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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闕(4-3): 昌慶宮, 日帝의 受難을 겪은 東向의 궁궐(1)

Joyfule 2014. 12. 6. 08:59

 

 

東闕(4-3): 昌慶宮, 日帝의 受難을 겪은 東向의 궁궐(1)

 

昌慶宮   -사적 제123-

창경궁은 世宗이 즉위한 1418년 고려 南京의 離宮터에 上王 太宗을 위해 壽康宮을 건립했던

자리에 成宗 15(1484) 世祖 妃 貞熹王后, 德宗 妃이며 成宗의 母后인 昭惠王后, 睿宗의 繼妃

安順王后 등 세 王后를 위하여 건립하였다.

처음에 건립한 전각은 正殿인 明政殿, 便殿인 文政殿, 寢殿인 壽寧殿과 歡慶殿, 景春殿, 仁陽殿,

通明殿, 養和堂, 麗暉堂, 思誠閣 등이었으며 조선시대의 궁궐 중에서 유일하게 東向이었는데

전각의 이름은 徐居正이, 명정전의 上樑文은 金宗直이 지었다.

 

처음에는 별로 사용되지 않다가 壬辰倭亂 때에 경복궁·창덕궁과 함께 소실된 후 昌德宮과 함께

光海君 8(1616) 再建되어 조선왕조 역사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肅宗의 사랑을 받던 張禧嬪이 주로 就善堂(현 낙선재 부근)에서 생활하면서 仁顯王后를

독살하려다 처형되고, 景宗 때 王世子의 즉위를 둘러싸고 辛丑獄事와 壬寅獄事로 老論 大臣들의

처형이 東宮 처소를 중심으로 벌어졌으며 英祖는 思悼世子를 뒤주에 가두어 宣人門 안뜰에 두어

 굶어 죽게 했다.

 

재건 이후에도 몇 차례의 화재로 내전이 불탔기 때문에 지금 남아 있는 것은 明政殿을 비롯한

그 회랑과 明政門, 정문인 弘化門 등 外殿과, 純祖 34(1834) 다시 지은 崇文堂·涵仁亭·歡慶殿·

景春殿·通明殿·陽和堂·集福軒·迎春軒 등의 內殿으로 나눌 수 있다.

창경궁은 純宗 즉위 후 日帝에 의하여 1909년 궁궐 안의 건물들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으며, 1911년에는 창경궁을 昌慶苑으로 격하시키고, 창경궁과 종묘를 잇는 산맥을

절단하여 도로를 개설하였으며, 궁 안에 벚나무를 수천 그루나 심어놓고 1924년부터

밤 벚꽃놀이를 시작하였다.

 

광복 이후에도 관광시설로 이용되다가 '창경궁 복원 계획'을 세워 1983 7월부터 일반공개를

중단하고, 원래의 명칭인 창경궁으로 환원하였으며, 1984년부터 1986 8월까지 동물원은

서울대공원으로 이전하고 식물원 시설 및 일본식 건물을 철거하고 문정전 등을 복원하였으며,

벚나무도 소나무·느티나무·단풍나무 등으로 교체하고 한국 전통의 園林을 조성하는 등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昌德宮 사진

 

(01) 창덕궁에서 창경궁으로 통하는 문, 창덕궁 후원으로 가는 길과 붙어있다.

 

 

 

(03) 창경궁에는 단풍이 한창이다.

 

 

 

(05) 昌慶宮 慈慶殿 터

    

     大妃의 寢殿인 慈慶殿이 있던 곳으로 正祖가 모친 惠慶宮 洪氏를 위하여 앞쪽으로 멀리

     思悼世子의 祠堂인 景慕宮을 향하도록 전망이 좋은 곳에 건립하였으며 뒤쪽에는 아름다운

     계단식 後苑이 있었다.

      <閑中錄>의 産室인 이 건물은 19세기 후반에 철거되고 日帝强占期에는 근대적 왕실도서관인

       藏書閣이 들어섰다가 1992년에 철거되었다.

 

              

               (06) 昌慶宮 風旗臺   -보물 제846-

 

               英祖 8(1732)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풍기대 위의 구멍에 깃대를

               꽂고 그 깃대에 기를 달아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측정하였다.

               전체 높이 228.1cm, 하부대석 높이 92.4cm, 넓이 62.8×61.5cm, 상부

               八角柱 높이 135.7cm, 지름 43.2cm이며 8각주 위에 깃발 달린 깃대를

               꽂아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가늠했던 기상관측기구이다.

 

(07) 仰釜日晷. 보물 제845(國立故宮博物館 소장) 복제품.

 

  世宗 16(1434) 蔣英實이 처음 만든 해시계를 鍾路 惠政橋와 宗廟 南街에 설치하여 한국

  최초의 公衆時計 역할을 했으나 壬辰倭亂 때 유실되어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시계판이 가마솥같이 오목하고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다고 仰釜日晷라는 이름을 붙였다(*: 해 그림자 귀/)

 오목한 시계판에 세로 7줄의 時刻線과 가로 13줄의 季節線 그어 놓았다.

 

(08) 仰釜日晷 옆에 있는 怪石

 

(09) 成宗 胎室   <2005.10.27 사진>

 

성종 태실은 조선 成宗의 胎를 묻은 곳으로 養和堂의 동북쪽 구릉지에 있다.

성종의 태실은 경기 廣州郡 慶安面에 있었으나 日帝가 1930년 전국에 散在한 조선 역대

임금의 태실을 강제로 이전하면서 창경궁으로 옮기고, 나머지 태실은 대부분 西三陵으로 이전되었다.

태실 앞(동쪽)에 있는 胎室碑는 龜趺 위에 螭首로 장식한 碑身 앞면에는 <成宗大王 胎室>이라

刻字하고, 뒷면에는 비를 세우게 된 이력이 새겨져 있다.

 

              

               (10) 昌慶宮 八角七層石塔  -보물 제1119-    <2005.10.27 사진>

 

                  成宗 원년(1470) 중국에서 조성된 높이 6.5m의 석탑으로 日帝强占初期

                  창경궁에 李王家博物館을 만들 때 滿洲에서 가지고 온 상인으로부터

                  매입하여 세운 것으로 한국에 있는 유일한 중국석탑으로 가치가 크다.

 

(11) 春塘池    <2005.10.27 사진>

 

 昌慶宮 후원에 1909년에 조성된 연못으로 두 개의 연못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연못 속의

 섬은 1986년에 조성한 것이다.

 이곳은 원래 燕山君이 瑞葱臺 앞 대지를 파다가 중종반정으로 중단한 곳으로 그 후 勸農場의

 논이 있던 곳이다.  (*: 파 총)

 

(12) 迎春軒(오른쪽/동쪽)과 集福軒(왼쪽)

 

      이 일대는 後宮들의 處所가 밀집되었던 지역으로 영춘헌과 집복헌도 후궁의 居處였다.

      현재는 집복헌이 마치 영춘헌의 行閣처럼 붙어 있으나 원래는 두 건물로 분리되어 있었으며

      純祖 30(1830) 화재로 歡慶殿·景春殿 등과 함께 소실되어 1834년에 再建하면서 지금처럼

      바뀐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건물의 동쪽에 宮女들의 居處로 추정되는 건물들이 많았으나 지금은 빈터이다.

 

(13) 迎春軒.  창경궁의 內殿으로 正祖가 寄居하다가 昇遐한 곳이다.

 

(15) 通明殿과 養和堂(오른쪽)

 

(16) 昌慶宮 通明殿  -보물 제818

 

 창경궁의 燕朝空間(왕족의 생활공간)으로 明政殿 서북쪽에 있으며, 왕과 왕비가 생활하던

 寢殿의 중심 건물로 창경궁 창건 때 건립, 임진왜란 때 소실 후 재건 되고, 다시 李适의 亂

 正祖 때 화재를 입었다.

 지금의 건물은 純祖 34(1834)에 重建된 것으로 남향한 전면에는 月臺를 두고 양모서리에는

 청동제 드므를 놓고 그 북쪽에 외벌대 基壇 한 단을 두어 건물을 세웠다.

 궁궐 안 내전 중 가장 큰 건물로 옛 격식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19세기 건축 양식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이다.

 

(17) 通明殿 앞면

 

(18) 통명전 띠살문

 

(19) 전각 안에 있는 <通明殿> 편액.  金箔으로 쓴 <通明殿’> 편액은 純祖의 御筆이다.

 

(20) 통명전 井字살문

 

(21) 通明殿 月臺에 있는 靑銅製 드므

 

      防火水를 담는 容器로, 火魔가 물에 비친 제 모습에 놀라 도망가게 한다는 화재예방을 위한

     象徵的, 呪術的인 의미가 더 크다.

 

(22) 通明殿 側後面

 

(23) 통명전 샘

 

(24) 통명전 샘

 

(25) 通明殿 後苑

 

(26) 養和堂

 

 通明殿에서 생활하던 內命婦의 首長(王妃)들이 접대공간으로 사용한 건물로 추정되며

 <養和堂> 명칭은 徐居正이 지었고, 扁額은 純祖의 御筆이다.

 창경궁 창건 시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 光海君 때 재건된 이후에도 몇 차례

 화재를 겪으면서 純祖 34(1834) 재건되었다.

 丙子胡亂 때 南漢山城으로 避亂했던 仁祖가 還宮하면서 이곳에 거처하였으며,

 高宗 15(1878) 哲宗의 妃 哲仁王后가 승하한 곳이다.

 

(27) 養和堂 띠살문

 

(28) 景春殿과 歡慶殿(오른쪽)

 

      두 건물은 원래 각각 行閣을 두른 독립된 영역이었으나 純祖 34(1834)에 다시 세우면서

      지금의 형태로 변형되었다.

 

(29) 景春殿

 

      경춘전은 大妃의 寢殿으로 成宗 15(1484)에 창건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燒失되어

      純祖 34(1834)에 재건하였다. 王妃의 産室로도 쓰여 正祖·憲宗이 이곳에서 태어났으며,

      정조는 자신의 탄생을 기념하여 내부에 <誕生殿>이라고 쓴 御筆 편액을 걸었다.

      肅宗의 繼妃 仁顯王后 閔氏가 이곳에서 昇遐했다.

 

(30) <景春殿> 편액. 純祖의 御筆.

 

(31) 歡慶殿

 

      1484년 성종 때 창경궁이 창건되면서 임금의 침전으로 歡慶殿이 건립되어 通明殿, 慶春殿,

      養和堂과 함께 창경궁의 內殿을 구성하는 전각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光海君 때인

      1616년에 재건하였으나 論功行賞에 대한 불만으로 일으킨 仁祖反正의 주역인 李适의 亂 때

     불에 타 1633년에 復元하였으나 純祖 30(1830) 창경궁의 大火災로 다시 소실되어 1833년에

     復元하였다. 中宗과 昭顯世子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건물 뒤 북쪽은 여러 大妃들의 寢殿이 밀집해 있었으나 지금은 빈터로 남아있다.

 

32) 歡慶殿 편액과 띠살문

 

              

               (33) 昌慶宮 五層石塔. 고려 중엽 조성된 것으로 추정.

 

                   抑佛崇儒의 조선 왕궁에 佛塔이 있는 것은 1915년 日帝强占期 朝鮮總督府의

                   ‘朝鮮物産共進會행사를 위하여 징발된 것으로 보고 있으나 원래 五層石塔의

                   所在地를 알 수 없다고 한다. 奉恩寺에서 이 석탑을 이전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文化財廳에서는 앞으로 원 소장처가 밝혀지지 않을 경우, 국립중앙박물관 등

                   관계기관과 협의해 적정한 위치로 이전할 계획이라며 봉은사로의 이운 계획에

                   대해 거부입장을 표명했다고 한다 불교신문 2014.10.24-

 

(34) 涵仁亭  (*: 젖을 함)

 

      燕山君 때 건립한 仁陽殿이 있던 자리에 壬辰倭亂 때 소실되어 그 자리에 丁卯胡亂 때(1627)

      江華島로 避亂했던 仁祖가 창경궁으로 돌아와 1633년에 지은 전각으로 仁王山 아래 있었던

      仁慶宮에 있던 함인정을 헐어 이곳에 옮겨 짓고 文武科에 급제한 사람들을 접견했다고 한다.

 純祖 30(1830) 창경궁의 대 화재로 전소되어 1833년에 중건하여 임금들이 便殿으로 사용했으나

예전과 달리 현재는 벽체가 없고 모두 개방되어 있으며 뒤쪽에 恭默閤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涵仁亭은 세상이 임금의 어짊과 義로움에 흠뻑 젖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35) 涵仁亭 내부 현판

 

  함인정 내부 천장 아래에는 四方에는 陶潛(淵明)의 四時 <春水萬四澤>을 비롯하여

  <夏雲多奇峰>, <秋月揚明輝>, <冬嶺秀孤松>이 걸려있다.

 *언 땅 녹은 봄물 못마다 가득, 여름 구름 기이한 봉우리 많다.

   가을 달 드높이 밝게 비추고겨울 영마루 소나무 하나 빼어나네.

 

(36) 賓陽門(왼쪽)과 崇文堂

 

빈양문은 숭문당 북쪽에 연접되어 있는 문으로 治朝空間(外殿)과 燕朝空間(內殿)

연결하는 문으로 북쪽으로 涵仁亭, 景春殿, 歡景殿이 있으며 1986년 重建工事 때 재건하였다.

 

(37) 崇文堂

 

 正殿인 明政殿의 後殿으로 光海君 때 창경궁과 같이 건립된 전각으로 추정되며 <崇文堂>

 편액 글씨는 英祖 御筆이며, 임금이 신하들과 經筵을 열던 곳으로 영조가 이곳에서

 太學生(成均館에서 기거하며 공부하던 儒生)을 접견하여 시험하기도 하고 때로는 酒宴을

 베풀어 그들을 격려하기도 했는데 純祖 30년 大 火災로 소실되어 重建하였다.

 

(38) 文政殿

 

 왕이 평상시에 居處하며 政事를 살피던 便殿으로 동향인 明政殿과 다르게 남향건물로

 편전이면서도 王室의 神主를 모신 魂殿으로도 자주 사용하였다.  成宗 15(1484) 창경궁이

 창건될 때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광해군 때 중건되었으나 1930년 이후 日帝의

 창경궁 파괴작업으로 사라져 1986년에 복원되었다. 思悼世子가 뒤주에 갇혀 죽음을 당했던

 徽寧殿이 문정전의 옛이름이라고 알려져 있다.

 

(39) 文政殿 御座. 龍床 뒤에는 日月五嶽圖 병풍이 처져있다.

 

(40) 文政殿 추녀와 雜像

 

(41) 文政門

 

(42) 文政殿 외부 東宮 터 일원.

 

  日帝의 창경궁 파괴로 빈터만 남아 있으며, 그 왼쪽(동쪽)은 闕內各司 터로 역시 빈터로 남아있다.

 

(43) 昌慶宮 觀天臺   -보물 제851-    <2005.10.27 사진>

  肅宗 14(1688) 領議政 겸 觀象監 領事 南九萬이 昌德宮 金虎門 밖에 축조했다가 후에

  창경궁으로 옮겼다. 현재 종로구 계동 현대빌딩 앞에 있었던 觀象監에 있는 觀天臺와 함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천문대로 꼽히며 '小簡儀臺' 또는 '瞻星臺'라고도 한다.

 높이 3m, 넓이 2.9m×2.3m 정도 되는 화강암 석대 위에 돌난간을 두르고 한가운데에

 천체관측 기기인 簡儀를 설치하고 천체를 관측했으나 간의는 없어지고 석대만 남아 있다.

 

         -東闕(4-4): 昌慶宮(2)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