 교회만큼 질서가 없는 곳도 없습니다. 예의도 없고, 어떤 곳에는 배려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상식이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이제 한국 교회는 비판의 대상, 타도의 대상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 주제를 마무리하면서 다시 <밀양>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 살인범은 어떻게 해야 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를다 용서해 주시는 분입니다. 살인이라고 해서 하나님 앞에 용서받지 못할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의 죄를 용서하셨으니 정말 자기가 살해한 아이의 어머니에게 전혀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될까요? 그 살인범은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해야 했습니다. 종적인 관계만이 아니라 횡적인 관계가 더 중요했기 때문에 진심으로 그 어머니에게 용서를 구했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이고 믿음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을 내 목숨과 같이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영화를 만든 감독도, 더 심각한 것은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우리조차도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헷갈리고 혼동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너희의 믿음이 그런 것이야? 그것이 진짜 믿음이야?’라고 하면서 우리를 비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믿음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할 말이 없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믿음의 지평을 열어가야 합니다. 부끄러운 과거의 잘못된 믿음을 벗어버리고 하나님과의 종적인 관계만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횡적인 관계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믿음 얻기를 원한다면 횡적인 관계, 바로 우리 이웃과의 관계도 바로 서야 합니다.
돌아보아 형제에게 원망받을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속히 그에게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찾아가서 사죄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하여 섬기려 하듯이 우리의 이웃에게도 온 힘을 다해 우리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온전한 십자가의 삶이고, 십자가의 믿음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복되지 않으면 한국 교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누가 이런 어이없는 교회에 오겠습니까? 영화 <밀양>이 말하는 것처럼 저런 어이없는 믿음을 누가 가지려고 하겠습니까? 나부터, 우리부터라도 회복되어야 합니다. 종적인 관계를 통해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횡적인 관계인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십자가의 온전한 믿음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의 믿음이 싸구려가 아니라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하고, 그들이 비난하는 것처럼 개독교가 아니라 이 길만이 유일한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세상에 당당하게 우리의 삶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나는 예수를 사랑한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 간디 -
- 예배하는교회 양희삼 목사 / 밀양, 십자가의 완성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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