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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의 선각자 이승만 박사

Joyfule 2007. 11. 11. 00:17

건국의 선각자 이승만 박사   

 

국운(國運)이 무너져 가던 구한말(1875년)에 태어나서 청소년기에 이미 한학(漢學)을 깨우치고

 20대 청년기에는 배재 학당에서 영어를 마스터했습니다. 

그리고 일찌기 나라의 개혁과 독립, 민주주의의 여명을 위해 뛰다가 7년의 옥고를 치른 진보적 개혁자였습니다.

그는 한마디로 천재적이고 입지전적인 생을 살았습니다.

미국에 유학 가서 불과 5년만에 조지 워싱턴 대학교는 1년을 뛰어 넘어 졸업하고

연이어서 하버드대학 석사와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마쳤던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입니다. 

 

1950년대에는 은사였던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미국 시민권 소유 권고를 사양하고

대한민국 최초의 임시 정부 여권을 만들어서 제네바, 파리를 누비며 나라의 독립을 호소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범인들이 그토록 챙겨두기를 힘쓰는 후사(後嗣)도 재산도 별반 남긴 것이 없습니다. 

 

초대 대통령 그는 생의 끝 부분에서는 국민으로부터 버림 받은 몸으로,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하와이 한인교회에 담담히 서있는 동상이 말하는 것처럼

본시 그는 누구보다 나라 사랑의 열정이 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독재자, 친미 사대주의자, 영구 분단의 주인공으로만 폄하, 낙인 찍히기에는

역사적으로 커다란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없지 않습니다.

 

1948년 7월 24일 대통령 취임 선서에서 74세의 이승만 박사는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여러번 죽었던 이 몸이 하나님의 은혜와 동포들의 애호로 지금까지 살아 있다가

오늘에 이와 같이 영광스러운 추대를 받은 나로서는 일변 감격한 마음과

일변 감당키 어려운 책임을 지고 두려운 생각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그의 생애와 의지를 이해하는 단초가 되는 연설 부분입니다. 

그는 정동 감리교회의 장로로서 주일 예배를 어김없이 드렸습니다. 

국무에 맡겨진 시간의 쪼들림으로 교회를 섬기지 못함을 죄스럽다고 고백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호형호제의 정을 나누었던 건국의 두 거두,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은 모두가

기독교인으로 살았으나 정치적으로는 첨예한 대립각을 세워 서로가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요컨대 이승만 박사는 남한만이라도 속히 자주 정부를 세워서 국제적으로,

자주 독립국에 되어야 한다는 현실주의(Realist)였다면 김구 선생은 동족끼리 대화로 해서 안 될 일이 없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지금 민주 통일을 실현하지 않으면

반세기의 세월을 낭비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이상주의자(Idealist) 였습니다. 

 

해방 후 여운형씨는 가장 먼저 정치 활동을 시작한 좌파로서 ‘건국준비 위원회’를 결성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박사는 좌파였던 여운형씨뿐만 아니라

민족의 대동단결과 주권의 회복을 위해서는 누구든지 포용할 생각이었습니다. 

실사구지(實事求是)의 프라그마티스트(실용주의자)였기 때문입니다. 

김구 선생 자신도 ‘나에게 이승만 박사 이상의 수완이 있다고 신방하지 말아 주기 바란다’고 실토할 정도였습니다. 

 

청년 이승만의 꿈은 아시아에서 최초의 기독교 나라 건설이었습니다. 

미국으로 유학가서도 새벽마다 조국의 독립과 자유민주주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때의 나라 사랑의 열정과 배움의 탐구 열정을 성서적 시각에서 결심한 실로 선각자였음을 실감케 합니다.

나라의 형편과 문화, 교육 실상에 비할 때 이미 글로벌 국가 경영 구상을 성경 위에서 펼치고 있었습니다.

구한말의 정부개혁을 요구하다가 영어의 몸이 된 한성 감옥에서 ‘옥중서당’을 열고

 ‘옥중 도서실’을 운영하며 함께 했던 월남 이상재 선생과 그 아들에게 복음을 소개하는 전도자였습니다. 

감히 범인은 상상하기도 힘든 결단의 모습입니다.

 

그는 근대 한국의 개혁자, 건국의 아버지였습니다. 

그가 크리스찬 선비 정신을 잃어버리기 시작한 것은 정치적인 과신과 탐욕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시대를 함께 걸머진 선진화 시대를 여는 동지들의 부족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탁월한 선견자였고 평생을 나라 사랑으로 살았습니다. 

말년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흔들렸기에 저지른 실수의 그림자가 두껍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정치적 명예와 욕망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역사에 남기고 갔습니다.

 

이승종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