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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 석비(The Nazareth stele), 나사렛 비문 (The Nazareth Inscription),

Joyfule 2015. 9. 14. 08:32

 

나사렛 석비(The Nazareth stele),

나사렛 비문 (The Nazareth Inscription),

 

 

 

<1. 나사렛 석비, The Nazareth stele- 나사렛 존재에 대한 고고학 자료 발굴, 1962년>

 

Prof. Avi-Yonah(미가엘 아비요나)  in Caesarea, 1962.  

(출처- http://www.mythicistpapers.com/2013/07/01/nazareth-the-caesarea-inscription)

 

The Nazareth stele   (출처- http://www.mythicistpapers.com/2013/07/01/nazareth-the-caesarea-inscription)

 

The Caesarea inscription as reconstructed by Avi-Yonah. Fragment C (top) is lost. Fragments A and B supposedly begin and end the same lines of text.

1962년 팔레스타인의 가이사랴에서 발굴한 이 비석은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감정되는 한 유대인 비문에 나사렛이란 지명이 등장하고 있다. 1962년 미가엘 아비요나의 발굴팀은 가이샤랴에서 24반열의 제사장목록이 기록되어 있는 몇개의 비문조각을 발견하는데 거기에 나사렛이라는 이름이 나타난다. 대리석 석판에는 기원후 70년에 있었던 성전함락과 더불어 거처를 옮긴 제사장들이 사는 갈릴리 마을들의 이름이 그들의 성과 함께 새겨져 있다.

 

The Nazareth stele       (출처- http://www.mythicistpapers.com/2013/07/01/nazareth-the-caesarea-inscription)

 

The lost (and largest) fragment C from a photo published by S. Talmon in 1958. It allegedly contains parts of lines 14-17 of the list of priestly courses.  사진의 두 번째 줄에 히브리어로 기록된 나사렛(???????)이란 단어가 선명하게 보인다.  

 

1. 나사렛의 존재 여부 의문들

여호수아 19장 10-15절에는 스블론 자손들이 거할 땅들의 이름들이 나온다. 그런데 나사렛은 이 이름들 중에 없다. 요세푸스는 갈릴리 지역의 45개 마을들의 이름을 기록하였지만 거기에도 나사렛은 없다. 탈무드에도 62개의 마을들이 나오지만 여기에도 나사렛은 빠져있다. 때문에 비평가들이 질문을 한다. “정말로 나사렛이라고 하는 동네가 실존하였는가?”  무신론자인 프랭크 진들러는 그의 논문, 『예수가 결코 걷지 않았던 곳(Where Jesus Never Walked)』에서 말하기를, 나사렛이란 지명이 구약성경이나, 사도바울에 의해서나, 탈무드 -63개의 다른 갈릴리 마을은 인용되어 있지만- 에 의해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했다. 그리고 요세푸스도 현재의 나사렛으로부터 1마일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야파(Japha)를 포함하여 45개의 갈릴리 마을과 도시를 열거했지만, 나사렛은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4세기 전의 어떤 기록도 나사렛은 언급하지 않았다. 7세기 경 유대 문학 작품인 한 시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Lee Strobel, 132.> 『고대 문명의 수수께끼』의 저자 ‘로버트 시블루드’도 이 증언을 뒷받침 한다. “학자들에 따르면 예수의 초창기 시절 나사렛 마을이 있었다는 역사적 증거는 없습니다.” <Xtrem Mystery, “예수는 실존 인물이었는가?” 참조.>

2.  이러한 주장들은 고고학적 발견 이후 모두 반박되었다. 근대 나사렛의 발굴은 나사렛에 로마시대 훨씬 이전부터 정착 자들이 있었다는 것과 또한 나사렛이 아주 작은 동네였다고 밝히고 있다.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 여왕은 그 자리에 교회를 지었고 그곳이 예수의 가족들의 거주지였다고 여겼다.

(1) 나사렛석비(The Nazareth stele)-  비기독교적 문헌에서 나사렛이 처음 언급된 것은 1962년 가이사랴에서 발굴된 진회색 석회석 조각에 새겨진 비석이다. 1962년 Michael Avi-Yonah가 가이사랴에서 3개의 조각난 비석들 중 2개를 발견하였는데, 이 비석을 나사렛 비석이라고 부르며 이것이 나사렛이라는 이름이 들어 있는 첫 비문이다. 이것을 통하여 나사렛이라는 동네가 A.D. 1세기에 실제로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의 공격으로 무너졌을 때 24개의 경로로 다른 곳으로 이주한 제사장 가족 명단이 적힌 아람어로 된 목록이 나오는데, 그 명단을 복원하면, “하피제즈[Hapizzez, 라고 불리는] 열여덟 번째 제사장 과정, 나사렛[에 다시 정착했다].”라는, 제사장 가족이 나사렛으로 이주한 기록이 등장한다.

(2) 고대 나사렛 마을 유적 발굴- 1955년-60년까지 프란체스코 학자 ‘벨라미노 바가티’는 나사렛을 발굴하였는데, 헐어버린 옛 수태고지 교회의 밑바닥과, 성 요셉 교회로 향해 있는 프란체스코회 소유의 토지 밑을 발굴하였다. 또한 바가티와 그 이전의 탐사대에 의해 발견된 무덤들은 본래 나사렛 마을의 외곽지역에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 마을의 경계선도 알려준다. 그러므로 실제로 얼마나 작았는지를 알 수 있다.”  <J. D. Crossan, The Historical Jesus: The Life of a Mediterranean Jewish Peasant, 김준우 역,『역사적 예수』(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0), 75, 76.>

 

고대 나사렛 마을 유적 

 

고대 나사렛 마을 유적 

 

고대 나사렛 마을 유적 

 

고대 나사렛 마을 유적 

  

(3)?“나사렛의 존재에 대해서 쿰란 사본에서도 발견된다.” <Xtrem Mystery.>

(4) 나사렛 무덤 발굴- 플로리다대학의 제임스 스트랑거(James Strange)박사는 1세기에 나사렛이 존재하였으며 인구 최대 인구 약 480명 정도, 가구수 20- 30가구 정도의 아주 작은 마을이었을 것으로 추론하고 있다. 그 근거로 마을 근처에서 발굴된 1세기 양식의 공동무덤 23개가 발굴된 사실을 들고 있다. 그 무렵 유대인의 법에 따르면 시신은 마을 밖에서 매장해야 하였으며 자연스럽게 무덤들이 곧 마을의 경계가 되곤 하였다. 발굴된 무덤 중 2 개의 무덤에서는 1~4세기 때의 도기 램프와 유리그릇, 그리고 항아리가 들어 있었다. 고고학자 잭 피네건(Jack Finegan)도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를 통해 발간한 그의 책에서 “무덤들로부터... 나사렛이 로마 시대에 유대인의 확고한 정착지였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5)?자유주의 학자들은 나사렛의 존재를 의심했지만  크로산 마저도 고고학적 증거로 나사렛의 존재를 확언한다. “그러므로 고고학의 또 다른 결론은 나사렛이 로마시대에도 매우 유대적인 마을이었다는 사실이다.”   <J. D. Crossan, 77>

 

<2. 나사렛 비문, The Nazareth Inscription, 가이사의 포고령, 1878년 발굴>

 

The Nazareth Inscription, 가이사의 포고령    (출처- http://www.biblearchaeology.org/post/2009/07/22/The-Nazareth-Inscription)

 

나사렛 비문(The Nazareth Inscription), 가이사의 포고령

 

The Nazareth Inscription is a proclamation of a Roman emperor that was written in Greek on a marble tablet measuring approximately 24 X 15 inches. The tablet was obtained from Nazareth (the hometown of Jesus) by Wilhelm Fr?hner in 1878, but remained unknown to the world for more than fifty years until it was purchased by the Paris National Library in 1925.

The Nazareth Inscription is frequently cited as a secular source of early origin that bears testimony to Jesus' empty tomb.  It seems to be a response to a request from Jewish leaders who were outraged at what they believed was the theft of the body of Jesus Christ by the apostles who sought to fake His resurrection. The edict is thought to have come from either Tiberius Caesar (A.D. 14-37), who was Roman emperor at the time of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or from Claudius Caesar (A.D. 41-54) who ruled shortly afterward. Clyde Billington of Northwestern College (Minnesota) dates the inscription to 41 A.D., providing textual evidence and historical synchronisms as strong supporting evidence for its issuance during the early reign of the Emperor Claudius. Translation from the Koine Greek by Clyde E. Billington

 

1. EDICT OF CAESAR  (무덤에 관한 가이사의 포고령)

2. It is my decision [concerning] graves and tombs--whoever has made

3. them for the religious observances of parents, or children, or household

4. members--that these remain undisturbed forever. But if anyone legally

5. charges that another person has destroyed, or has in any manner extracted

6. those who have been buried, or has moved with wicked intent those who

7. have been buried to other places, committing a crime against them, or has

8. moved sepulcher-sealing stones, against such a person, I order that a

9. judicial tribunal be created, just as [is done] concerning the gods in

10. human religious observances, even more so will it be obligatory to treat

11. with honor those who have been entombed. You are absolutely not to

12. allow anyone to move [those who have been entombed]. But if

13. [someone does], I wish that [violator] to suffer capital punishment under

14. the title of tomb-breaker. 

 

가이사의 포고령(The Nazareth Inscription)-  “여자들이 갈세 파수꾼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마 28:11-15)

실제로 이 소문은 총독의 귀에 들어갔다. 로마 황제는 이 소문을 듣고 팔레스타인에 법령을 발표하였는데 이 포고는 라틴어로 쓰여진 후 헬라어로 번역되어 유대의 모든 도시들에 붙여졌다. 1878년에 나사렛에서 흰 대리석판에 다음과 같이 쓰여진 글귀가 발견되었다.

“시저의 법령이라. 모든 무덤들과 묘지들은 그들의 조상들과 어린이들, 또한 가족들의 제사를 위하여, 또한 그것들을 만든 사람들의 의지를 존중하여 어떠한 장애 없이 영원히 보존되어야 한다. 그런데, 만약 어떤 자가 그것들을 무너뜨리거나 매장된 것을 빼내거나, 악의를 품고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또는 무덤의 문을 바꾸면, 우리의 신들과 제사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법정이 세워져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죽은 자를 존중하는 것은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방해는 절대적으로 금지되어야 하며, 만약 이 법을 범하면 중형에 처할 것이다.”

이 비석은 1세기초의 글씨 체제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학자들은 이 비석이 A.D. 50년 전에 쓰여진 것으로 보고 있다. 로마 중앙 정부가 아그립바가 죽기 전까지는 갈릴리 정부를 관할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포고는 A.D.44년 이후의 것으로 판정되어진다. 글라디우스가 A.D. 41년- 54년까지 총독으로 있었으므로 그가 이 글을 쓴 것이 확실하다. A.D. 49년, 글라디우스는 로마로부터 모든 유대인들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몰아내었다.  A.D. 41년경에 쓰여진 글라디우스의 편지를 보면 그가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시리아로부터 바다를 통하여 오는 모든 유대인들의 방문을 금지 시켰다. 만약 이 법을 어기면 “나는 그러한 자들을 세상에 퍼지고 있는 질병을 퍼뜨리는 자로서 취급하겠다”고 하였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세상에 퍼지고 있는 질병”은 바로 로마 제국 전체에 자라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Blaiklock에 제공한 다른 여러 증거들을 통하여 글라디우스가 유대나 시리아의 지도자들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의 증가에 관한 경고의 편지를 받은 것이 틀림없다. 유대 지도자들은 이 문제들을 예수의 시체가 없어진 그 날부터 염려해 왔으며, 이에 영향을 받은 글라디우스가 후에 위와 같이 작은 일에 전에 없는 중형을 부과하는 포고를 내리게 된 것이다.

 

<고고학이 증명하는 신약 성경>

 

1. 누가복음 : 누가복음 2장 1-3절에 보면 예수님의 탄생 시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를 다 호적 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첫 번 한 것”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 비평학자들은 그 때 당시 호적은 없었으며, 구레뇨도 수리아의 총독이 아니었고, 모든 사람들이 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호적을 하지도 않았었다고주장하였다. 그러나 첫째로,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로마는 정규적으로 세금 등록을 실시하였고 또한 매 14년마다 호적을 실시하였음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정말로 아구스도의 영으로서 시작된 것이며, 첫 번째로 시행된 때는 B.C. 23-22, 또는 B.C. 9-8 년경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둘째로, 구레뇨는 B.C. 7년과 A.D. 6년경, 모두 2번 총독의 자리에 있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안디옥에서 발견된 비문과 조세푸스의 기록에 따른 것이다.  셋째로, 이집트에서 발견된 파피루스에 보면 호적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호적 할 시기가 다가옴에 따라서 어떠한 이유로든지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서 살고 있는 자들은, 호적에 상관된 가족 등록을 하고, 경작지로 사용되고 있는 땅들이 원래 주인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돌아 가야할 필요가 있다.”

2. 빌라도 : 1961년까지는 빌라도에 대한 역사적인 자료들이 충분하지 못하여 단지 성경에 나와있다는 것 외에는 별 다른 기록이 없었다. 그런데 두 이태리 고고학자들이 지중해의 항구도시 가이사랴를 발굴하여 가로 2피트, 세로 3피트 정도 되는 라틴어로 된 비석을 발견하였다. Antonio Frova가 처음 이 비석을 읽었을 때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유다 총독 빌라도가 티베리움을 가이사랴의 시민들에게 선사하다.” 이 비석은 빌라도가 실제로 살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첫 번째 고고학적 기록이었다.

3. 가버나움 :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마 2:1) 그 곳에서 예수께서는 지붕을 뜯고 내려온 중풍병자를 고치셨다. 위의 말씀과마가복음 1:29-34절을 같이 볼 때 예수님의 집은 베드로의 장모의 집에 딸려있는 집 (Insulus : 여러 개의 방이 있는 바깥채)인 것처럼 보인다. 베드로의 어업이 번영하였다면 베드로의 집은 다른 보통 집들보다 조금 커서 여러 명의 사람들이 그곳에 살 수 있었을 것이지만, 성경에 나온 이러한 집의 구조가 실제로 그 때 당시 존재하였을까? 고고학자들이 가버나움의 자리를 발굴하였을 때 이렇게 생긴 Insulus가 발견되었다. 비잔티움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거룩하다고 생각되어지는 곳 위에 팔각 교회당을 지었는데 이렇게 지어진 교회가 가버나움에서 발견되었고 그 교회 아래서 Insulus라고 불리는 바깥채의 잔여가 발굴되어져 마가복음에 기술된 집의 형태가 실제였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4. 베데스다 연못 : A.D.1세기경, 구 예루살렘 북동쪽 4분의 1지점에 베데스다 (“새 도시”)라는 도시가 있었다. 베데스다 연못이 있었던 곳이라고 생각되어지는 St. Annes 교회 근처를 발굴하는 작업이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다. F.F. Bruce는 이 발굴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발굴을 통하여 베데스다 연못이 발견되었는데, 이 연못은 쌍둥이 연못으로 남-북쪽을 향하여 자리잡고 있으며, 두 연못 사이를 바위가 막고 있고, 그 주위를 “포르티고”라고 불리는 네 현관이 둘러싸고 있다. A.D. 333년경에 이곳을 방문하였던 보르도 순례자들은 그곳에서 쌍둥이 연못을 보았다고 적고 있다. 쿠무란에서 발견된 청동 두루마기에도히브리말로 “Beth-esh-dathain” (두 개의 샘터)라고 베데스다 연못을 설명하고 있다.

5. 맷돌 : 가버나움은 화산지역으로 화산암을 이용한 생활 기구들이 많이 쓰였다. 한 좋은 예는 가버나움 발굴 시 발견된 맷돌이다. 가버나움에서는 화산암으로 맷돌을 만들었으며 다른 지역으로도 수출을 하였는데 이 맷돌은 두 사람이 같이 돌리게 되어있다. 이 사실은 누가복음 17장 35절에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6. 갈릴리 배 : 1986년 1월 아마추어 고고학자 Moshe와 Yuval 형제는 Kibbutz Ginosar과Moshava Migdal 사이 갈릴리 해변에서 B.C. 1세기부터 A.D. 1세기경에 쓰였던 갈릴리 사람의 배를 발견하였다. 이 배는 고기잡이와 사람, 화물 운송용 등 다목적으로 쓰였던 배인데, 길이가 27 피트, 넓이가 7-1/2 피트로서 13명을 태울 수 있는 배였다. 이 배의 구조를 통하여 그 당시 가뭄으로 갈릴리 호수가 깊이가 낮았었음을 알 수있었다.

7. 성전 :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마가복음 13:1) 예수님의 제자들만이 성전의 아름다움을 찬탄한 것은 아니다. 탈무드는 “헤롯의 성전을 보지 못한 사람은 아름다운 건물을 아직 보지 못했다..”라고 어느 랍비의 말을 적고 있다. 이 성전이 있었던 곳은 25-30개의 풋볼 경기장을 합친 크기의 지역으로 고대 시대에 있었던 것 중에서 가장 크며, 벽의 높이는 주변 건물들 보다 10층 이상 더 높았다. 벽을 쌓을 때 사용된 돌들 중 가장 작은 것들만 해도 2-5톤이나 되며, 큰 것들은 고대 어느 시대에도 비할 수 없을 만큼 큰데 그 길이가 40피트, 넓이가 10피트, 무게가 400톤이나 된다. 이러한 크기의 돌들로 만들어진 웅장한 성전을 보며 “네가 이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 지리라”고 하시며 예루살렘의 멸망과 세상의 마지막을 비교 설명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주변 환경과 잘 융합되어 있다.

8. 요한복음 : 복음서들 중에서 성경 비판론자들에게 가장 믿을 수 없는 책으로 비판받는 복음서가 바로 요한 복음이다. 비판론자들은 요한이 쓴 글들과 복음서는 헬라의 철학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최근에 출간된 Atlantic Monthly에는 “적당히 적힌 일대기와 피상적으로 씌어진 헬레니즘 철학”이라고 요한 복음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사해사본은 이 문제에 관하여 다른 빛을 제공한다. Allegro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쿰람 도서관은 요한의 글들에 관한 연구와 그에 관하여 오랫동안 지속되던 잘못된 관념들이 갖고 있던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교정하는데 큰 역활을 하였다. 요한은 더 이상 헬레니즘에 가장 많이 물들었었던 전도자로서 여겨지지 않으며 그의 모든 생각들은 유대 종파주의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지극히 팔레스타인적인 사상이며 그가 쓴 모든 자료들은 복음주의 전통의 기본을 이루는 것으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학자들은 이제 요한을 헬레니즘 철학이나 그노시스주의에 영항을 받지 않았던 순수 유대적인 사람으로서 인정하게 되었고, 요한이 자세히 기술한 예루살렘의 지리학적 배치나 예루살렘의 멸망 전의 상황을 사실이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예를 들어, 요한은 요한복음 3:23절에 침례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침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고 적고 있는데 애논의 의미는 “샘터”이고 이곳은 실제로 살렘(Salim)에서 1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마을이다. 요한은 또한 2장 1절에 “갈릴리 가나”라고 하여 시돈 옆 가나와 확실히 분리하였고, 4장 5-6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과 사마리아를 통해서 가셨다고 간단히 기록하지 않고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고 놀랍도록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