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스러우면서도 슬픈 영화 좋아하세요?
오늘은 그런 영화 한 편 소개해드리겠습니다.
피터 위어가 감독한 '행잉록에서의 소풍'(Picnic At Hanging Rock)입니다.
가장 오스트레일리아적인 오스트레일리아 영화이지요.
사실 이 영화는 분위기가 전부인 영화입니다.
몽환적이고 최면적인 분위기,
햇살은 내리 쬐는데, 나른하면서도 쓸쓸한 분위기랄까요.
정말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작품이지요.
이런 영화를 쉽사리 보실 수 없다는 게 안타깝지만요.
그래서 주로 그런 영화들을 이 코너에서 읽어드리고 있잖습니까
먼저 피터 위어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네요.
좋아하시는 분들 꽤 있으시죠?
'트루먼 쇼' '위트니스' '죽은 시인의 사회' 같은 히트작들을 내놓은 감독이죠.
피터 위어는 호주 감독입니다.
70년대 중반 조지 밀러, 브루스 베레스포드, 질리언 암스트롱 등과 함께
이른바 '오스트레일리아 뉴 웨이브'를 일으키며
세계 영화사에 호주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린 감독입니다.
결국 이들은 전부 할리우드로 진출했지요.
조지 밀러는 '매드 맥스' 시리즈로 아실테고
브루스 베레스포드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를 만들었고
질리언 암스트롱은 '소펠 부인'이나 '나의 화려한 경력' 같은 작품이 유명하죠.
이들 중 선두주자인 피터 위어는
'파리를 삼킨 차'라는 희한한 스릴러로 데뷔했어요.
여기서 파리는 지명인데 프랑스가 아닌 호주에 있는 작은 마을 이름이지요.
여행객들로 하여금 자동차 사고를 내도록 유도해서
사망자를 유기하거나 부상자를 감금한 뒤
그들이 소지했던 귀중품이나 자동차 부품을 훔쳐서 살아가는 마을 이야기지요.
이 영화도 무척 흥미롭고 독특하지요.
그 다음에 만든 작품이 바로 '행잉록에서의 소풍'입니다.
그의 나이 서른한살 때인 1975년작인데요,
아닌 게 아니라 이런 영화는 정말 서른 다섯 넘어가면
영원히 만들 수 없는 종류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뭐라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독특한 분위기를 갖고 있지만
굳이 비교한다면 피터 잭슨의 '천상의 피조물들'과 비슷한 느낌이 있지요.
국내 영화로는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가 닮아 있구요.
(사실 이 영화를 읽어주기용 두번째 영화로 선택한 것은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때문입니다.
디렉터스 컷에 지난 10년간 가장 뛰어난 한국영화의 리스트를 올렸다가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답글에서 조금 쓰면서
'행잉록에서의 소풍'이 떠올라 읽어드리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거든요.^^)
이 영화는 장면장면이 무척이나 고급스럽고 우아해보이지만
45만달러라는 저예산으로 완성한 작품입니다.
그 돈으로 이렇게 만들 수 있다니 대단한 재능이지요.
피터 위어는 이 영화 후 '라스트 웨이브'라는 또 하나의 희한한
팬터지 스릴러를 한 편 더 만들고 할리우드로 진출했지요.
할리우드 진출 이후의 피터 위어의 작품들은
호주에서 만든 세편과 많이 달라졌지요.
이전과 전혀 달리
('죽은 시인의 사회'나 '트루먼 쇼'를 연상하시면 짐작하시겠지만)
내러티브를 중시하는 휴머니즘 드라마들이 그의 전공이 되었으니까요.
트루먼 쇼, 위트니스, 죽은 시인의 사회, 마스터 앤 커맨더,
갈리폴리 같은 작품들도 좋지만
전 아무래도 호주 시절의 작품들을 더 좋아하는 편입니다.
물론 '행잉록의 소풍'이 베스트구요.
할리우드 시절 작품 중에서는 일반인들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공포 탈출'(Fearless)이라는 영화를 꽤 좋아합니다.
제프 브리지스의 연기가 참 좋은 영화죠.
아, 해리슨 포드가 인상적으로 나오는 '모스키토 코스트'도 훌륭합니다.
이거, 이렇게 쓰면 또 한 없이 길어질 것 같으니
일단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시죠.^^
영화의 첫 장면입니다.
때는 1900년, 오스트레일리아 빅토리아주의 우드엔드라는 곳에 있는
애플야드 칼리지가 무대입니다.
영화의 분위기를 그대로 알려주는 오프닝 컷이죠.
이 영화의 지배적인 색조를 바닥에 깐 상황에서
멀리 숲 속에 애플야드 칼리지가 보입니다.
뭔가 감춰져 있는 듯한 모습이지요.
오프닝 시퀀스의 첫 장면은 바로 이것.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하며 엄격하게 교육받고 있는 이 대학의 학생인
미란다가 아침에 눈을 뜨기 직전 장면이지요.
영화 전체가 몽환적이라는 것을 암시라도 하듯 말이죠.
이 컷에서 미란다는 곧 눈을 뜨게 되는데
그 모습은 이 영화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억압적인 교육환경 속에서 서서히 내면의 욕망이나
자아에 눈을 뜨는 여학생들의 이야기로 볼 수 있으니까요.
아침에 일어나 몸 단장을 하며 룸메이트 사라와 이야기를 나누는
미란다의 모습이 멋진 구도의 화면에 담겼죠?
그런데 외출을 앞두고 미란다는 사라에게 좀 이상한 말을 합니다.
"넌 나 말고 사랑할 사람이 더 있어야 할 거야.
난 이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을 거거든."
이날은 바로 이 학교 여학생들이 두명의 여교사 인솔 하에
행잉록이라는 근처의 산으로 소풍을 가는 날입니다.
빅토리아 시대 여학생들의 전형적 옷차림인 이들은 한껏 들떴죠.
내내 학교에서 억눌려 신부 수업을 받는 게 일상이었으니까요.
위험한 행동을 하지 말라는 교장의 훈시를 들으면서
미란다는 학교 건물 옥상을 슬쩍 바라보고 미소 짓습니다.
거기엔 사라가 손을 흔들고 있었으니까요.
고아원 출신인 사라는 지난 몇달간 그의 후견인이 수업료를 내주지 않아서
현재 그 벌로 금족령에 처해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녀를 뺀 19명의 학생들만 소풍을 가게 된 거지요.
'행잉록에서의 소풍'에서는
대자연을 강조하는 이런 익스트림 롱샷 화면이 자주 나옵니다.
존 포드의 '역마차'를 위시해 미국 서부의 황야에서 찍은
많은 서부영화의 구도를 떠올리게 하는 이 장면은 인물의 움직임을
점으로 묘사하는 이런 롱샷 화면을 통해서
문명을 압도하는 대자연의 신비를 강조합니다.
그게 이 영화의 분위기를 결정짓는 하나의 요소이기도 하지요.
3억5천만년 전에 형성된 행잉록이라는 봉우리와 기껏 칠십년을 살다갈
인간의 삶은 영화 속에서 날카롭게 대비되고 있습니다.
소풍 간 학생들은 케익 먼저 자릅니다.
극중 토요일인 이날은 2월14일, 밸런타인 데이였거든요.
케익을 자르는 손은 바로 미란다의 것이지요.
(남반구이니) 화사한 여름날 쏟아지는 햇살 속에서 핑크빛 케익을
자르고 있지만 왠지 섬뜩하게 느껴지는 장면이죠?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실제 1900년 2월14일은 일요일이었다는 거죠.
누군가가 이런 '옥에 티'를 지적하자 피터 위어는
"그런 게 바로 이 영화가 말하는 시간의 신비를 드러내는 설정"이라고 했다지요.
똑똑한 사람들은 실수까지도 이렇게 창의적으로 되돌려칠 수 있군요.^^
무척 즐거워 보이죠?
그러나 이 장면이 로우 앵글로 찍혔다는 것에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카메라의 위치를 낮게 잡아 인물들을 올려 찍을 때는
인물들에게 권위를 부여하거나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인데
이 컷은 오히려 인물들을 내리 누르는 듯한 하늘과 숲,
즉 대자연을 강조하는 효과를 빚지요.
이 영화는 그렇게 로우 앵글이나 하이 앵글을 자주 섞어가며
비현실적이고 초자연적인 분위기를 엮어냅니다.
이 영화의 배우들은 전부 호주 배우들이기 때문에 알려진 얼굴이 별로 없습니다.
미란다 역을 맡은 배우 앤 루이즈 램버트는 줄리 델피와 많이 닮았죠?
애초 미란다 역을 맡았다가 몇차례 촬영까지 했던 배우가 있었는데
피터 위어가 "아무리 생각해도 미란다 역에는 너무 큰"
그 배우를 해고하고 급하게 램버트를 캐스팅해서 투입했다고 하지요.
제가 이 영화에서 무척 좋아하는 컷입니다.
시간이 좀 지나 여름볕에 학생들이 이곳저곳에 늘어져 있는데
숲 속 인물들의 동선이나 배치,
광선의 방향 등이 너무나 회화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때 인솔 여교사의 회중 시계가 낮12시에서 멈춰서는 일이 생깁니다.
이 영화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암시 같은 부분이지요.
'행잉록에서의 소풍'에선 주로 바흐와 모차르트, 베토벤의 음악이 쓰였습니다.
특히 전반부에서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이 중요하게 삽입되어 있지요.
산 속에서 여학생들이 시간을 보낼 땐
신비한 음색을 가진 팬플룻 음악을 새로 작곡해 넣기도 했습니다.
먹다 남은 케익에 개미들이 들끓고 있죠?
이 영화는 이처럼 종종 무심하게
개미와 뱀과 새와 거미의 모습을 인서트하곤 합니다.
일단 깊은 산 속에 들어와 있는 상황에서
사람과 그런 동물들 사이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듯한 태도로 말이지요.
이어 미란다를 비롯한 네명의 여학생이 행잉록까지 올라갔다 오겠다고
말하며 떠납니다. 돌아보는 미란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죠?
돌아볼 때, 언제나 그 시선에는 기묘한 감정들이 담기게 마련이지요.
때마침 산에 놀러와 있던 두 청년들이 그들을 봅니다.
영국에서 잠시 호주로 와 있던 청년 마이클이 왼쪽이고
마을에서 날품팔이 일을 하며 살아가는 호주 청년 앨버트가 오른쪽입니다.
나중에 살짝 암시되는데,
앨버트는 바로 고아원에 있다가 헤어진 사라의 오빠이기도 하죠.
둘은 이 영화에서 끝내 만나지 못하지만요.
그들이 넋을 놓고 보고 있는 것은
작은 개울의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는 여학생들의 모습이었습니다.
특히 미란다를 보면서 마이클은 마음이 설레는 것을 느끼지요.
물에 젖을까봐 치마를 살짝 말아쥐어 검은 스타킹을 드러낸 모습,
이 영화는 여자의 다리에 페티시가 있다고 할 만큼
여학생들의 다리를 통해 내내 성적인 암시를 합니다.
언뜻 보면 이 영화에 성적인 코드가 별로 없는 듯 보이지만,
사실 이런 장면들 속에서 감추인 형태로 섹슈얼리티가 강조됩니다.
이 영화의 독특한 분위기 때문에
관객에 따라서는 무척 에로틱한 작품으로 기억되기도 하는 거지요.
손을 잡고 산으로 올라가는 네 소녀.
뭐라고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이 영화의 성적인 코드에는
동성애적인 표현들도 있습니다.
극중 미란다와 사라 혹은 교장과 여교사 사이의 관계에서 암시되기도 하는데
이런 컷들도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지요.
물론 이런 장면이 소녀들의 들뜬 마음이나 다정한 자매애를 보여주기도 하지만요.
'행잉록에서의 소풍'에선 이중노출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미란다가 신비스런 표정으로 행잉록을 올려다보는 클로즈업에
함께 올라간 소녀 어마가 바위 위에서 치마를 흔드는 미디엄 샷을 겹쳐놓은 거지요.
이런 장면들은 영화 속에서 시간의 경계를 흐리게 하고
관객에게 최면을 거는 것 같은 효과를 내고 있습니다.
1900년 2월14일 오후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신화적인 시간 속에서, 흐름이 멈춘 시간 속에서
화석처럼 새겨진 사건 같은 느낌이랄까요.
그 속에서 소녀들의 모습은 그들이 떠나온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또다른 세상 속에 오로지 그들 넷만이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때 뭔가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미란다는
"모든 것은 그렇게 짜여져 있는 시간과 장소에서
정확히 시작하고 끝나지"라고 읊조리기도 하지요.
그곳에서 소녀들은 갑자기 혼곤한 잠에 빠집니다.
잠에 빠진다는 설정 역시 이 영화에서 성적인 측면을 갖고 있지요.
영화속에선 행잉록으로 불리우는 우뚝 솟은 바위 산의 모습이 인서트되는
일이 몇번 있는데 그런 장면 역시 성적인 연상을 겨냥한 컷입니다.
잠에 빠진 소녀들의 모습을 부감으로 찍은 이 컷은 무척 인상적이지요.
이 영화는 아마도 촬영이 가장 뛰어나고 아름다운 작품 중 하나일 겁니다.
촬영 감독인 러셀 보이드가 빛을 잡아내고
구도를 만들어내는 솜씨는 정말 일품이지요.
최면에 걸린 듯 산 속에서 집단으로 혼절한 소녀들,이란 모티브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해변의 카프카'에서도 비중있게 자리잡고 있지요.
묘사의 방식으로 미루어볼 때
저는 하루키가 틀림없이 이 영화를 봤다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잠에서 깨어난 세 소녀는 봉우리 사이,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어마가 검은 스타킹을 벗는(다는 행위 역시 성적인 코드입니다)
장면 뒤에 나옵니다.
그렇게 세 소녀는 신비 속으로 또박또박 걸어 들어가는 거지요.
뒤늦게 깨어나 혼자 남은 에디스가 겁에 질려
그들을 소리쳐 부르지만 그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습니다.
이어 에디스는 비명을 지르며 산 밑으로 달려 내려오지요.
(그런데 왜 하필 넷 중에 홀로 남는 여학생이 가장 뚱뚱한 에디스일까요.
뚱뚱하면 신비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데서도 열외일 수 밖에 없다는 걸까요.
성적인 코드가 잠재해 있기에 뚱뚱한 여자는 배제될 수 밖에 없는 걸까요.
이런 창작자의 무의식이 이 영화에 대한 저의 유일한 불만입니다만... -.-)
결국 다시는 내려 오지 않은 세 소녀.
그들을 찾아 올라간 여선생 한 명까지 실종되자
나머지 사람들은 울면서 학교로 돌아옵니다.
다음날 대대적으로 수색에 나서지만 아무런 단서 하나 찾을 수 없지요.
더구나 이상한 것은
에디스 역시 자신이 본 것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실종되기 직전 소녀들을 봤던 기억을 떨쳐낼 수 없는 마이클은
결국 앨버트와 함께 행잉록으로 갑니다.
말을 타고 멋지게.
그러나 바위산에서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봉우리마다 헉헉대며 마이클은 소녀들의 흔적을 찾아 사투를 벌입니다.
고집을 쓰며 밤에 혼자 산에 남은 마이클이 걱정되어
다음날 다시 찾아온 앨버트는 피투성이의 마이클을 구한 뒤
다시 산에 갔다가 실종자 중 한 명인 어마를 발견합니다.
다급하고 놀란 마음에 산 밑을 향해 도와달라고 손을 흔들며 외치는 앨버트.
이 역시 황량한 돌산 위
필사적으로 외치는 인간의 동작을 아주 작은 점으로 위치지움으로써
침묵이라는 자연의 신비를 웅변합니다.
이 영화는 핏자국 한 번 보이지 않고,그 흔한 깜짝쇼 음향 효과 한 번 넣지 않고,
오로지 분위기만으로 으스스한 느낌을 시종 갖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섬뜩함 속에 기묘한 슬픔이 깔려 있으니
한 편의 스릴러에서 더 이상 어떤 감정을 더 바랄 수 있겠어요.
나른함과 섬뜩함이 한 쌍으로 엮일 수 있다는 것도 신기하구요.
돌아와 침대에 누워 있는 어마.
그 침대를 감싸고 있는 베일 때문에 미스터리나 신비가 더욱 강조되는 장면이죠?
어마 역시 깨어난 뒤 자신이 겪은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더구나 어마는 숲속 가시덤불에서 발견 당시 맨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발에 작은 생채기 하나 없었지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실종된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걸까요.
숲속에서 성폭행당한 뒤 살해된 걸까요.
험한 바위 틈 사이에서 실족해 죽어 있는 걸까요.
그들은 증발을 원한 걸까요.
이전 삶의 흔적을 완전히 지운 채 또다른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걸까요.
이도 저도 아니면 외계인들이 납치라도 한 걸까요.
의문은 언제나 남겨진 자들의 몫이지요.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실종된 친구들을 남기고
터덜터덜 돌아온 나머지 여학생들 같은 심정이 됩니다.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영국으로 떠나게 된 어마는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고 학교에 들릅니다.
그러나 그녀를 대하는 친구들의 표정은
화면에서 보시는대로 냉랭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친구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비명에 가깝게 물음을 던집니다.
도대체 실종된 아이들은 어디에 있는 거냐구요.
마이클도 그 사건에 완전히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합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그가 환상을 보는 장면이죠.
의자에 앉아 물끄러미 숲 속을 바라보는 마이클은 거기서 미란다의 모습을 봅니다.
미란다를 보는 마이클을 비추던 카메라가 다시 숲으로 시선을 돌리면
거기엔 조금 전까지 있었던 미란다가 사라지고 없지요.
거기서 카메라가 다시 오른쪽으로 패닝하면 못 위에 백조 한 마리가 떠 있습니다.
백조는 극 초반에서 미란다에 비유된 동물이지요.
다시 컷을 나누어 쳐다보는 마이클을 비춘 뒤 서서히 카메라가
그 못으로 시선을 재차 돌리면 거기엔 백조마저 없습니다.
무(無).
추억도, 환상도,
남은 것은 결국 거대한 무일 뿐입니다.
미란다의 사진 앞에서 사라는 내내 눈물 짓습니다.
방안에 틀어박힌 채, 식사도 거부하면서요.
그런 사라에게 교장이 결정타를 먹입니다.
여기는 자선단체가 아니니, 수업료 안 내는 것을
더이상 용인할 수 없다며 퇴교를 명하는 거지요.
그 말을 듣는 사라의 섬뜩한 표정.
여 교장은 실종된 사람들 자체보다는 그 실종 사건 때문에
다음 학기부터 학생 수가 격감할까봐 걱정하는 부류의 냉혈한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냉정한 교장이 어느날 술을 마신 뒤
부하 직원 앞에서 주정에 가깝게 속을 드러냅니다.
남편과 사별 이후 교장은
소녀들과 함께 실종된 나이 많이 여교사와 깊은 관계였던 거지요.
그러니까, 지금은 돈과 명예에 찌든 늙은이가 된 그녀 역시
수십년전엔 또 한 명의 미란다였고 또 사라였던 거지요.
이 장면은 테이블에 앉은 두 사람을 찍는 통상적 카메라 거리보다
훨씬 뒤로 물러나 있지요.
그렇게 삶과 세월에 짙게 드리운 어둠을 효과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라는 결국 학교 건물에서 투신 자살 합니다.
미란다를 기다리며 손을 흔들던 그 옥상에서요.
영화 속에서 표현되지 않고 생략된 이 장면은
이 학교의 정원사가 구멍 뚫린 온실 지붕을 확인하며
까마득한 옥상을 올려다보는 장면으로 암시되지요.
이 영화를 다 보고나면 이상하게도
이건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일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그러나 이 영화의 이야기는 원작 소설이 있을 뿐 순수한 픽션이랍니다.
정원사가 사라의 죽음을 알리려 급하게 달려갔을 때
베일을 드리운 채 굳어 있는 교장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잡으며
이 영화의 현재 장면은 모두 끝납니다.
그때 깔리는 내레이션은 교장이 두달 뒤 행잉록에서 실족사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요.
그녀는 실종된 여교사를 찾아 혼자 그곳을 헤맸던 걸까요.
이 영화는 결국 단 하나의 의문도 풀어주지 않은 채 끝납니다.
철저히 열린 결말이라고 할까요.
아마도 이 영화를 국내에서 개봉했다면 극장문을 나서며 욕하는 관객들이 많았겠지요.
대체, 뭐가 어떻게 됐단 말야.
그러나 이 영화는 결국 설명할 수 없는 신비,
무(無)라는 신비에 대한 영화란 점을 떠올릴 필요가 있겠지요.
결국 결말에서 M.나이트 샤말란 영화들처럼 구차하게 해설하려고 했더라면
이 영화의 매력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테니까요.
'행잉록에서의 소풍'은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초자연적인 깊이와
품위를 갖춘 걸작이라고나 할까요.
그냥 이 세상에선 누구도 풀 수 없는 물음들이 있다는 것,
묻지 않는 것이 어떤 경우에는 유일한 해답이 될 수도 있다는 거지요.
이 영화의 마지막은 행잉록으로 네 소녀가 올라가기 직전
산 밑 소풍 풍경을 다시금 잠시 보여준 뒤
남겨진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떠나가는 미란다를,
영원과 침묵 속으로 사라져가는 한 소녀의 모습을 비춥니다.
그리고 이 영화의 마지막 컷은..
인사를 마치고 고개를 돌린 미란다의 뒷모습 정지 화면입니다.
미란다는 그렇게 떠나갔습니다.
그 모든 삶의 비애와
세계의 미스터리와
억누른 욕망과
이성의 덧없음을
싱그런 숲 속 바람에 팔랑이는 긴 머리카락 속에 가볍게 감춘 채.
이런 것들 쯤이야
모든 것을 침묵시키는 시간의 위력 앞에선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