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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苦惱와 讀書(고뇌와 독서) 안병욱

Joyfule 2006. 4. 24. 01:24

젊은 날의 苦惱와 讀書(고뇌와 독서) 안병욱 1. 정신적 탄생과 신체적 탄생 사람은 이 세상에 두 번 태어난다. 첫 번째는 존재하기 위해서 태어나고 두 번째는 생활하기 위해서 태어난다. 제1의 탄생은 신체적 탄생이라 한다면, 제2의 탄생은 정신적 탄생이라 할 수 있다. 대학생은 인생의 제2의 탄생을 맞이하는 때다. 탄생에는 언제나 진통과 고뇌가 따른다. 어머니가 어린애를 낳을 때에는 자기의 생명을 걸고 죽음을 각오하는 진통을 겪어야 한다. 자아적 탄생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정신적 탄생도 마찬가지이다. 20대는 인생의 큰 위기다. 모든 것이 크게 변혁하는 때다. 뱀이 낡은 껍질을 벗듯이 정신적 자기탈피를 하는 때다. 우선 性(성)에 눈뜨고 異性(이성)과의 사랑의 충동을 느낀다. 인생의 意義(의의)나 사는 목적에 대해서 근본적인 회의를 품게 된다. 나는 장차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냐 하는 큰 의문 앞에 선다. 20代는 특히 감정의 이중성에 휩쓸리기 쉽다. 모든 일에 대해서 큰 자신과 용기를 갖는가 하면 심한 좌절감과 실망감에 빠진다. 명랑과 우수, 낙관과 불안, 밝음과 어둠이 걷잡을 수 없이 교착한다. 우정과 대화를 원하면서 고독과 도피를 좋아한다. 개방적이면서도 폐쇄적이다. 높은 이상의 꿈을 지니면서 현실의 쾌락에 집착한다. 냉철한 로고스의 아들인 동시에 뜨거운 파토스의 딸이 된다. 理想我(이상아)와 現實我(현실아)가 서로 상극한다. 뜻은 높고 힘은 부족하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탄타로스처럼 하고자 하는 욕망과 할 수 있는 가능의 상극 때문에 마음의 초조를 느낀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서로 모순, 대립하는 이원성의 원리를 자기 내부에 지닌다. 젊은이의 자아구조는 이중성을 가진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의 자아와 있어야 할 理想(이상)의 자아 사이에 거리와 상극이 생긴다. 주어진 나와 이루어야 할 나 사이에 모순이 깃들인다. 괴테는 이러한 자아분렬을 두개의 혼이 내 생명 속에서 서로 싸우고 있다고 『파우스트』에서 표현하였다. 2. 자아형성과 대학생 대학생은 이미(already) 어린애가 아니다. 그러나 아직(not yet) 어른은 못 되었다. 그는 ‘아직’과 ‘이미’의 중간에 처한다. 소년에 비하면 대학생은 이미 자율적 의지를 가지는 자각적 존재다. 그러나 아직 사회적 독립인이 될 만큼 성숙한 인격을 갖지 못한다. 대학생은 자아발견 자아확충 자아형성의 시기에 있다. 내가 나를 발견하고 나를 확충하고 나를 만들어 나아가야 한다. 옛날 델포이 신전의 흰 대리석 벽에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그리스인의 슬기로운 잠언이 아로 새겨져 있었다. 대학생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하는 때다. 우리는 이것을 자아발견이라고 일컫는다. 젊은 날에는 왜 인생의 고뇌가 많은가? 고뇌는 인생의 자아발견,자아형성에 반드시 수반한다. 괴로워한다는 것은 곧 성장한다는 것이다. 영국의 계관시인 존 메이스필드는 이렇게 말했다. 지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서 대학은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대학은 젊은 생명들이 정신적으로 향상하고 인간적으로 성장하는 장소다. 내가 나를 발견하고 내가 나를 키워 나아가는 곳이다. 대학은 진리를 추구하고 학술을 배우는 곳이다. 무지를 없애고, 편견을 제거하고, 자주적사고력과 공정한 비판정신을 기르는 곳이다.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주장하는 지적 성실성과 정신적 용기를 기르는 곳이다. 인간의 능력을 기르고 양심을 닦는 곳이다. 이성인.자유인.교양인이 대학에서 생산된다. 민족의 두뇌와 심장을 기르는 곳이 대학이다. 이기와 편견과 폭력과 오만과 독선이 전혀 통하지 않는 곳이 대학이다. 지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서 대학처럼 아름답고 희망적이고 생산적이 것이 또 어디에 있는가? 시인 메이스필드의 대학 예찬은 결코 문인의 공허한 미사려구가 아니다. 우리는 대학에 들어 왔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진리의 전당 아이디어의 대장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생활할 것인가? 젊은 시절은 인생의 제2의 탄생의 시절이요, 정신적 자아발견의 시기다. 낡은 차원의 나를 벗어 버리고 새로운 차원의 나를 찾고 만드는 때다. 우리는 지금 낡은 사람에서 새 사람이 되는 제2의 탄생의 고뇌를 겪고 있다. 새로운 가치관과 생활신조와 사고방식에 있어서 신념체계를 확립해야 한다. 새로운 인간의 형성은 새로운 사상의 건설에서부터 시작한다. 3. 젊은 날의 고뇌의 종류 젊은 날의 고뇌는 여러 가지가 있다. 나는 그것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려고 한다. 첫째는 이성에 관한 고뇌다. 루소는 이렇게 말했다. “10세에는 케이크에 움직이고, 20세에는 연인에, 30세에는 쾌락에, 40세에는 야심에, 50세에는 탐욕에 움직인다. 인간은 언제 오직 예지만을 추구하게 될 것인가!” 이 말에는 깊은 통찰이 있다. 10代는 맛있는 케이크를 좋아하는 때다. 그는 단순하다. 20代대는 사랑에 눈을 뜬다. 애인이 그를 지배하게 된다. 20代대의 지배적인 정열은 사랑의 정열이다. 30代가 되면 쾌락의 노예가 되기 쉽고, 40代는 인생의 야심에 지배되고, 50代에 가면 분에 맞지 않는 탐욕이 그를 사로잡는다. 언제 인간은 이성의 아들이 되어 인생의 지혜만을 추구하게 될 것인가. 이것이 루소의 人生의 견해다. 분명히 20代는 사랑의 시대다. 강렬하고 순수한 에로스의 감정이 젊은이를 사로잡는다. 젊은 이성을 사랑하고 싶고, 또 사랑 받고 싶다. 사랑의 대상이 없을 때 인생의 고독을 느낀다. 인간에게 그리움과 사모와 사랑의 감정이 부여되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답고 축복받을 일인가. 사랑의 샘터가 인간의 마음의 밭을 푸르게 하고 기름지게 한다. 사랑은 인간을 심화시키고 미화시키고 또 정화시킨다. 플라톤의 유명한 대화편「향연」은 사랑의 힘의 위대함을 노래한 철학적 다이얼로그다. “사랑을 할 때는 누구든지 詩人시인이다.”라고 플라톤은 말했다. 그만큼 사랑은 인간을 지배하는 힘을 갖는다. “개도 사랑을 할 때는 아름다운 운률로 짖는다.”고 영국의 극작가 존 프레쳐는 말했다. 그러나 사랑은 또한 인간을 맹복적으로 만든다. 사랑은 인생의 열병이요, ‘마음의 중환' (플라톤의 말)이다. 사랑과 지혜는 병행하기 어렵다. 사랑에 빠질 때 우리는 인생의 지혜와 분별을 잊어버리기 쉽다. 사랑의 정열 때문에 인생의 파멸의 구렁에 빠지는 사람을 우리는 주변에서 수없이 본다. 그만큼 사랑은 인생에서 가장 다루기 어려운 것이다. 사랑은 인생의 홍역이다. 누구나 다 한 번은 걸린다. 잘 치르면 축복의 열매가 되고 잘못 치르면 불행의 씨를 만든다. 사랑! 이 아름답고 무서운 감정, 이 위대하고 강렬한 힘, 향상의 원천인 동시에 파멸의 구렁, 우리는 젊은 날의 인생의 열병인 사랑을 슬기롭게 처리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랑은 지혜의 도움을 요한다. 열정의 불은 이성의 빛이 필요하다. 인생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사랑을 위해서 인생의 전부를 희생한다면 분명히 어리석은 일이다. 사랑의 고마움과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사랑의 어려움과 위험함도 알아야 한다. 사랑의 苦惱고뇌에 빠져서 人生을 망치는 어리석은 젊은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는 인생문제에 관한 고뇌다. 지식인은 생각하면서 살고 살면서 생각한다. 젊은이는 인생의 근본 문제에 대해서 심각한 회의를 품는다. 우리는 왜 사느냐, 인생의 목적과 의의가 무엇이냐,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우주에 대해, 역사의 의미에 대해서, 신의 존재와 죽음에 대해서, 또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그것은 인생에 대한 철학적 물음이요, 궁극적인 관심이다. 젊은이는 한 때 누구나 철학자가 된다. 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을 인생과이라고 해 두자. 젊은이는 인생관의 탐구와 확립에 깊은 관심을 갖는 때다. 내 인생이 디디고 설 철학적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 철학자 칸트는 철학의 제문제는 다음 세 가지 물음으로 요약된다고 하였다. 1.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2.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가? 3.우리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이 세가지 물음은 결국 다음 한 가지 근본적인 물음에 귀결된다고 칸트는 말했다. 즉,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분명한 답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철학 책을 읽고, 종교의 사적을 보고 文學문학을 접한다. 그러나, 아무도 시원한 대답을 해 주지 않는다. 싸르트르의 대답이 곧 내 대답은 아니다. 니체의 결론이 곧 나의 결론은 아니다. 카프카의 인생관이 곧 나의 일 수는 없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인생관을 스스로 확립해야 한다. 인생에 대한 나의 신념체계를 내가 스스로 수립해야 한다. 철학자들의 사색은 나의 길잡이가 되고 인생의 한 지침이 될 뿐이다. 결국은 나 자신이 내 인생관을 확립해야 한다. 칸트는 그의 철학 강의를 듣는 젊은 학생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나에게서 ‘철학’(Philosophie)을 배우지 말고 ‘철학하는 것’(Philosophieren)을 배워야 한다.” 스스로 사색하고 스스로 탐구하고 제 발로 서라. 칸트의 이 말은 철학적 사색의 길에 나서고, 인생관의 탐구의 첫 걸음을 내어 디디는 우리들에게 좋은 誡命계명이요, 지혜의 빛이 된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고 제 발로 서는 자주적인 독립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인생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성실하게 탐구해야 한다.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 가제트는 오늘날의 대학생이 저지르는 가장 큰 정신적 범죄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불성실한 것이라고 갈파하였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불성실한 것, 이것이 인생에서 가장 나쁜 일이다.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성실해야 한다. 그래야 모든 일에 대해서 성실할 수 있다. 셋째는 자기의 사명과 장래에 대한 고뇌다.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이냐에 대해서 우리는 진지한 고뇌를 갖지 않을 수 없다. 인생은 자아실현의 무대요, 자기 천분발휘의 장소다. 월급도 중요하고 수입도 고려해야 하지만, 나의 개성을 살리고 나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보람을 느끼고 정열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사는 기쁨이 있고 인생의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직업을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기의 일을 발견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칼라일은 말했다. 지극히 평범한 진리다. 우리는 이 평범한 진리를 깊이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자기가 하는 일에서 기쁨과 자랑과 보람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혼 없는 기술인이 되고 개성 없는 기계로 전락하기 쉽다. 나를 살릴 수 있는 일을 가져야 한다. 자기의 사명을 자각하고 자기의 천직을 발견하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나는 앞으로 社會에 나아가서 무엇을 할 것이냐, 무엇을 하는 것이 나를 살리고 내 인생의 보람을 줄 수 있느냐, 우리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대학 시절은 자기의 장래의 사명과 천직을 위한 준비의 시기다. 공자는 “三十而立”삼십이립이라고 하였다. 30세에 하나의 독립적인 인간으로서 사회에 섰다는 것이다. 孔子공자의 ‘섰다’는 뜻은 의미가 깊다. 정신적 독립, 인격적 독립, 경제적 독립, 사회적 독립을 의미한다. 내가 설 자리에 섰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서지 못할 자리, 서서는 안 될 자리에 서는 사람이 많다. 우리는 제 설 자리를 찾아야 한다. 사회에 나와서 제 자리에 설 수 있는 인격과 실력의 준비를 대학에서 갖추어야 한다. 율곡은 학문의 길을 먼저 입지에 있다고 하였다. 입지는 뜻을 세우는 것이다.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자기의 사명을 깨닫는 것이다. 먼저 높은 뜻을 세워야 한다. 인생의 높은 뜻이 우리를 높은 生活생활로 끌어 올린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부단한 노력의 과정이요, 끊임없는 분투의 계속이요, 괴로워하면서 싸우는 것이다. 성공은 노력의 열매요, 승리는 분투의 결실이다. 값있는 일은 저절로 되지 않는다. 4. 자기발전과 자기확충과 독서 대학은 자기발전 자기확충 자기형성의 장소다. 우리는 올바른 인생관을 확립하고 자기의 사명을 발견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독서를 해야 한다. 나의 정신적 자아성장을 위하여 좋은 책을 읽자. 人生은 매우 짧고, 조용한 시기는 극히 드물다. 우리는 지저분한 책을 읽는 데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라스킨의 이 평범한 독서의 잠언을 잊지 말아야 한다. 雜書잡서를 읽고 인생을 낭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인생은 ‘만남’이라고 한스 카로사는 말했다. 독서는 우리가 古人고인과 만나는 시간이다. 책의 배후에는 저자가 있다. 특히 고전과 명저의 배후에는 위대한 인물이 있고 그의 사상과 만난다.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맛이 나는 말인가? 독서는 인생의 진리와 조우하는 시간이요, 동서고금의 인물과 만나는 지리다. 훌륭한 인물과 만나는 시간, 깊은 말씀과 만나는 인생은 인생에게 가장 뜻이 있는 시간이요, 보람 있는 일이다. 『바이블』을 읽을 때 우리는 예수와 만난다. 『논어』를 읽을 때 우리는 孔子와 만난다. 『파우스트』를 읽을 때 우리는 괴테와 만나고, 『팡세』를 읽을 때 우리는 파스칼과 만난다. 『大乘起信論疎』대승기시론소를 읽을 때 우리는 원효와 만나고, 『亂中日記』난중일기를 읽을 때 우리는 이순신 장군과 만난다. 『우파니샤드』를 읽을 때 우리는 인도의 옛날 성자들을 만난다. 만남은 만남으로만 그치지 않고 나의 마음을 깨우치고 나의 혼을 불러일으킨다. 나의 정신이 각성한다. 저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살이 지고 우리의 인격이 성장한다. 내가 내 속에서 빛을 발견한다. 조우는 정신적 탄생의 계기가 된다. 좋은 책이란 그런 책이다. 名著명저란 우리의 마음 속에 광명을 던지는 책이요, 우리의 정신적 성장을 돕는 책이다. 취미와 교양을 위한 독서도 좋다. 그러나, 대학시절에는 좀더 성실한 정신으로 진지한 독서를 해야 한다. 나의 정신적 성장의 귀한 肥料비료가 될 수 있는 책을 읽어야 한다. 저자의 인격과 만나고 진리와 만남으로써 낡은 나를 새로운 나로 변혁시켜야 한다. 우리는 좋은 친구를 선택하듯이 좋은 책을 선택하고 훌륭한 저서를 선택해야 한다. 나의 정신적 우주를 확대시키고 인간적 성장을 촉구시키는 책들을 골라서 읽어야 한다. 좋은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과거의 위대한 인물들과 소리 없는 내적 대화를 서로 교환하는 것이다. 이 대화를 통해서 나는 성장한다. 나는 강해지고 착해지고 깊어지고 또 넓어지는 것이다. 그러한 독서만이 정신적 양식이 될 수 있다. 그리스의 비극시인 아이스큐러스는 “지혜는는 고뇌에서 생긴다”고 말하였다. 산다는 것은 곧 괴로워하는 것이요, 괴로워하는 것은 곧 배우는 것이다. 베토벤은 “고뇌를 통해서 환희에로”를 강조했다. 고뇌가 고뇌로만 그친다면 고뇌는 인생에 대해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生생의 부정적 저해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고뇌는 정신을 심화시키고 생의 환희를 가져오는 계기가 된다. 우리는 고뇌를 통해서 환희에 도달해야 한다. 고뇌를 통해서 배우고 고뇌해서 환희에 이를 때 고뇌는 인생에 대해서 긍정적 의의와 적극적 가치를 지니게 된다. 젊은 날의 고뇌를 통해서 우리는 자기 인생을 심화시켜야 한다. 고뇌를 통해서 배우고 고뇌를 통해서 환희에 도달할 때, 우리는 인생의 슬기로운 生活人이 된다. 독서는 고뇌를 지혜와 환희로 化화하게 하는 데 하나의 생명적 계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