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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에 5달러에 뺏긴 집, 40억에 재구입…충격

Joyfule 2012. 8. 31. 10:38

 

 

日에 5달러에 뺏긴 집, 40억에 재구입…충격

[중앙일보] 입력 2012.08.25 00:59 / 수정 2012.08.25 12:02

[현장 속으로] 102년 만에 되찾은 ‘워싱턴 공사관’
증발됐던 역사의 귀환 … 부국강병 없는 자주 외교는 좌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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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비감(悲感)을 생산한다. 힘없고 가난한 나라 조선, 고종의 자주 외교 몸부림, 강대국의 위압과 거드름, 대한제국의 허무한 멸망-. 황제의 분투는 처절했다. 하지만 좌절은 절망적이었다.
 그곳은 미국 워싱턴의 조선 공사관이다. 약소국의 저항과 낙담이 담긴 기억의 장소다. 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기대와 회한이 넘쳐나는 곳. 황제의 공사관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19세기 말 한반도 정세는 소용돌이였다. 고종은 밀명으로 국제질서에 도전했다. “미국에 상주 공사관을 개설하라-.” 어명은 은밀하고 엄중했다. 내탕금(內帑金·황제 통치자금)을 내린다. 거액인 2만5000달러다. 헐벗은 나라의 절규 같은 투자다.

 그 돈으로 반듯한 건물을 샀다(매매 완료 1891년 11월). 조선의 유일한 해외 상주공관이다. 조선은 강대국에 외교로 저항했다. 황제의 자주 집념은 활로를 찾는 듯했다. 하지만 중국(청나라)·일본·러시아의 탐욕은 거칠고 치열했다. 황제는 실패한다. 그리고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庚戌國恥), 망국이다. 일본은 그 건물을 강탈한다.

 역사는 비정하다. 망국은 공사관을 기억 속에서 증발시켰다. 그 공관은 오랜 기간 우리 역사에서 사라졌다. 망해버린 제국의 잃어버린 공관-.

 공사관은 살아 있었다. 1980년대 생존 소식이 조금씩 전해졌다. 국내외 사학자들의 학문적 성취다. 아쉽게도 그 파장은 크지 못했다. 2000년대 들어 매입 논의가 본격 시작됐다. 그 과정은 길고 지루했다.

 2012년 8월에 건물을 다시 샀다. 망국 102년 만이다. 정부의 구입자금은 350만 달러(약 39억5000만원). 워싱턴 공사관은 빼앗긴 주권의 상징이다. 주권 회복의 피곤하고 긴 여정은 완결됐다.

황제의 공사관은 고혹적이다. 워싱턴의 중심 백악관에서 가깝다. 북동쪽으로 자동차로 10분 거리다. 매사추세츠 외교가의 끝 쪽이다. 나는 그곳에 20차례 가보았다. 정부가 공사관 매입을 발표한 21일-. 10년 전 그 건물과 처음 대면할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로건 서클-. 워싱턴의 13번가(街), 로드아일랜드·버몬트 애비뉴가 만나는 원형의 순환교차로다. 나는 서클 근처에 차를 세웠다. 카메라와 가방을 둘러멨다.

 가방 속에 워싱턴 역사 서류, 건물(주소=15 Logan Circle NW Washington D.C.) 관련 미국 국립문서보관서 (National Archives) 자료, 사진이 들어 있었다. 서클 한복판에 조그만 공원이 있다. 공원 한복판에 존 로건의 동상이 서 있다. 로건은 19세기 중순 미국 내전(남북전쟁) 때 북군 장군이다. 워싱턴 중심가는 남북전쟁 공훈 서열대로 동상이 서 있다.

 서클 주변은 30여 채 비슷한 건물로 둘러싸여 있다. 3~4층 타운 하우스들이다. 100~120년 된 빅토리아풍의 아담하고 예쁜 적갈색 건물들이다. 깔끔한 고풍의 정경은 한 폭의 수채화다.

 나는 워싱턴시의 건설자료를 꺼내 다시 읽었다. “로건 서클-. 워싱턴에서 독특한 건축미를 간직한 곳, 비슷한 시기에 유사한 양식으로 수십 채를 건립, 빅토리아풍의 외양을 집단적으로 과시, 역사보존지구.”

 집들을 한 채씩 훑어보았다. 그리고 번지수(‘15’)가 적힌 집 앞에 섰다. 주소가 틀림없다. 한 세기 넘은 빛바랜 사진을 꺼냈다. 사진 오른쪽 위에 “大朝鮮 駐箚 美國 華盛頓 公使館(대조선 주차 미국 화성돈 공사관)” 이라고 써 있다. 화성돈은 워싱턴의 한자어. 그리고 뚫어지게 살피며 대조했다.

 외관은 똑같았다. 3층짜리 빅토리아 양식의 겉모습, 창의 위치와 모양도 같았다. 점차 숨을 죽였다. 멋을 낸 굴뚝의 위치도 같았다. 태극기가 걸렸던 옥상도 같은 외양이었다.

 건물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 건물은 미소를 띤 채 미려(美麗)함을 드러낸다. 세련된 건축미를 은근한 매력으로 뽐내고 있었다.

 감동이 몰려온다. 가난한 조선이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건물을 마련했는가. 약소국의 설움을 딛고 어떻게 자주 외교를 펼쳤는가. 황제의 고뇌와 절망이 겹쳐 있는 곳, 공관이 어떻게 온전하게 남아 있었을까. 그것은 역사의 기적이다. 여러 상념이 폐부를 찌르며 맴돈다.

 

 감동은 실망으로 바뀐다.  정부는 왜 공사관을 방치하는가. 공관의 역사적 상징성은 탁월하다. 문화재적 가치의 희귀·차별성은 월등하다. 2000년대 초 가격은 강남 고급 아파트 30평 정도(100만 달러 수준). 경제부국을 이뤘다면서 왜 서둘러 사지 못하는가.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역사의식을 다듬고 달려든 관계자들은 적었다. 나는 상념을 잠시 접었다. 그 건물은 타임머신이 된다. 나를 한 세기 전 역사로 집어넣는다.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은 한반도 질서를 바꾼다. 청나라(중국)의 영향력은 새삼 커졌다. 청과 조선은 실질적 종속관계가 된다.

 청의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는 총독처럼 행세했다. 나이는 20대 후반. 직책은 ‘주찰 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紮 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 긴 이름은 중국이 조선의 종주국임을 과시하려는 의도다. 그의 간섭과 개입은 불손하고 험악했다. 고종은 질렸다.

 조선은 중국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다. 1894년 청일전쟁(청나라 패배)까지다. 고종의 외교적 감수성은 미국에 꽂혔다. 두 가지에 의존했다. 하나는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의 조선책략. “미국은 남의 땅을 탐하지 않는다”는 구절이다. 다른 하나는 조미수호통상조약. 그 조약의 거중조정(居中調整·good offices·분쟁해결) 항목에 기대했다. 고종은 미국을 조정자로 삼아 중국·일본·러시아를 견제하려고 나선다.

 고종은 워싱턴 외교가에 뛰어들기로 작정했다. 상주 전권공사에 박정양을 파견했다(1888년 1월 클리블랜드 대통령에게 신임장제정). 공사관 개설요원 중에 이완용도 있었다. 친일 매국노 이완용(3대 주미서리공사)은 그때 개화·친미파였다.

 고종의 의도는 벽에 부딪혔다. 중국은 영약(<53E6>約, 특별한 약속) 3단을 걸어 방해했다. 조선은 주미 외교관의 격을 낮췄다. 전권공사대신 임시 서리공사를 파견했다. 하지만 고종의 의지는 집요해졌다. 수난과 착오는 고종의 외교리더십을 연마시켰다.

 고종은 건물을 사기로 결심한다. 그때까지 조선 외교관들은 전세 건물에 들어 있었다. 1891년 11월 서리공사 이채연은 매매계약서를 체결했다. “본 부동산은 2만5000달러로 조선공사에 매도하며…”로 시작하는 서류는 워싱턴 시정부 문서철에 남아 있다. 서류에는 내역(지하 1층에 지상 3층, 대지 70평, 연면적 165평)이 기록돼 있다. 지은 지 14년 됐다. 대한제국의 유일한 해외 상주공관은 그렇게 설치됐다.

 이채연은 공사관 옥상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공관 정당(正堂·로비) 벽에도 태극기를 걸고 어진(御眞·고종 사진)과 예진(睿眞·황태자 순종 사진)을 붙였다. 초하루와 보름 어진 앞에 모였다. 황제가 드러낸 자주 외교의지의 실천을 다짐했다. 공사관 규모는 10여 명. 공사·참사관·외국인서기관·보조원·흑인 하인 등이다. 공사관은 지금으론 대사관, 공사는 대사다. 망국까지 13명 정도의 공관장이 워싱턴에서 활약했다.

 제국주의 열강 시대다. 워싱턴에 전 세계 31개국 상주 공사관이 있었다. 이채연 공사는 황제의 전권으로 워싱턴 외교가에 이름을 냈다. 미국 블레인(Blaine) 국무장관에게 “본 공사관 건물 구입을 계기로 양국 간 유대는 더욱 긴밀해질 것”이라는 공문을 보냈다.

 역사의 특별한 현장인 공사관을 취재하고 있는 박보균 대기자.

 

 고종의 도전은 한계를 드러냈다. 부국강병 없는 줄타기 외교의 비극이다. 1904년 러일전쟁이 시작됐다. 러시아는 패배했다. 1905년 9월 미국 포츠머스항에서 러·일 휴전조약이 체결됐다. 포츠머스조약은 일본의 야욕을 거침없게 한다. 그해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 조선의 외교권은 박탈된다. 서울의 미국공사관도 폐쇄된다. 고종의 거중조정 기대는 무너졌다. 미국은 서구 열강 중 제일 먼저 철수한다. 국제정치의 생리는 냉혹하다. 워싱턴의 김윤정 서리공사는 공사관을 일본에 넘겨준다.

 그리고 1910년 8월 29일 한·일 강제병합. 공관의 운명은 다했다. 일본은 병합 두 달전 이 건물을 단돈 5달러에 산다. 강탈의 형식적인 서류 정리다. 양도인은 고종(한국 태황제 폐하 ·太皇帝陛下 ), 양수인은 주미 일본공사 우치다(內田康哉), 궁내부 특진관 민병석 등이 연좌 서명했다.

 경술국치 이틀 후 우치다는 미국 민간인(풀턴)에게 건물을 처분한다. 매매가 10달러다.

 나라의 비극은 공관의 비운이다. 일제시대, 해방과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공관은 잊혀졌다. 재개발되거나 헐렸을 것으로 짐작됐다. 하지만 어느 날 그 건물은 살아 숨쉬며 등장했다. 비운 속 기적이다. 공사관은 왜 생존해 있는가. 후손들에게 역사의 교훈을 주려는 것인가.

 21세기 한반도 정세는 구한말과 비슷하게 짜여지고 있다. 한·중·일 사이의 갈등과 대립은 겹쳐 있다. 한국은 허약한 조선과 다르다. 하지만 지정학적 운명은 변하지 않는다. 대륙과 해양세력의 교차점이다. 한국은 이웃 나라들과 골고루 친해야 한다.

 동북아 장래는 불투명하다. 북한 세습체제는 불확실하다. 대륙이 융성할 때 반도는 허약했다. 중국은 미국과 함께 최강이다. 일본의 미흡한 과거사 반성은 만성적인 정세 불안 요소다. 일본의 독도 야심은 계속된다. 부국강병만이 나라와 국민의 안전을 유지한다. 국가지도자의 역사적 상상력과 외교 비전만이 나라를 키운다. 공사관은 그 교훈으로 비운의 서사시(敍事詩)를 마감한다.

◆1891년 2만5000달러=그때 이후 미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적용하면 현재 가격으로 127만 달러 수준이다(정부의 비공식 추정). 조선의 열악한 재정으론 감당하기 힘든 수준의 액수.

 박보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